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를 쫓아 떠난 삶에대해_서브컬처오디세이_정희권

에버퀘스트와 롤플레잉 게임

2022.02.20 | 조회 1.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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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하프엘프 아네모네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거목들로 감춰진 페이둬 대륙의 서쪽 숲에서 살았다. 

수령을 알 수 없는 거목 위에 지어진 집들은 구름다리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말수 없는 경비병들이 위험이 곳곳에 도사린 숲의 어둠과 그들 마을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우드 엘프 어머니와 인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외롭지 않았고, 우드 엘프들의 도시 켈러씬과 그 외롭고 어두운 숲이 주는 안락함을 사랑했다. 타인에게는 음험하고 위험한 숲의 어둠은 그들을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그가 믿는 생명의 번성과 조화를 꿈꾸는 자연의 신 투나리와  높은 나무 위에 지어진 작은 집들로 이어진 도시 캘러씬을  어두운 솦속으로부터 구분하는 모닥불들을 사랑했다. 

  생존을 위해 사냥하고 가끔 켈러씬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맞서며 그는 점점 강해졌다. 그는 숲의 어둠이 두렵지 않았고 그의 적들이 느끼는 숲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네모네도 때론 그 숲의 그림자 속에서 그 어둠이 품고 있는 위험의 일부가 되었다.  

 그가 세상에는 숲의 어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적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바깥의 세상이 차돌처럼 단단하고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그가 숲의 경계를 따라 여행하던 어느 날이었다.  숲의 변경을 침략하는 오크 척후병들이나 마법으로 거대화된 곤충들과 싸우고, 한때는 신령한 존재였지만 어느샌가 미쳐서 지나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는, 마법을 쓰는 검은 말을 피해 숲의 경계를 돌던 그는 백색의 돌로 지어진 아름답고 거대한 건물을 발견했다. 

 경이로움과 호기심에 사로잡혀 접근하는 그에게 칼끝을 들이댄 것은 번쩍이는 갑주를 입은 순백의 하이엘프 경비병들이었다.

"너는 누구냐? 네가 우리의 적이라면 우리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우리의 친구라면 너의 적들은 너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네모네가 이교의 신을 믿는 인간 혼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아네모네를 공격하지도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서 두려움도 친근감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들의 눈초리에는 가슴 밑바닥부터 밀려온 듯한 경멸과 적대심이 가득 차 있었다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적대감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 이 고귀한 종족들의 경멸은 자연과 생명의 조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자연과 조화의 신 투나리에 헌신하려 하는 그에게도 깊은 상처와 분노를 주었다. 

  -  훗날 아네모네는, 페이둬 대륙을 벗어나 노라스라는 이름의 이 세계를 주유하며 레인저의 가장 최고 지위인 패스파인더라는 칭호를 가진 강력한 전사로 성장한다. 고귀하기도, 음험하기도, 탐욕스럽기도 했던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쿠낙 대륙의 지배자 독룡 트라카논과 얼음대륙 벨리어스의 거대하고 강력한 아이스 자이언트들, 그리고 마침내는 동료들과 함께 신들의 영역을 침공하여 악신 이노룩을 쓰러뜨렸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고귀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음험한 책략의 일부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전리품 앞에서 탐욕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는 그런 일에 익숙해졌고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시간이 더욱 지나 이 세계의 강적 대부분을 쓰러뜨린 후 깊은 권태에 빠진 아네모네는 홀로 여행을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낚시질로 시간을 보내고, 잊힌 대륙 오두스에서  멸망해 가는 고양이 종족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며  목적 없이 떠돌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고향 대륙을 다시 찾아 하얀 얼굴의 고귀한 하이엘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가진 것을 뺐아 자유항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려주었다. 아마도 그건 권태와 그 결과로 나타난 변덕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하이엘프들에 대한 바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아네모네가 충분히 성장하기 전, 이제 막 유년을 벗어난 그는  홀로 고향  페이둬 대륙을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동쪽 항구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를 탄 그는 오랜 항해 끝에 안토니카 대륙에 도착했다. 이제 막 초보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레인저로서 그는 미지의 대륙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위험과 보화가 가득한 안토니카 대륙을 여행하던 그는 카라나  평원 한가운데 서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기괴하게도, 마치 열병식을 하듯 피라미드 앞에는 해골 병사들이 줄을지어 서 있었다.

