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제주의 기생 화산을 부르는 순 우리말이다. 중심 화산인 한라산이 분출한 후, 중심 화산의 주변으로 마그마가 약한 지반을 뚫고 나와 생성된 작은 화산들이다. 한라산처럼 오름에도 화구가 있다. 화산이 분출할 때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원형의 화구도 있고, 백록담처럼 화구에 물이 고여 화구호가 된 경우도 있다. 또 화구의 일부가 무너져서 말발굽 형태의 모양이 된 오름도 자주 보인다.
화구 즉, 화산체의 분화구는 제주어로 굼부리라고 한다. 처음 굼부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독특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어느날 운전을 하며 가다 도로 표지판에 ‘火口’라고 병기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아, 굼부리가 불이 나오는 구멍이라는 뜻이었나보다. 재밌네.'
제주에는 백록담, 성산일출봉, 넓은 분화구로 유명한 산굼부리,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의 화구 등 굼부리로 유명한 곳이 많다. 다만 유명한 곳 일 수록 방문객이 많다보니 화구의 훼손을 방지하고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해, 화구는 주변부에서 내려다 볼 뿐 화구에 직접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없다. 접근성이 좋고 오르기 쉬운 오름 중 화구에 실제 내려가 볼 수 있는 오름은 금오름, 아부 오름, 따라비 오름 정도가 있다.
금오름은 제주 서쪽 돌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대정읍에 위치해 있다. 산 정상에는 백록담처럼 화구호가 있지만 규모가 작아 위험하지 않다. 비가 내린 후에는 물이 찰랑 하게 고이는 정도다. 화구 주변을 따라 빙 두른 탐방로를 한 바퀴 돌면 제주 서쪽 해안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고 멀리 바다가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경치다. 특히 노을이 아름다워서 해질녘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따라비 오름은 화구의 일부가 무너진 말발굽형 굼부리인데, 중앙에 말발굽 형태로 터진 3개의 굼부리가 있고 주변을 여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가을에는 오름을 뒤덮은 억새가 황금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너머로 한라산이 보이는 장관이 펼쳐지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는 주변에 유채가 뒤덮인다. 누군가 용눈이 오름을 두고 ‘세상의 모든 곡선을 거느린 듯' 하다 했다는데, 따라비 오름 또한 이에 못지 않다. 용눈이 오름이 아담하고 고운 곡선이라면, 따라비 오름은 크고 기운찬 곡선의 향연이다.
서쪽에 금오름이 있다면 동쪽에는 아부 오름이 있다. 아부 오름은 몇 십 개의 계단만 오르면 정상에 도달하는 가장 오르기 편한 오름 중 하나다.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정상에서의 경치는 아주 빼어나서, 제주 동쪽의 오름군과 동쪽 해안선을 쭉 내려다 볼 수 있고 바다 반대편으로는 한라산이 듬직하게 자리잡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화구 주변부를 따라 탐방로가 잘 꾸며져 있어 30분 내외의 산책 코스로 아주 좋다.
아부 오름 또한 화구에 내려가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름이다. 다만 오름 안내 표지판이 화구 주변 탐방로 위주로 되어 있고, 화구에 내려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화구로 내려가는 길이 정돈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화구까지 내려가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나도 아부 오름을 서 너 번 방문 했지만 화구에 내려가 볼 생각은 못 했다. 탐방로에서 나무가 빽빽해서 전체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화구를 내려다 보며 ‘와 무척 크다' 감탄 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오름이 화구 진입을 통제 하기 때문에 여기도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화구에 내려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거문 오름을 다녀온 다음 이었을 것이다. 거문 오름도 화구 중심부는 내려갈 수 없지만, 정상에서 화구 방향으로 경사로를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화구를 일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아부 오름의 화구에도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딘가 진입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 아부 오름의 화구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 위해 화구 주변의 탐방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긴가, 저긴가. 걷는 내내 탐방로에서 화구 쪽으로 내려가는 경사로가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거의 한 바퀴를 다 돌 무렵, 우거진 풀 사이로 좁다랗게 사면을 따라 내려가는 오솔길이 보였다.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길이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분명 있었지만 길이라 하기엔 나무와 풀이 너무 우거져 있었다. 야생 동물이나 특히 뱀이 나올까봐 좀 걱정이 됐다. 괜히 혼자 나섰다가 뱀이라도 물리면 낭패인데. 그래도 그냥 돌아서기엔 호기심이 너무 컸다. 화구란 어떤 곳일지 너무 궁금했다.
천천히 가면 더 무서우니까 무성한 풀을 팔로 휙휙 쳐내며 빠르게 발을 옮겼다. 화구를 향해 직선으로 바로 내려가지 않고 빙 둘러가며 내려가는 길이라 꽤 거리가 되었다. 머리 속에 자꾸 떠오르는 다양한 불안 요소들을 우거진 풀과 나뭇가지처럼 툭툭 쳐내며 발 밑에만 신경을 집중 했다. 톡톡톡 경쾌한 소리를 내며 뛰듯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나름의 리듬이 생겨 불안한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렇게 십 여 분 내려가니 우거진 나무가 듬성해지며 멀리 나무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는 공터가 언뜻 보였다.
와, 그런데 마지막이 최고 난이도였다. 그래도 사면을 내려올 때는 나무가 많은 숲이었고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몇 십 미터는 글자 그대로 정글이었다. 덩굴과 풀이 뒤엉켜 땅이 보이지 않았다. 발 밑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몇 미터만 더 가면 화구인데. 그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을 내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멀리 보이는 화구를 구경 했다. 내 앞으로는 여전히 빽빽한 나무들이 있었고, 멀리 나무의 벽이 끝나는 지점에 나무 틈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것처럼 쏟아지는 작은 들판이 살짝 보였다. 아쉬운 대로 핸드폰을 꺼내 줌으로 확대 시켜서 구경을 하며 촬영을 했다.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뭐라고 표현 하는게 좋을까. 그 곳을 보기 전까지 내가 봤던 자연은 ‘이 시대의 자연, 사람과 함께 하는 자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부 오름의 화구에는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간 간직되어온,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있었다. 사람이 보전하려고 애쓴 자연이 아니라,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그저 그렇게 존재하게 된 진짜 자연이었다. 순수라는 개념에 실체를 부여한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그 곳의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성큼성큼 화구 중심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 화구 가장자리에 도달 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은 어느 새 사라졌다. 이 곳에 나를 해칠 위험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옮겨 화구의 중심에 섰을 때, 나를 둘러싼 모든 공간에 인공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풀, 꽃. 벌레들, 새들, 그리고 화구를 삥 둘러 빽빽하게 호위하듯 자라있는 나무들, 그 위를 둥그렇게 덮은 하늘. 그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 세상 같지 않았다. 아마도 천국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름이 타임캡슐처럼 이 장소를 오랫동안 품고 간직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호흡을 하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고 어떤 욕망도 어떤 의지도 없이 오로지 존재로만 가득 찬 공간이었다. 눈을 감고 화구 안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꼈다. 나도 잠시 '그저 존재'했다. 그렇게 오름의 비밀에 동참 했다.
'오늘도 오른다'
백 개의 제주 오름을 오르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고, 현재 스코어는 30/100 입니다. 제주 오름을 왜 오르게 되었는지, 제주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름을 오르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고, 어떤 생각과 감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공유 하겠습니다.
서하도
처음 방문한 제주도 동쪽 끝에서 '하도리'라는 자신의 필명과 동일한 동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곳에 정착할 꿈을 꾸게 된 초보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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