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팟캐스트를 즐겨 들었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은 하나 둘 자기 나라로 떠나거나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고, 혼자 남을 때마다 이야기 궁핍증 같은 게 생겼다. 친구들과 만나도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 원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가 꼭 가까운 친구 같았다. 나중에는 팟캐스트를 너무 좋아해서 이상형이 ‘팟캐스트 진행자스러운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내가 유일하게 즐겨 듣던 영어 팟캐스트가 있었는데 탱고 음악이나 악단, 댄서들을 소개하고 인터뷰하는 <Tango Angeles>였다. 나는 탱고를 해외에서 처음 시작한 거라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10살 무렵 미국으로 이주한 로날드라는 사람이 진행하는 이 팟캐스트는 집에 가만히 틀어놓으면 탱고 음악도 잔잔하게 들을 수 있고, 진행자의 낮고 느린 목소리는 백색소음처럼 편안했다. 로날드는 팟캐스트에서 종종 댄서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어느날 내 귀를 사로잡은 건 2016년 탱고 챔피언 ‘멜리사 사치’와 ‘크리스티안 팔로모’(이하 크리스티안과 멜리사)의 인터뷰였다. 그간 업로드된 목록을 보다가 탱고 챔피언이라는 단어가 시선을 끌기도 했나보다. 그렇게 우연히 그 인터뷰를 듣기 시작했고, 그들의 파트너십이나 챔피언이 되기까지의 과정 등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을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의 힘일까. 실컷 이야기를 듣고 찾아본 영상에서 나는 그들의 춤에 매료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파트너십을 갖게 된 운명 같은 이야기, 하루 7시간 동안 둘의 커넥션을 위해 걷기 연습만 한 이야기 같은 걸 듣고 보니 그들의 춤이 더 끈끈하고 정교해 보였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지내는 동안 운이 좋게 다니던 탱고 학원에서 이 커플을 초청해 현장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친절하고 꼼꼼한 티칭에 진심 어린 격려를 많이도 해줬다. 고마운 마음에 채식을 하는 멜리사를 위해 이태원의 맛있는 채식당에 가서 밥도 먹고, 코로나 기간에는 한동안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기도 하면서 인연을 이어갔다. 한국 방문 당시 공연 포스터 뒤에 사인도 받고, 사진도 남길 정도로 내 탱고 인생 첫 아이돌 스타였지만, 이제는 어느새 친근한 선생님이자 친구가 되었다.
얼마 전, 크리스티안과 멜리사에게 연락이 왔다. 협회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한국에 오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이 둘에게는 ‘막시모’라는 귀여운 아들도 생겼다. 이제 막시모가 3살이 되었으니 슬슬 해외 투어를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모가 이제 탱고 동작 중 하나인 ‘오초’도 할 줄 안다며 만나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둘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졌다. 갑자기 나는 둘에게 혹시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요즘 탱고 관련 글을 쓰고 있다며 말이다. 크리스티안은 아르헨티나 특유의 호탕함으로 시원하게 인터뷰 제안을 수락했다. 멜리사는 정해진 시간에 예쁜 금발 머리를 더 곱게 단장한 뒤 나타났다. 줌으로 만난 그들은 여전히 활기차고 진지했다.
* 둘이 파트너십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가 다시 듣고 싶어.
크리스티안: 우리가 처음 만난 건 2012년 9월 어느 토요일 밀롱가에서였어. 문디알 대회(세계 탱고 챔피언십)에 나가고 싶었던 나는 새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지. 거기에서 멜리사를 봤어. 주변에서는 내가 멜리사에게 감히 춤 신청을 못 할 거라고 했고, 나는야 직진남. 바로 멜리사에게 갔지. 밀롱가가 끝날 무렵에 나오는 마지막 *딴다(3~4곡의 탱고 곡으로 이루어진 세트)였나. 그 전 딴다였나 그랬을 거야. 나는 멜리사에게 춤 신청을 했고, 우리는 *다리엔소(탱고 음악가의 이름) 딴다를 췄어. 다리엔소 딴다가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와 멜리사의 첫 커넥션은 놀라웠어.
