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색연필을 놓지 않던 딸아이는 서울예고에 진학했다. 만두라고 불렸던 목부분에 주름이 잡힌 하얀 블라우스, 회색 조끼와 재킷, 그리고 회색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평창동까지 통학할 일이 꿈만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스쿨버스도 없었고 매일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아이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화구나 캔버스를 들고 등교 하는 날이 잦아서 통학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을 해야 했다.
서울예고를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봉고’라는 지입차를 이용하거나 학부모들이 직접 학교에 데려다주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아침 ‘라이드’를 해준다는 것은 마치 나에게는 우주여행을 다녀오라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하게 들렸다. ‘봉고’를 이용할 수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생각과 동시에 집을 알아보고 입학 전에 이사를 갔다.
딸아이는 서울예고 생활을 좋아했다. 여전히 레슨 시간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고 화실을 다니지는 않았다. 딸아이는 매년 5월에 있는 학교 미전 작품 제작에 그 어느때보다 열성이었다. 그때야말로 입시 미술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서울예고는 일학년 때는 동양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 등을 두루 배우고 이학년 때 전공을 정하는데 딸은 고민 없이 서양화로 정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마음속으로는 디자인이 취업하기엔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에 머물렀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그 즈음에 아이는 유튜브를 끼고 살았다. 2011년 당시에는 지금만큼 유튜브의 콘텐츠가 다양하지는 않았는데 주로 미국이나 유럽 콘텐츠를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부모가 보기에 좋은 콘텐츠는 아니었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서로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싸우기가 싫었다.
일하느라 늘 바빴던 나는 아이와 있는 시간만큼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서 둘 다 쉴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은 유튜브든 인터넷 콘텐츠든 본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수위를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쿨한 척 조언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쿨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작은 학원을 운영하면서 늘 전전 긍긍했고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아이 뒷바라지를 못할까 봐 매일매일 걱정이 산더미였다.
반면 딸아이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 얼굴이 시커멨다. 옷에도 시커먼 가루가 잔뜩 묻어 엉망이었다. 연탄재 위에 미끄러진 것 같았다. 목탄 드로잉 수업을 하고 얼굴이 그런 지도 모르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에 온 것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데 영문을 몰랐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아이는 뭐 어떠냐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사건도 있다. 딸아이가 어느 일요일 오후에는 산책을 간다며 쓱 나가더니 한 시간쯤 후에 상기된 얼굴로 들어와서는 내 손을 끌고 아파트 코너 벽으로 갔다. 벽에는 검은 스프레이로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말하자면 딸이 ‘뱅크시’ 흉내를 낸 것이었다. 나는 공공기물에 낙서하면 큰일 난다고 야단을 치며 얼른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날 이후로 매일 그 벽에 가서 혼자 ‘감상’하곤 했다. 그 아파트는 재건축이 되어 우리 둘만 아는 뱅크시 벽은 사라졌다.
딸아이는 실기와 학과 공부를 학교에서 거의 해결했다. 덩치도 작고 체력도 약해서 멀리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서울예고에서는 일, 이 학년은 일주일에 두 번, 삼학년은 일주일에 세 번 방과 후 레슨을 하는데 레슨을 하는 날은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왔다. 아이는 학원이나 과외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의 끝에 영어는 영어 강사였던 나에게 질문만 하기로 했고 수능 국어 학원 주 1회와 집 앞에 있는 수학학원만 주 2회 다니기로 했다.
주말 동안 아이는 푹 자거나 유튜브를 보고, 특이한 록그룹 음악을 들었는데 어찌나 특이한 그룹 음악만 들었는지 전 세계적으로 cd가 2000장 정도밖에 팔리지 않은 그룹이라고 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전시장을 찾거나 영화를 보고 아이가 좋아한 곱창구이나 매운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인셉션> <캐리비안의 해적>등을 재밌게 보았다.
고3이 되었다. 고3 때는 수능 공부와 실기시험 준비, 포트폴리오 준비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딸아이는 서울대 준비만 했다. 당시 딸아이는 교과 우수자 전형으로 홍대에 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실기 준비는 서울대 위주로만 하기로 했다. 서울대 서양화과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야 했는데 딸아이는 학교 레슨 시간을 이용해서 포트폴리오를 차곡차곡 만들었다.
