참을 수 없는 슬기로움이 주는 묵직함_세상 모든 B급들을 위한 작은 시_김싸부

2021.06.28 | 조회 1.5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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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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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장르는 ‘판타지’다. 두 개의 판타지 서사가 있는데, ‘병원 혹은 의사’와 ‘친구 혹은 우정’이다. 병원은 참 힘든 곳이다. 일단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아픈 사람들은 저마다의 힘듦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아픈 사람들과 함께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족이거나 무척 가까운 사이다. 의사가 철저히 자신들의 주관적인 입장에 서서 진료를 해주고 치료를 해주기를 바란다.

반대로,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들은 아픈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앞서 말한 아픈 사람들의 주관적인 입장에 서서 일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사람으로 대하기 힘든 마치 ‘업무’ 중의 하나인 것처럼 객관적인 입장으로, 그럼에도 한 생명인 사람을 대해야 하는 적절한 주관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 둘이 화해되는 순간을 개인적으로 겪어본 적도, 어디서 들어본 적도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거의 죽을병에 걸린 ‘찐 환자’가 나오고, 그걸 포기하지 않고 오직 살린다. 살리고 만다에 목매는 ‘찐 의사’가 나오는 뻔한 클리셰와 같은 극적인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해왔던 것이다. 나도 저런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의사들이 보는 메디컬 드라마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르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가고 싶은 병원 만나고 싶은 의사에 대한 판타지를 99.9% 채워준다. 극 중 나오는 의사들은 김사부처럼 사연 있는 인물들은 아니다. 그리 비장하지도 않고, 신의 손이라 불리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마치 어느 병원에 한 명 정도는 있을 것 같은 그 정도의 좋은 의사 선생님, 딱 그 정도 톤으로 보여준다.

이런 판타지가 충족되니,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내가 저런 병원에서, 저런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병원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부정적인 경험이 힐링되는 듯했다. 이게 이 드라마가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식이었지 않나 싶다.

두 번째 판타지는 친구 혹은 우정이다. 20대 때는 지키려고 애를 써서 가꾼 비밀의 정원 같은 혼자의 성역이 확실히 있었다. 하지만 외에 내 주변에는 항상 ‘친구’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과 보낸 시간은 즐거웠고, 든든했고, 아름다웠다.

30대가 되고, 결혼하고 나니 이전처럼 친구들과 그런 ‘우정’을 나누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더더욱. 가정 안에서 새롭게 채워지는 부분이 있는 것은 확실하나, 문득 그런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들, 우정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리운 것도 분명하다.

이 드라마는 그런 ‘친구’와 ‘우정’에 대한 판타지를 적절하게 채워줬다. 나이가 먹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하거나, 돌싱이 되거나, 그 모든 과정에서 계속 이어지는, 오래 사귀어 서로에 대해서 장단점들을 속속들이 알지만 딱히 그것들에 자격지심 느끼지 않고 단죄하거나 불편해하지도 않은, 함께 있는 시간에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그런 오랜 친구와 우정에 대한 판타지 말이다. (거기다가 그런 친구들과 밴드라니 이건 거의 판타지의 절정 아닌가)

이런 두 개의 판타지 서사를 주축으로, 이 드라마는 매회 차마다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들었다 놨다 했다. 톤이 조금 무거워지려고 하면 다시 금세 올려놓고, 톤이 살짝 가벼워지려고 하면 금세 묵직하게 가라앉게 하고.

이런 섬세한 감성은 신원호 감독의 특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메디컬 드라마라는 외피에서 어떻게 구현할까 궁금해했었는데 ‘슬기로운 감빵생활’과 ‘응답하라’ 시리즈의 중간 지점에서 몹시 적절한 균형감각을 보여주며 잘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감독의 또 하나의 특기인 ‘레트로 감성’을 어찌 보여줄까 궁금했는데, 그걸 밴드를 통해 배우들이 직접 부르는 추억의 노래들을 깔아버림으로 드라마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어찌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지 최근에 그 노래들만 반복 재생으로 들었다. 정말 레트로 감성을 우려내는데 장인이라는 생각밖에는 안 든다.

‘낭만 닥터 김사부’가 ‘메디컬 무협’이라고 한다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메디컬 동화’라고 하고 싶다. ‘펜트하우스’를 보면 마음이 오염(?)되는 것 같은데, 이 드라마를 보면 정화가 된다. 동화의 특징이란, 교훈을 직접 주려 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스스로 교훈을 얻게 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 굳이 ‘슬기로운 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슬기로운이 무엇인지 매회, 매장 면마다 성실히 보여주고 있다. 뜨겁지 않으나 따스했고, 현실적이나 현실적이지 않아 좋았고, 한 명 한 명의 캐릭터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착해서 좋았다.

클리셰 범벅이던 메디컬 드라마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시즌 3까지 제작된다니, 소리 질러!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우리 처음 만난 그날에”

이 노래 가사가 이 드라마에 대한 내 마음을 그대로 말해준다.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참을 수 없는 슬기로움의 묵직함과 사랑에 빠져보시길 -


‘세상 모든 B급들을 위한 작은 시’ 글쓴이 - 김싸부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닌, 글이 나를 쓰길 바라며, 오늘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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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펄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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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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