밀롱가가 끝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는 멜리사의 연락처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멜리사는 떠나고 없었어. 나는 같이 간 친구들에게 “와우. 나는 저 친구 너무 좋아!!”라고 말하기도 했어. 토요일 밀롱가였으니 일요일에 밀롱가 주인장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뒤적이며 멜리사를 찾았어. 밀롱가에서 이름을 듣긴 했는데 내가 제대로 못 들었었지 뭐야. 멜리사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찾아서 밀롱가 주인장에게 이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어. ‘멜리사 사치’ 오케이!
곧장 페이스북 친구 추가를 하고, 인사를 한 뒤에 (역시 직진남) 같이 연습하고 싶다고 말했어.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우리는 연습을 시작했지. 운이 좋았던 게 연습 시작부터 우리는 스테이지 탱고 연습을 같이 할 수 있었고, 단체 군무 연습도 했어.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댄서로서의 생활도 병행했지. 파트너십을 맺자마자 여러 일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우리 정말 빨리 팀으로 움직였네. 그러고 보니 벌써 11년째 파트너십을 하고 있는 거구만. 이제 좀 분리될 필요가 있을 것 같아(농담)
보배: 우와. 그럼 대체 너희는 언제부터 사귄 거야?
크리스티안: 같이 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마도 같이 일하기 시작하고 한 2년 반 정도 후부터였나봐. 리허설도 해야 하고, 밤에 공연도 있고, 오디션 연습도 해야 하고, 밀롱가도 같이 가고… 하다 보니…(헤헤)
* 탱고를 연습하다 보면 갈등이 잦은데 챔피언의 특별한 해결 방법이 있다면?
멜리사: 오우. 없어. 하하. 탱고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말하기 너무 슬프지만, 그런 방법은 10년 넘게 찾아봤지만 없어…
크리스티안: 아냐 아냐. 나는 많은 걸 바꾸려고 노력했어. (멜리사의 의아한 표정) 우리는 둘 다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정말 열정적이야. 경쟁적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초반에 다툼이 많았지. 하지만 우리는 탱고에 굉장히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자체로 너무 좋았어. 멜리사는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고, 아마 나는 좀 달랐을 거야. 그럴 때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니 자주 다투긴 했지.
한 번은 우리가 7시간 동안 걷기 연습만 한 날이었어. 우리만의 좋은 커넥션을 찾기 위한 연습이었어. 근데 나는 스테이지 탱고, 그러니까 밖으로 보여지는 무대용 탱고에 연습을 더 집중을 했던 편이었고, 멜리사는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내적인 에너지에 집중을 하는 편이었어.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원하는 부분이 달라 그때 크게 다투기도 했지. 그치만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해.
우선 나는 멜리사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아. 고의로 뭘 하는 것도 아니지. 그저 우리가 다를 뿐이야. 둘째는 내가 가끔 스스로 너무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해. 그래서 나는 내가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물론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어렵긴 했지. 하지만 멜리사는 천사 같고, 멜리사가 없으면 어떤 탱고 동작도, 탱고 음악도 다 필요 없어질 거야. 무엇보다 중요한 게 멜리사라는 걸 알고 난 뒤에는 멜리사의 이야기를 잘 듣게 되었던 것 같아. 그러면서 우리 탱고도 성장했을 거야.
멜리사: 모든 커플들이 싸우진 않을 거야. 그치만 우리의 경우는, 정말 모든 영역에서 달랐거든.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정도야. 춤에서도 그랬지. 하지만, 음악을 듣는 방식만큼은 비슷했어. 그게 우리가 같이 탱고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춤을 즐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거야.
사실 나는 크리스티안이 리딩을 할 때 팔로잉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어. 아마 리더가 혼자만 춤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더 이상 리드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춤을 출 때도 즐거워야 하지만, 우리가 춘 영상을 보면서도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크리스티안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편이고, 영상을 보다가 절망스러워져서 꺼버린 적도 많아. 내가 좀 더 까다롭다 보니 그게 우리가 자주 다퉜던 이유였을 거야.
크리스티안: 맞아, 초반에 그래서 많이 다퉜지. 근데 멜리사의 완벽주의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었어. 실수를 바로 잡는 것뿐 아니라 완벽해져야 했어. 연습하면서 멜리사한테 지루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절망) 내 춤은 지루하지 않아…. 나는 ‘쇼 탱고(show tango)’로서 남들에게 보여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뿐이고, 멜리사는 상대방과의 연결이나 내면적인 부분. 굉장히 정교하고 세부적인 것들에 집중했던 거지. 내가 블랙이라면 멜리사는 화이트였던 거야.