당시 서울대는 ‘발상’이라는 입시 형태를 새로 도입했다. 새로운 도입된 ‘발상 문제 해결법’을 배우기 위해 아이는 6개월 동안 주 1회 화실을 다녔다. 봄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가을이 되고 아이는 일산 킨텍스까지 가서 서울대 실기 시험을 보았다. 1차에 합격한 후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면접과 수능을 보고 아이는 서울대 서양학과에 합격했다.
딸아이의 대학 생활은 파란만장했다. 본격적으로 예술가가 되겠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시기이기도 하고 인생을 통틀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실현 시킨 나날이기도 했다. 연극부, 아시아프 전시, 댄스 수업, 여행, 클럽 다니기, 학생회 활동, 패셔니스타, 운동 등을 하며 학교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저렇게도 인생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유럽여행을 다녀오는 등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젊은 시절의 경험이야 말로 큰 자산이며 진정한 공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게만 다니라는 조언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삼학년이 되어서야 스튜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전공 작업이 쌓이자 친구들과 함께 그룹 전을 열었는데 대략 60호 전후의 회화적 느낌 물씬 나는 작품들을 보며 내심 흐뭇했다. 갈 길을 가는 아이에게 무한한 신뢰가 쌓였다.
삼학년 때는 복수 전공을 신청할 수 있다. 통계학이나 디자인을 복수전공 할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조소과를 추천했다. 평면을 해봤으니 입체도 해보면 어떻겠냐는 논리였는데 마침 아이는 조소에 큰 관심이 있어 조소를 복수전공하기로 했다. 조소 전공 수업을 듣는 첫 날부터 체력적으로 부대꼈다. 학과의 특성상 수업 시간이 길었고 돌, 나무, 철사 등을 이용한 작업 스케일은 회화와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딸아이는 작품을 더욱 다이나믹하게 할 수 있다고 아주 좋아했다.
조소 과제전을 앞두고 전시 디스플레이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호암 교수회관에서 작은 강의가 있어 학교에 갔다가 전시 준비 중인 아이를 찾아갔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작품 마감에 정신이 없던 아이의 뒷 모습을 보고 나는 예고 없는 눈물 바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주차장 같은 야외 공간에 온갖 돌과 깨진 조각들, 톱, 끌, 돌가루 바람, 윙윙거리는 그라인더 소리 등이 예술과는 전혀 다른 공사판을 상상하게 했다.
심지어 그 돌을 멀리 있는 전시장에 옮겨야 했다. 땡볕에서 40kg 가까이 되는 돌을 수레에 싣고 둘이 밀고 끌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런 길이구나 하는 생각에 대리석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도 조각 작품은 돌이라고 하기엔 참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양화 졸업 전시 준비는 거의 일 년이 걸렸다. 한 벽을 온통 덮을 만큼 큰 작품을 두 개나 했고 설치 작업도 동시에 진행했다. 스케치를 하고 덮고 다시 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색을 칠하고 학교 작업실에서 밤을 새는 날도 많았다. 졸업전시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와서 시작하는 작가에게 큰 박수도 보내 주었다. 아이의 작품은 그 해 서울 경기 우수 졸업작품으로 선정되어 별도의 전시가 열렸다. 딸은 서양화 졸업 전시를 한 후 일 년 동안 조소과 전공 수업을 완료하고 서양화와 조소과 두 개의 졸업장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즈음에 딸아이는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으로 대학원 진학을 하기로 했다. 해외여행은 가봤지만 유학은 처음이라 유학원에 도움을 받으려고 상담을 갔다.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4부에서 계속됩니다-
글쓴이- 구경희
미술대학입시 전문 컨설턴트이다. 인생 이야기를 즐겨 읽다가 글쓰기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를 키우며 자신까지 해방된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한때 바위타기를 꿈꾸었다. 요가,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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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명소개: 예술가가 되고 싶은 너에게
우리나라에서 예술 교육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미리 그 싹을 없애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폭력적으로 들렸다. 수학을 잘하거나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특별하게 머리를 잘 매만지는 것처럼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를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예술학교들에 진학시킨 방법과 그 학교들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또 집에서는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 솔직하게 써 보고 싶다.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예술교육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이 글이 예술가를 꿈꾸는 많은 꿈나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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