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지쳤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모티콘을 꾸준히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한 템포 쉬어가면서, 심리 검사들과 심리 상담을 하고, 글쓰기도 배웠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 삶의 많은 선택들에는 대개 '나' 자신 보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 나는 그 보통의 삶을 위해서 아등바등 노력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아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나에 대해 더 알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 어쩌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이모티콘 그리기는 영 진도가 안 나갔다. 그리고 싶은 마음은 둥둥 떠다녔는데 이상하리만큼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이모티콘을 제작하는 일은 어찌 보면 이제 내게 ‘일’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다니는 시간 외에는 최대한 나를 위한 재밌는 시간들로 채웠다. 물론, 가만히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 시간도 많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들에 나를 내맡겼다. 나는 간헐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종종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단 무엇인가를 저질러서 약속을 만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내 성향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모티콘 강의를 몇 번 하기도 했고, 독서 모임에 참여했고, 원데이 향수 만들기 수업, 원데이 쿠키 만들기 수업, 매주 토요일 두 달 동안 메이크업과 속눈썹 강의도 들었고, 일주일에 한 번 탁구 강습도 받았다. 온라인으로, “아 나도 이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분을 만나면, 강연회 등에 가서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한 번 해볼까?” 하는 것들을 시도해 보았다. 나는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관련 일을 하는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뷰티 관련 입문자 과정 포스터를 지하철 역에서 보고 신청했다. 긍정 회로를 잘 돌리는 나는 “혹시 이 분야에 내가 숨겨진 재능을 찾아서 아이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황금 같은 토요일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매주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재능을 찾지는 못했지만, 하루종일 마네킹 속눈썹에 가닥가닥 속눈썹을 글루로 붙이면서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어쩌면 내 커리어와 전혀 상관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괜찮다. 이 시간에 그저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까. 수업을 듣고 실습을 하며, 처음 보는 분들과 두 달간 뷰티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알고 보니 나는 초면에도 꽤 편안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카카오 오픈 채팅방을 통해 강의를 문의 받았었고, 신기하게도 이모티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이모티콘 제작 방법, 제작 도구에 대해 물어봤다. 가끔 본인이 만든 이모티콘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내가 잘 아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니까 너무 즐거웠다. 카페에서 시킨 아메리카노를 반도 안 마시고 쉴 새 없이 한 시간 동안 말을 했다. 새로운 지식들을 흡수하려는 수강생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서 나도 큰 에너지를 얻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탁구 수업에 등록했다. 나는 특히 공을 이용한 운동은 무서워했다. 학창 시절, 체육 선생님이 피구를 한다고 하면 반 아이들은 대개 좋아했지만, 나는 피구공에 맞는 것이 아파서 싫었다. 안경을 쓴 반 친구가 피구공에 맞아 안경이 깨진 것들 두 번이나 목격한 뒤로는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공을 잘못 맞으면 아플 텐데 어쩌지 1시간 내내 겁에 질렸다. 차라리 빨리 등에 맞고 나가서 공이나 주워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탁구는 공을 무서워하는 내게 딱 맞는 종목이다. 탁구공은 맞아도 아프지가 않아서 내게 잘 맞았다. 탁구채를 악수하듯이 잡고, 몸은 살짝 숙이고 오른발은 살짝 열어서 공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공이 날아오면 탁구채가 11시를 향하게 대각선 위쪽 방향으로 올리며 공을 상대방에게 보낸다 라고 생각만 하고 몸은 뻣뻣하다. 마음과 몸은 따로 놀지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을 깨우고 있다.
스스로 나는 방향성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냥 마음만 너무 복잡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것들을 해내야 하는 어른의 책임감이 내게 너무 버거웠던 걸까. 회사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내 능력을 입증하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삶,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다들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는데 나는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어른의 가면을 쓰고 버겁게 견뎌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버겁고 복잡한 어른의 삶을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내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살아내기로 했다. 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세울 수가 없어서 불안했고 조급했고, 방향을 잃어버렸었다. 하지만, 어차피 계획을 세울 수 없다면, 순간순간에 내가 제일 원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여러 경험들을 했고, 삶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도 지속되겠지만, 나는 일단 내가 만들고 싶은 이모티콘을 완성해야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매번 루틴이나 할 일 목록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대부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할 일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내게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사를 다니는 것 외에 ‘할 일 목록’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고 싶은 일' 목록도 이모티콘 외에는 당분간 지우기로 했다. 내 에너지는 한정적이었다. 시간 관리가 성공의 첫걸음일지 모르겠지만, 매 시간마다 뭘 할지, 촘촘하게 계획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일주일에 7시간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시간)은 다시 이모티콘을 그리자는 목표 하나만 세워두었다. 지친 나에게 적당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삶의 압박에서 벗어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마음속에 "7시간"만을 외치면서.
* 코너명: 비전공자 직장인의 이모티콘 도전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마음을 꺼냈습니다. 다시 그림을 조금씩 그리다가, 이모티콘 제작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전공자 직장인이 3개의 카카오 이모티콘을 그리고 출시했다가,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다시 이모티콘 제작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 글쓴이: 선샤인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귀여운 것들을 보면 행복해하는 직장인입니다. 이제는 글을 함께 써보려고 합니다. ‘나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과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글을 씁니다. 글이 글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질 때, 나만의 동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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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희
응원합니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가시면 될 듯요.
선샤인
응원 감사합니다 ㅎㅎ 다음 연재에서 좋은 소식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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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덱덱구덱
조금은 다르지만 왜 이리 비슷한가? 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도 자잘한 계획이나 큰 목표를 갖고 있진 않지만 흥미로운 것들은 무조건 해보고 싶어하고 여러가지를 경험해보고 또 벅차하고 힘들어하고 정신없어 하곤하는데 그래도 몇 가지는 더 집중하고 또 더 하고싶은 것들에 욕심을 내고 조바심내기도 합니다. 나 말고도 이런 분들이 있다는데 동질감이 들기도 하고 많이들 이런가? 싶기도 하네요.
선샤인
제 글에 공감하셨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ㅎㅎ 살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꽤 즐겁지만, 또 너무 다양해지면 벅찬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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