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게임 인생에는 큰 구멍이 있다. 첫 게임기였던 패미컴이 아빠에게 박살 나고 PC 게이머로 넘어가던 시절, 슈퍼 패미컴부터 플레이스테이션 1까지 콘솔 게임을 전혀 플레이해보지 못한 것이다. 슈퍼 패미컴이 있는 친구 집에 가면, 당시 패미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운드와 그래픽으로 어떤 게임을 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구멍의 자리는 그때 해본 여러 PC 게임들이 차지했지만, 일본 게임의 황금기이던 시절 수많은 명작 게임들을 알지도 못한 채 그 시절을 보내버린 것은 두고두고 게이머로서 아쉬움으로, 게임 개발자로서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슈퍼 패미컴을 가졌던 그 친구는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알고 지내며 심지어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인생 게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단 한 게임을 꼽았다. 자신의 인생 게임인 그 게임을 안 해봤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무조건 해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마침 코로나로 격리 중인 참에 오랜 세월의 먼지가 쌓인 그 게임을 실행했다. 째깍째깍 소리와 함께 시계추가 흔들리고, 약간 촌스러우면서 고전적인 느낌이 확 나는 타이틀이 나타났다. <크로노 트리거>. 95년 출시된 스퀘어 사의 이 고전 RPG 게임은, 분명 내가 살아오며 숱하게 들어왔던 이름이었다.
처음은 왜 이게 친구의 인생게임인지 반신반의하며 플레이했다. 픽셀이 다 보이는 너무 작은 해상도에, 글자도 욱여넣어서 잘리고, 게임방식이나 UI, 세계관 모두 너무 오래된 느낌이라 내가 과연 이걸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곧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서서히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시스템에 어느 정도 적응되고, 우둘투둘한 픽셀은 눈에 덜 밟히고, 고전 미디 음악도 정겹게 들릴 때쯤 문뜩 깨달았다. 그때 친구 집에서 봤던 그 게임이다. 3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흐릿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게임의 이야기는 주인공 일행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게이트'이라는 일종의 웜홀 같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며 시작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중세 판타지 세계관인 줄 알았지만, 갑자기 멸망한 미래 세계로도 넘어가고, 다시 공룡과 인간이 공존하는 원시 시대로까지 돌아간다. 주인공 일행은 ‘게이트’를 통해 여러 시대를 오가며, 미래의 인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멸망한 것을 알게 되고, 여러 동료들과 함께 미래에 닥칠 그 사건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치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과거가 달라지면 인과율에 따라 미래도 달라진다'는 전제 하에 같은 공간에서 현재, 과거, 미래의 여러 사건이 겹쳐지고 얽혀, 서로 영향을 주며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스포일러 양해를 구하고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한 오두막이 사는 사람들. 그들이 어릴 적만 해도 그곳은 숲이었다고 한다. 대대로 내려오는, 사실 주인공 일행이 그 이전 시대의 마법 세계에서 슬쩍해온, 신비한 묘목을 심으면 녹색의 대지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주 오랫동안 일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한다. 이때, 주인공 일행 중 로봇이 자원해서 남아 숲을 가꾸겠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수백 년 후의 미래로 이동하면, 사막이 있던 곳은 숲으로 변해있다. 그리고 오두막이 있던 곳에는 400년 동안 숲을 일군 로봇을 기리는 신전이 있고, 그 안에는 녹슨 로봇이 잠자고 있다. 잠에서 깬 로봇은 그동안 뭔가 깨달은 듯 말한다. 어쩌면 '과거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이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대사였지만, 이 게임의 주제와 맞닿아있다고 생각됐다.
약 일주일 동안 게임이 수시로 다운되고, 세이브를 잘못해서 다시 진행하기도 하고, 진행이 막혀서 옛날처럼 공략집을 보기도 했지만 결국 게임을 끝마쳤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나오는 잔잔한 음악 속에서 짙은 여운을 느끼며, 내가 30여 년 전 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때 패미컴이 박살 나지 않았다면, PC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콘솔 게임을 했다면, 이 게임을 했다면 내 삶이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게임 개발자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게임을 선호하는 게임 개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생게임은 바뀌었을 것이고, 게임 개발자로서 살아가며 고전 명작 게임을 안 해봤다는 부끄러움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게임 인생의 큰 구멍이라는 아쉬움이 어떤 '게이트'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 '게이트'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주인공처럼, 30여 년 전 슈퍼 패미컴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부럽게 지켜보던 꼬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게임을 해봄으로써 어린 시절의 아쉬움을, 개발자로서의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구멍을 메꿔 넣을 수 있었다. 이 게임 자체가 나에게는 과거를 바꿀 수 있게 해주는 '게이트'였다. 앞으로 30여 년 후의 미래를 미리 가볼 수 있다면, 구멍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가 자라 있을 것 같다.
*매달 11일 ‘게임과 삶의 연대기’
글쓴이 - 김종화
독립 게임 개발사 대표와 게임 회사 직원을 오가며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부유한 자연인으로 살며, 삶을 담아내는 게임을 만들어가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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