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해변을 한 바퀴 빙 둘러 둘레길인 올레길이 있다면 내륙에는 제주 오름이 있다. 올레길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주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는 오름이라는 말을 듣거나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제주에는 오름이 320 여 개나 있고, 산지인 우리나라 지형 특성 상 육지에는 동네마다 야산이 있는 것처럼, 제주에는 동네마다 몇 개의 오름이 있어 도로 표지판이나 이정표 역할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름은 제주 기생 화산을 부르는 순 우리말이다. 한라산 화산이 분출한 후, 마그마가 약한 지반을 뚫고 나와 중심 화산의 주변부에 생성된 작은 화산들이다.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제주 전역에 옹기종기 분포해 있어, 제주 어디를 가든 오름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오름은 한 바퀴 도는데 30분~1시간 정도 소요 된다. 해발 200~300 미터 규모가 많고, 비고로 따지면 100미터 미만인 경우도 많다. 거창한 준비없이 가볍게 산책 겸 다녀 올 만하다.
제주에서는 오름을 ‘영혼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 생각하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오름 탐방로를 걷다보면 제를 지내는 장소나 무덤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설문대 할망과 같은 제주 탄생 설화가 함께 하는 오름도 있고, 민담이나 전설을 담은 오름도 있다. 또 오름은 전쟁이나 민중 봉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해서, 제주의 가슴 아픈 근대사와 관련된 오름들도 있다.
내가 오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사진이다. 2000년대 초반, 광화문에서 김영갑이라는 작가의 사진전이 열렸다. 제주와 바람을 찍는다는 작가는 루게릭이라는 희귀병을 투병 중이라 했고, 이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을 사진전으로 불러 모았다. 나도 바람을 담았다는 사진이 궁금해 사진전을 찾았고, 그곳에서 특별하게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만났다. 제주의 야트막한 언덕들을 잡아낸 사진들에 매료 되었다. 정지된 화면 안에 바람의 움직임을 담은 특별한 작품이었다. 사진만 봐도 제주의 바람에 풀들이 이리 눕고 저리 눕는 언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바람이 손 끝에 느껴지는 듯 했다. 사진 옆에 적힌 설명에는, 그가 주로 찍은 언덕이 ‘용눈이 오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오름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작년 제주 방문에서 김영갑 갤러리를 찾게 되면서 였다. 20년 전 사진전의 기억이 강렬해서 김영갑 갤러리가 제주에 있다는 것이 반가웠고 드라이브 삼아 방문 했다. 전시된 사진 중 다수가 역시 용눈이 오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용눈이 오름은 김영갑 갤러리에서 꽤 가까운 곳에 위치 하고 있었다.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네 싶었다. 김영갑 작가가 그렇게 사랑했던 곳이 어떤 장소일지 살짝 궁금했다. 그가 매일 같이 오르고 사진을 찍었던 그 장소에 나도 서볼까 싶었다. 그러고보니 20년 전 사진을 보며 상상했던 그 바람을 실제로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래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나 맛집을 가기에도 일정이 빠듯했고 시간이 남는다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남은 휴가를 보내고 싶었다. 오름은 지척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직 저 먼 곳에 있었다. 그렇게 갈까 말까 망설이며 차일피일 하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에야 겨우 용눈이 오름을 찾았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갈 기회가 있겠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한 번 다녀오자하는 생각 이었다.
작년은 여름이 무척 길었고 제주는 특히나 더운 여름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볕이 여름처럼 따가운 날이었다. 일행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 마지막 날을 즐기기로 했고, 나는 혼자 다녀올 곳이 있다며 간편한 차림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 오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에 서니 당황스러웠다. 입구가 나무 울타리로 닫혀 있었다. ‘2년 4개월의 휴식년제가 최근 끝났다더니 아직 안 끝난 건가’ ‘역시 바다나 갈 걸 오름에는 괜히 왔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까웠다. 나무 울타리를 아래로 들어가볼까 싶어 울타리를 손으로 짚고 다가섰다. 그리고 울타리 사이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할 정도의 작은 길을 발견 했다. ‘아, 이게 울타리가 아니라 동물을 막기 위한 입구 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좁은 통로로 얼른 들어섰다. 그 때는 몰랐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로 빠지듯 오름의 세상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나무 울타리를 지나니 경사로에 막혀 앞쪽으로 풍경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이 한참 계속 되었다. 더운 여름 내내 탐방로 양쪽으로 무릎을 지나 가슴 높이까지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초가을 오후의 뙤약볕은 아직 머리를 뚫을 것처럼 따가웠고, 수풀 속에서는 여름의 마지막을 아쉬워 하는 듯한 풀벌레들의 소리가 쩌렁쩌렁해 귀가 아팠다.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두근거림과 기대가 있었던 반면, 오름이라는게 이렇게 덥고 좁은 수풀길을 걷고 끝나는 건가 하는 불안감도 약간 있었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었다. 갑작스럽게 오름 초입의 경사로가 끝나고 시야가 탁 트였다. 능선길이 시작 되었다. 양 옆으로 둥그스름한 오름 특유의 지형이 보였다. 시야가 끝날 때까지 끝없이 초록의 풀들이 가득 덮힌 부드러운 지형이 펼쳐졌다. 살면서 여태껏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산은 뾰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그릴 때 삼각형 모양이나 깔대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그린다. 오름은 각지거나 모난 곳이 없다. 높던 낮던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진다. ‘아 이곳이구나’ 어떤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두드름한 언덕 위 풀들이 제주의 강한 바람에 이리 뉘이고 저리 뉘이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 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김영갑 작가가 섰을 법한 자리에 드디어, 나도 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주 오름은 꿈을 불러내는 공간이구나.
완만한 능선을 따라 흐르듯 구비구비 이어지는 곡선은 편안하고 초록의 빛깔은 동화적이다. 나무 울타리와 저 멀리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알프스 하이디가 뛰어 나올 것 같고,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 수레를 끌며 바로 옆을 걸어 지나갈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현실을 잠시 잊고, 동화의 세상 속을 걷게 된다. 현실의 무거운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순수하지만 아무 이득도 없어 평소에는 우선 순위가 밀렸던 소망들을 불러내게 된다.
김영갑 작가는 용눈이 오름에서 제주의 바람을 담겠다는 꿈을 불러냈고, 나는 김영갑 작가가 사진을 찍은 장소를 방문하고 싶었던 꿈을 이뤘다. 어떤 사람은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으로만 가득한 사진을 얻고 기뻐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둥그스름한 초록길을 천천히 걷는 꿈을 이룰 것이다. 누구나 어린 아이처럼 무해하고 욕심없는, 소박한 꿈을 이야기 하게 되는 곳. 이것이 용눈이 오름의 특별함이다.
'오늘도 오른다'
백 개의 제주 오름을 오르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고, 현재 스코어는 30/100 입니다. 제주 오름을 왜 오르게 되었는지, 제주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름을 오르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고, 어떤 생각과 감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공유 하겠습니다.
서하도
처음 방문한 제주도 동쪽 끝에서 '하도리'라는 자신의 필명과 동일한 동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곳에 정착할 꿈을 꾸게 된 초보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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