 호기심으로 접근하던 그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언데드 병사들의 무리였다. 소리를 지르며 그를 잡으려 달려드는 언데드들로부터 도망치며 그는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제 카라나 평원에 막 도착한 초보 레인저였을 뿐이었고 그들과 맞서기에는 아직 미약했다. 이 사람 없는 곳에서 그를 도와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그는 여기서 쓰러기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한 전사가 칼을 휘둘러 언데드 병사들을 물리쳐준 것은. 소리 지르며 언데드 병사들을 모두 해골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린 인간전사는 다시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남성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내 말에 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에버퀘스트 패키지 이미지
에버퀘스트 패키지 이미지

 2000년 초, 당시 내가 열심히 플레이하던 에버퀘스트라는 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은 유저가 조종하는 캐릭터와 게임의 일부인 중립 캐릭터(NPC: Non Player Chracter)의 외모상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초보 유저들은  흔히 NPC와 유저를 혼동하곤 했다. 나는 다른 플레이어가 나를 구해줬다고 착각했지만, 그 캐릭터는 사실 게임의 일부인 NPC  였던 것이다. 

  나를 구해준  NPC는 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노래를 부르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이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데 인근에 은둔자 하나에게 노래 악보를 도둑맞았다고 했다.

 나는 내 목숨을 살려준 이 NPC의 소원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인저로 성장한 캐릭터에는 추적이라는 능력이 주어지는데 나는 그 능력을 사용해서 안토니카 대륙을 여행하며 은둔자의 흔적을 찾았고, 마침내 악보를 훔친 은둔자가 살고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운둔자가 집안에 있고 그 집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그 캐릭터는  잠긴 문을 열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아마도 은둔자를 불러낼 수 있는 트리거가 있을 것이나 그 방법은 게임 내에서는 알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답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게임 내에서 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며칠 동안 게임에 접속하여 은둔자가 숨은 집 주위를 돌며 공격을 하기도, 집 주위에서 마법을 쓰기도 하면서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나는 어느 날 은둔자 집 앞에 서 있는 산만한 덩치의 바바리안 워리어 한 명을 만났다 

 그는 내게 공손하게 자신이 이제 은둔자를 처치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내가 도와달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은둔자와의 싸움을 도울뿐 아니라, 무엇보다 인근에 출몰하여 이동하는 놀 (직립 보행을 하는 늑대 얼굴의 괴물)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다. 

  그는 은둔자의 집 앞에서 채팅으로 명령어를 입력했다. '당신을 죽이러 왔소' 그러자 잠겨있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집안에 있던 은둔자가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다. 나는 합세하여 공격을 했지만, 문제가 터졌다. 

인근을 배회하던 놀이 은둔자를 도와 싸움에 합세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게 설정되어 있는 게임 내 몬스터들은 일정한 거리 안에 플레이어가 등장하면 플레이어를 공격하는데  에버퀘스트 용어로는 그것을 어그로(Aggro: Aggressive에서 온 말이다.)라고 한다. 오늘날 많이 쓰이는 힐러나, 탱킹과 함께 원래 에버퀘스트에서 나온 말이다. 싸움을 하고 있는 도중, 우리 중 누군가가 운 없게도 인근을 지나가던 놀의 어그로를  끈 것이다. 워리어와 나는 각각 은둔자와 놀을 맡아 싸우려 했지만 이제 막 초보를 벗어나려 하는 낮은 레벨의 우리들 에게는 불리한 싸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싸우는 도중 지나가던 놀 하나가 또 싸움에 가담하여 3대 2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때 워리어가 말했다. 

"제가 싸우는 동안 도망가세요" 

나는 너무 미안했다. 무엇보다 인근을 배회하는 몬스터의 존재를 경계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나? 

그러나 이대로라면 둘 다 죽을 것이라는 건 명확했다. 

" 아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워리어의 숙명이지요."

게임의 맥락에서 벗어나면 뭔가 닭살이 돋을 듯한 멘트였지만, 당시에는 미안함이 앞섰다. 

온갖 개성을 가진 캐릭터가 모여 협동하여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 판타지 알피지 게임에서는 모두가  고유의  역할이 있다. 클레릭 같은 힐러는 자신의 파티원들이 죽지 않도록 치유 마법을  정확한 타이밍에 시전 할 줄 알아야 하고, 위자드나 레인저나 몽크, 로그 같은 대미지 딜러들은 어그로를 최대한 끌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체력을 깎는 역할을, 그리고 무엇보다 워리어는 최전선에서 적과 대치하는 탱커로서 적의 어그로를 최대한 끌면서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플레이어였다. 

