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컨택트>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의 인생의 이야기다.’라는 유장한 나레이션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난뒤 조직문화 탐사자로서 필자는 ‘이것은 너의 조직의 이야기다.’라고 이 나레이션이 다시 읽혔다.
제로썸 게임(ZeroSum game)에서 논 제로썸 게임(Non-ZeroSum game)으로 시각을 바꿀 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스와 그녀의 딸 한나와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논 제로썸 게임'이란 단어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다. 주인공 루이스의 삶에서도, 영화 속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제로썸 게임의 판에서는 분열과 대립이 불가피하지만 논 제로썸 게임으로 시선을 바꿀 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음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학부시절 경제학원론 시간에 ‘제로썸 게임(ZeroSum game)'에 대해 처음으로 접했을 때, 우리 삶의 장면이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군가 더 이득을 얻으면 누군가가 손해를 보는 상황은 경쟁이 기본 원칙으로 깔려있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한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군가 합격하면 다른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 기회를 잡으면 다른 누군가는 기회를 잃는다. 마치 운동장에서 즐겨하던 ‘땅 따먹기’처럼 누군가 땅을 더 차지하면 누군가는 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숙명에 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윈윈(WinWin)’이었다. ‘우리 팀도 좋고, 너희 팀도 좋고. 우리 회사도 좋고, 너희 회사도 좋고.’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선배는 없었지만 대략 이런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재밌었던 건 그런 ‘윈윈’을 경험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힘주어 강조해야 했던 이유가 현실에서 쉽지 않아서였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윈윈’, 좀 더 고상하게 학문적으로 ‘논 제로썸 게임(Non-ZeroSum game)이 조직 내에서 쉽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함께 나눌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있다는 기본 가정하에서, 성과 촉진을 위한 도구로 ‘경쟁’을 택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보게 된다. 영업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조직의 영역에서 단위조직과 타 단위조직, 구성원 개인과 개인 간의 성과를 ‘비교’하여 ‘평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터에서 접하게 되는 KPI 설정이나 MBO 기반 성과평가 방식은 기본적으로 ‘경쟁’의 토대 위에 구축된 경우가 많다. 이는 ‘나로부터(Me-first) 사고방식’과 연결되면서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데, 결국 구성원 개인의 입장에서 ‘나의 성과 인정’이 ‘타인의 성공’과 함께 가기 어렵게 만든다.
조직과 리더가 이런 전제와 가정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있다면 ‘논 제로썸 게임’을 하기란 요원한 일이 된다. ‘서로 협력하여 파이를 키워서 더 크게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각으로 과업을 바라보고 해결해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분열과 대립하지 않고 연대할 수 있다. ‘논 제로썸 게임’의 방식을 우리 각자의 조직으로 가져와야하는 이유다.
진정한 소통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외계인 헵타포드와 소통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알려주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걷는다‘와 같은 기본적인 어휘들을 하나씩 가르쳐주고 외계인으로부터 헵타포드어를 하나씩 배워간다. 무려 37번의 세션을 거치고나서야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작년말부터 조직행동학자, 경영연구 리서처, 컨설턴트와 함께 일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필자는 꽤 큰 기대를 마음에 품었다. 이십 년 가까이 인사, 교육, 조직문화 영역에서 일해오면서 풀지 못했던 질문들을 다양한 배경을 지닌 전문가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다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뿐만 아니라, 그 탐구의 과정에 대해서도 묘한 들뜬 기대감 때문에 미소를 띄우고 출근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여정이 평탄하지만은 않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기부여(Motivation)'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 나눌 때에도 서로의 이해와 개념정의가 너무도 달랐고 이 때문에 토의를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일이 점점 힘겹게 느껴졌다. 무엇이 문제일까 살펴보니, 각자의 학습과 직무 여정이 달라서 서로가 지닌 배경지식과 용어개념부터 꽤 다르다는 걸 수차례의 회의 끝에 알게 되었다.
같은 우리말로 동일한 단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의도한 바와 뜻이 다를 수 있다는 건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이 질문만 맴돌듯이 떠올랐다. 그렇게 꽤 오랜시간 좌충우돌하며 발견한 사실이 있다. 한번에 모든 것을 조율할 수 없으며, 수차례의 세션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개념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필요하다면 조작적 정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룹 리더로서 시간의 압박을 느끼며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무게에 짓눌리다보니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는데 결국 시간이 필요함을 구성원 서로가 느끼게 되었다.
이때 중요한 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소통이 되어선 안되고, 수평적이고 교류적 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도 인간 루이스와 외계인 코스텔로도 상호 교류적인 관계에서 무려 37번의 세션을 거치고 나서야, 풀고싶었던 질문 ‘너희가 지구에 온 이유가 무엇이야?(What is your purpose on Earth?)'을 던지고 그 답을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소통할 때 필요한 요소가 ‘심리적 안전감’이다. 이는 상대가 전한 문장을 ‘선의로 해석할 것인가, 악의로 해석할 것인가’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조직 안에서 리더와 구성원 간, 구성원 상호 간 대화할 때 ‘내가 안전하구나.’ 심리적으로 느껴야 비로소 상대의 말을 선의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있고 이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컨택트>를 다시 보며 우리 각자의 조직에 적용해볼 만한 영감을 포착해서 이 글에 담았다. 눈에 불을 켜고 조직문화를 탐사하다보니, SF영화를 보면서도 나름의 조직문화 차원의 메세지를 읽어내게 되는 것만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직 차원의 변화도 분명 필요하다. 그럼에도 ‘나부터’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제로썸 게임이 아닌 ‘논 제로썸 게임’으로 삶의 태도를 바꿔보고, 시간을 들여 상대를 이해하려는 소통의 노력을 기울여보자. 그러다보면 나와 동료, 내가 속한 조직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간절히 소망해보는 월요일 아침이다.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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