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을 가장한 도망
주관이 뚜렷하다. 이것은 나를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나도 대체로 동의하고, 주변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바라본다. 주관이 뚜렷하다 보니까, 남들의 시선이나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때로는 장점도 있지만 뚜렷한 주관으로 인해 나는 현재 고립의 상황에 처해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주관이 뚜렷한 만큼,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잦다. 모든 사람과 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이나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뿐이다. 일종의 자발적 고립 상태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나는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학교생 중 졸업생들로 구성된 모임에 나갔다. 모임의 목적은 친목도모도 있었지만, 지역에서 사회복지사의 도움이 필요한 공동체 활동을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모임이 만들어지고, 처음 일 년은 목적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를테면 커피로 지역복지를 하겠다며 도전하던 선배를 돕는다거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복지 현장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모임 구성원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게 되자, 모임은 점차 친목도모만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중대한 목적을 잃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불편했다. 친구들에게 내 고민을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좋은 게 좋은 거지."였다. 단순히 얼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내게 납득이 불가능한 이유였다. 나는 모임을 이끄는, 가장 학번이 높은 선배를 따로 찾아갔다.
모임이 초기 목적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냐 선배에게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경종을 울려야겠다며 탈퇴의 뜻을 전했다. 목적과 다른 모임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내게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네가 목적에 맞게 모임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네가 바꿔보지 않을래?". 나는 공동체 활동이 주목적이라는 말로써 나름의 주관을 뚜렷하게 행사하고 멋지게 돌아섰다. 적어도 그런 줄 알았다.
이러한 일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친목도모를 위한 계모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굴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평소에 먹지 못 할 비싼 음식을 먹는 것으로 모임이 어느 순간 바뀌었다. 나는 모임의 목적이 변했음을 느끼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탈퇴를 말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며 자신이 실수한 것인지에 대해 따로 대책회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모임의 목적이 미니멀리즘이라는 내 신념과 맞지 않게 되자, 뚜렷한 주관을 앞세워 다시금 모임을 박차고 나갔다.
네 자신을 알라.
나는 뚜렷한 주관을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다움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은 어떤 것인지를 기억했다. 이러한 행동이 모여서 '나'라는 사람을 정의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는 주관이 뚜렷한 것을 멋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신념이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사람 혹은 상황에서 단절을 택했다. 이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에, 정작 나는 자발적 고립의 상태에 놓여있다. 나는 많은 공동체를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이나 감정을 단번에 끊어 내냐고 내게 묻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다른 가치관을 굳이 맞춰가며 살 필요가 있나요?". 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내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고립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 고립이나 단절을 항상 선택하도록 하는 이유는 아닌 듯하다.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은 내 가치관이나 성향을 잘 안다는 것뿐이지, 선택지는 다양할 수 있다. 단절도 그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신념이나 가치관이 유사한 사람들과만 관계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절을 선택하지 않고, 정반대 성향의 사람과도 의견을 나누는 선택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을 통해서만 정의할 수가 있다. 뚜렷한 주관마저도 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짙은 성향 중에 하나일 테니 말이다. 서로 성향의 차이를 알고, 우리의 선택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며, 단절하지 않고 맞춰가려 노력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스스로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고, 포용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자발적인 고립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 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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