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많다. 마음은 앞서지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말이다.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같은 동작의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여러 번 만들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제작 중인 이모티콘은 “텍스트 메시지”, “캐릭터”, “캐릭터가 사용하는 소품” 으로 구성되는데, 이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콕 집어낼 수 없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움직임을 상상하는데, 그저 상상으로 그칠 뿐이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생각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그리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떤 노력을 하면 나는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드문드문 생각을 했지만,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모두 다 노력하는 세상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노력하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들 전문가에게 “노하우(Know How)”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리라. “만약 내가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웠다면,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생각할 수도 없는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이모티콘을 그릴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전문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해 배웠다면,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할 수 있는 움직임을 마음껏 구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되뇌면서, 비전공자로서 그저 캐릭터의 형태를 그리고, 색칠하는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내 한계에 좌절하고 있었다. “이모티콘 그리는 데 그림 실력은 크게 상관없어요”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하지만, 그림 실력이 좋은 사람은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그만큼 깊고, 넓다고 생각한다. 나같은 비전공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모티콘 창작 작업에 아예 손을 뗀 것은 아니지만, 한 두 달 정도 작업 시간을 측정하는 루틴을 쉬었다. 바쁜 일들이 지나가면, 마음을 다잡고 다시 그려야지 생각하면서, 그림 외에 내 삶을 돌보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을 만났다. 가을에는 여러 행사들도 많았다. 최근에는 연차를 쓰고, 엄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생일상을 차렸다. 미역국과 갈비찜과 잡채를 만들었다. 손가락 힘이 없는 나를 위해 아빠가 갈비찜에 넣을 야채들을 둥글려서 썰고, 갈비찜에 넣을 무거운 육수 냄비를 들어 체에 걸러주셨다. 미역국에 들어갈 전복도 껍질에서 깔끔히 분리하고, 잡채에 들어가는 당근도 아빠가 모두 채 썰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요리를 다 같이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갈비찜과 잡채를 반찬통에 담아 엄마, 아빠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내가 오는 것을 퍽 좋아하시는데, 거의 매일 할머니를 보러 오는 아빠보다 나를 더 반기신다. 아빠는 네가 오면 할머니가 목소리부터, 눈빛부터 다르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나는 우리 가족들 중에서 둘만 유일하게 그림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할머니께 내가 그린 이모티콘들을 보여주고, 공저하여 출판한 책을 선물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린 이모티콘을 유심히 살펴보고, 이쁘다며 칭찬일색이셨다. 책도 잘 읽겠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내 차례가 끝나니, 주거니 받거니, 이제 내가 할머니의 작품들을 볼 차례다.
할머니는 내가 왔을 때부터 자랑할 거리를 생각한 냥, 아이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서랍에서 스케치북과 공책들을 잔뜩 꺼내서 보여주셨다. 여전히 눈이 밝은 할머니는 돋보기도 안 끼고 그림을 그리시고, 공책에다가 생각나는 한자나 글을 쓰신다. 예전에 할머니께 컬러링 북을 사드린 적이 있는데, 색칠뿐만 아니라, 컬러링 북에 나온 그림들도 스케치북에 옮겨서 그리셨다. 할머니는 그냥 심심해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신다고 했다. 할머니의 낙은 그림을 그리고, 할머니처럼 그림을 좋아하는 손녀딸이 오면 이 그림들을 보여주는 것이겠구나,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는 어릴 때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어디에다가 내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혼자 계속 그림을 그린다. 아마 이 글이 올라가는 오늘도 색연필을 펼쳐서 그림을 그리실 것이다. 할머니는 꽃 그림을 보여주면서, 꽃을 그리고 또 색칠을 하면 보기에 예쁘고 기분이 좋다고 하신 게 생각난다. 나는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미술관에서 유명 작가의 그림을 본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을 받았다. 세상 모두가 극찬하는 마스터피스를 눈으로 보며,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붓터치, 그림에 담긴 풍경의 생경함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반면, 할머니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할머니의 절박한 마음과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성이 느껴져서 뭉클해졌다.
우리 할머니는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고 하지만, 재능을 꽃피운다는 게 무엇일까?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재능을 꽃피운다는 것은 재능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그림은 나와 가족들이라는 작은 세계에 연결되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늘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다. 나는 할머니의 그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졌다. 90대 할머니의 그림을 통해 누군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면, 나름대로 할머니의 재능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다홍빛 꽃들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생각한다. 그림에 있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 또 좋은 기회로 이모티콘이라는 형태로 특정 플랫폼에서 판매될 수 있음에, 그렇게 내 그림과 세상이 연결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요즘, 주말에 그림이 잘 안 그려지면, 일단 밖으로 나간다. 걸어서 채광이 잘 드는 동네 카페에 가서 달달한 크림 라떼를 시킨다. 어느 날은 세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기와 아기의 엄마 아빠가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아기는 내 백팩에 달린 알록달록한 키링과 반짝거리는 스팽글을 오랫동안 유심히 쳐다본다. 나를 쳐다보면서 무해한 미소를 짓는다. 아기의 아빠가 “언니 가방이야. 갖고 싶어?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돼”, 아기는 웃으면서 엄마를 쳐다보며 “빵”이라고 옹알거린다. 제눈에 예쁜 가방이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기의 투명한 미소를 보며 왠지 할머니가 떠올랐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런 순간들을 만나며, 웃음을 짓고 있다.
*코너명: 비전공자 직장인의 이모티콘 도전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마음을 꺼냈습니다. 다시 그림을 조금씩 그리다가, 이모티콘 제작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전공자 직장인이 3개의 카카오 이모티콘을 그리고 출시했다가,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다시 이모티콘 제작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 글쓴이: 선샤인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귀여운 것들을 보면 행복해하는 직장인입니다. 이제는 글을 함께 써보려고 합니다. ‘나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과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글을 씁니다. 글이 글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질 때, 나만의 동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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