 정신없이 도망가는 동안 나는 세 마리의 몬스터에 끝까지 용감히 맞서 끝까지 싸우던 워리어가 끝내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나는 워리어를 부활시켜줄 클레릭을 수배해서 다시 은둔자의 집을 향했고 우리 셋은 어렵지 않게 은둔자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은둔자를 쓰러뜨리니 그의 소지품 중에서 만들다만 악보 조각이라는 아이템이 나왔다. 나는 그 아이템을 내 가방 안에 보관하고  카라나 평원의 NPC을 찾아가 건네주었다.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그는 자리에 앉아 자신이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끝까지 부르고는 나에게 바드(음악을 연주하는 캐릭터) 캐릭터를 위한 마법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사실 나와 관계없는 클래스 (게임에서 직업을 칭하는 이름)인 바드를 위한 작은 퀘스트였던 것이다. 내가 한때 그토록 열중했던 에버퀘스트라는 게임에는 이름 그대로 이런 크고 작은 퀘스트들이 수없이 많았다. 

  에버퀘스트는 약 2년 간 한국에서 서비스됐다. 에버퀘스트는 게임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게임 중 하나로 그 뒤에 나온 거의 모든 게임에  영향을 줬다. 이 게임 없이는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리니지 2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들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버퀘스트는 전통적인 TRPG 게임이 PC와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에 가장 성공적으로 이식된 예이기도 했다.  동영상 캡처가 쉽지 않던 당시의 기록들은 스크린 캡처한 정지화면들에 음악이나 내레이션을 넣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 있다. 

살아남기 힘든 에버퀘스트의 게임플레이를 유머스럽게 묘사한 영상 

그런데 이런 RPG라는 개념을 만든 에버퀘스트의 조상은 따로 있으니,  

에버퀘스트 같은 MMORPG(Massively Mui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비롯, 용과 거인, 마법과 갑옷이 등장하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게임들은 가이드북을 숙지한 게임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모여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주사위를 굴리면 진행하는 TRPG(Table top Role Playing Game) 특히 그 첫 번째 작품인 던전 앤 드래곤스(주로 DnD 라 불린다.)의 후손이다. 1982년에 만들어진 고전영화 ET를 보면 아이들이 탁상 위에 주사위를 굴리며 노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DnD를 하고 있다. 

영화 ET의 한장면, Pub에서 먹고 마시며 던전앤드래곤스를 즐기고 있다.
영화 ET의 한장면, Pub에서 먹고 마시며 던전앤드래곤스를 즐기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DnD는 주사위와 판타지 미니어처로 플레이하는 일종의 전쟁 보드게임 '체인 메일'을 만든 개리 가이객스가 워게임에서 파생하여 홀로 잠입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을 만든  데이비드 아네슨의 게임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에게 연락한 데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 둘은 1967년 미국에서 열리는 Geek(오타쿠나 덕후라고도 번역할 수 있겠다.) 들의 전시회인 Gencon(아직도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의 하비 관련 전시회 중 하나)에서 27살의 데이비드 웩슬리라는 젊은이가 출시한 새로운 개념의 게임을 발견하고 감명받는다. 웩슬리의 전쟁게임은 기존 게임과 달리 병사 외에도 은행, 대학 등의 역할을 부여하고 이들의 활동도 전쟁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거칠게 말하면 DnD의 시스템은 가이객스가 정초 한 전투 시스템에 아네슨이 고안한 던전탐험과 레벨업의 개념, 그리고 웩슬리의 서로 다른 클래스 간 역할분담 시스템이 종합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SR에서 출판한 던전 앤 드래곤스
TSR에서 출판한 던전 앤 드래곤스

아네슨과 가이객스가 만든 DnD는 1974년 TSR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어 전 세계를 휩쓸었고, 판타지를 테마로 하는 그 수많은 게임과 소설, 영화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는 DnD 이외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롤플레잉 게임이 등장했으며 스타워즈 같은  영화, 러브크래프트 같은 호러소설의 세계관을 차용한 게임들도 있다. 에버퀘스트처럼, 오히려 거꾸로 온라인 게임 IP를 활용한 TRPG가 나오기도 한다. 이웃나라 일본 같은 경우도 DnD에 영향받은 소드 월드나 크리스티아 연대기 같은 고유 RPG의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DnD와 TRPG는 한국에도 소개되어 꾸준한 팬층이 있지만 서구처럼 커다란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고, TRPG에 파생된 컴퓨터 게임들이 TRPG보다 큰 팬층을 거뒀다. 리니지(리니지를 전통적인 RPG로 보는 시각에는 반대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장르상으로 는 분명 RPG로 분류된다. 게임의 요소중  레벨업과 성장의 중요성이 극대화되고, 원래 게임의 시작이었던 스토리의 중요성은 희석이 되고 유저 간의 정치가 게임의 요소로 강조된 형태라 )나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성장은 20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RPG 게임을 한국 젊은이들의 주류문화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피시방의 성장이라는 하드웨어 플랫폼의 역할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문화를 설명하긴 힘들다. 그 원인이 뭐였을까?

  사회 현상을 한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정확히 그 시대를 게임을 탐닉하며 살았고, 나중에는 개인적인 삶의 방법으로 삼게 된 세대로서 확신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게임은 게임의 작은 세계 안에서, 덧없을 망정 매우 명쾌하고 뚜렷한 인생의 목표와 그걸 성취했을 때의 대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 주위의 친구들, 그리고 나 개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1997년의 겨울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었고 바로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맞이한 시기였다. 언제까지  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대우와 한보 같은 대기업들이 도산했고 대규모 공채는 모두 취소됐으며 신문에는 벼랑에 몰린 일가족들의 자살이 가끔 신문에 보도되던 때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던 이 시기, 1998년에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가 처음 소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울티마와 에버퀘스트 같은 외국의 알피지 게임들을 플레이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게임 폐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다.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가 졸업을 하면 취직을 해서, 정년까지 노동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며 산다는 수십 년간 존재했던 루틴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했던 것보다 훨씬 취약한 것이었고, 더 이상 예측 가능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RPG의 세계는 가난한 우리도 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었고, 과정이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취감을 주었다. 

  에버퀘스트를 플레이할 때 나는 게임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세상에는 진짜로 그런 직장이 있다). 대학교 교직원을 그만두고 여행을 갔다 온 나는, 게임의 등급을 분류하고 심의하는 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게 됐는데, 그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하루 종일 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는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최신형의 컴퓨터 두대가 놓여 있었고,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세턴, 닌텐도 등 모든 게임기기가 언어 코드별로 놓여있었고 한국에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모든 게임들은 전부 그 기관을 통과해야 했다. 나는 피시 두대 중 하나에 에버퀘스트를 비롯한 MMORPG류를 인스톨해서 플레이했고, 다른 하나에는 주로 CD로 돌아가는 스탠드얼론 게임들을 플레이했다. 출근을 하면 게임을 하고 그것에  대한 리포트를 썼고, 그날 일이 끝나면 내가 하고 싶은 게임을 했다.  퇴근을 하면 저녁이 되면 집 앞에 있는 피시방에 가거나 역시 게임으로 만난 길드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만나기도 했다. 

 이곳에 입사하기 전 먹고사는 것 이외의 열정은 음악에 있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밴드 활동을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신천역 인근의 지하 연습실에서 모여 연습을 하고 주말에는 홍대 앞의 레코드포럼에 가서 앨범을 사고 라이브 카페에 갔다. 한두 달에 한번 상수동의 재즈카페에서 연주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 난 더 이상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었고, 딱히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을 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혼자라는 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연애를 할 때도 있었지만 길지 않았다. 게임만큼 재미있지가 않았다. 게임이라는 일종의 매직 서클 안에 있으면, 실제 삶의 가치나 의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에버퀘스트는 약 2년 정도 운영되다가 서비스를 종료했다. 에버퀘스트가 한국 서비스를 종료하던 날 내가 플레이한 시간을 보니 300일이라 나와 있었다. 나는 24시간 X300일 즉 7200시간을 에버퀘스트의 세계 안에서 보낸 것이다. 한국 서버가 종료될 때쯤 나는 내 인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아네모네는 내 얼굴이 네모난 편이기 때문에 지은 별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음성채팅이 불가능했는 데다가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남자들이 많은덕에  나는 매우 쾌적한 게임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굳이 달려와서 초보 워리어와 레인저를 도와준 클레릭처럼.   

- 윗글에 있는 하이엘프 경비병의 대사는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작고 용감한 생쥐 리치피프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실제로 하이엘프 경비병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이제와 확인할 방법도 없다. 

-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Magic Circle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Edward Castronova라는 미디어 학자로, 그는 그의 저서 Synthetic World에서  게임이  플레이되는 순간을 세계의 실제나 규범이 유보되는 공간으로 묘사했다. 

 

*매달 10일, 20일 '서브컬처 오디세이'

글쓴이 - 정희권

2000년경부터 게임, 장르문학, 만화등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렉시오, 스파이시 등의 보드게임을 기획, 제작했고, 현재는 만화 등 다른 IP 가 갖고 있는 재미를 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일 하이델베어 게임즈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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