멜리사: 쇼 탱고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춤을 보고 즐기는 건데, 내 보기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 스스로 춤을 즐길 수 있느냐야. 그건 단순히 출 때만 말하는 건 아니야. 내가 나의 영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야. 이 두 부분에서 채워지지 못하면 스스로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하니까.
크리스티안: 맞아. 그래서인지 초반에 우리 춤은 좀 덜 성숙한 강아지 같기도 했어. 조급함이 겉으로 드러났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가 많이 다투면서 우리 둘만의 맛과 향이 생긴 것 같아. 아무튼 갈등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탱고 추면서 너무 싸우지 마. 그냥 파트너 말 들어…
* 처음 대회를 나가게 된 이유와 챔피언이 되기까지 걸린 과정은?
멜리사: 2012년 말에 파트너십을 시작했고, 2016년에 탱고 챔피언이 됐으니 4년 만이겠다. 2013년에는 우리는 거의 자격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 그럼에도 나갔다가 큰코다쳤지. 예선 탈락이었으니까… 그 다음해인 2014년에는 아무래도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결국 대회에 나가지 않았어. 크리스티안은 대회에 나가는 걸 좋아했지만, 나는 사실 탱고 대회에 대해 계속 잘 모르기도 했고. 나중에는 대회에 나가는 게 우리들에게 근사한 도전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 1~2년을 매일같이 연습하고 싸우고 연습하고 싸우고를 반복하고 2015년에 다시 대회에 출전했어.
크리스티안: 난 뭐랄까. 탱고 대회에 나가서 이름을 좀 날리고 싶었어. 경쟁할 때 솟구치는 아드레날린도 너무 좋고. 이건 내 성격 같아. 이전엔 레이싱을 좋아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유튜브로 댄서들의 영상도 많이 보면서 연습했는데 역시 2014년에는 자신이 없더라고. 그때 우리는 탱고 오디션도 많이 보러 다니고, 쇼 탱고도 하러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어. 그때가 탱고 오케스트라 ‘포에버 탱고’와 일할 기회도 있었는데도 마지막에 잘 안 되었던 시기이기도 해.
멜리사: 드디어 2015년에 *살론 영역(일반적으로 춤추는 장소인 밀롱가에서의 춤을 평가한다. 보여지는 것보다 파트너 간의 하모니를 중요하게 봄)과 *스테이지 탱고(에세나리오라고도 하며, show 탱고이다. 살론에 비해 동작이 크고 화려한 편이다) 두 영역의 대회에 나갔어. 문디알(1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 대회)은 아니고, 메트로폴리탄 대회(도시 지역 대회)였는데, 여기에서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살론 1등을 한 거야. 거기에다가 두 달 뒤에 있었던 문디알 세계 대회에서 살론 2등을 해버렸어. 게다가 스테이지 탱고 영역에서도 <와타시>라는 작품으로 2등을 했고. 2013년 성적을 생각해보면 이 결과가 믿기지가 않지만, 그때 정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그리고 마침내. 2016년에 문디알 탱고 챔피언십에서 1등을 했어. 그러니까 우리는 총 3번의 문디알 탱고 챔피언십에 나갔고, 2016년에 마침내 탱고 세계 챔피언이 된 거야. 우린 정말 운이 좋았어.
크리스티안: 운이 좋았지만, ‘운’뿐만은 아니었을 거야. 우리는 아침 7시부터 회사 일정에 맞춰 탱고 연습을 했잖아. 자정에 있는 탱고 쇼까지 모두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1시 반 정도였으니까 온종일 탱고만 하던 시기였기도 했고. 그리고 다음날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오전 7시 연습을 갔으니까. 멜리사는 중간에 발레 트레이닝도 있었고, 나와는 따로 하던 일도 있어서 다른 곳에서도 춤을 췄어.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말이야. 아르헨티나에서 댄서로 살려면 돈은 못 벌어. 그래도 나라에 내는 세금이나 의료 보험 같은 것들은 최소한으로 처리가 되니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거야.
회사에서 했던 군무만 12개였으니까 정말 바쁘긴 했다. 그냥 정말 하루 종일 춤을 췄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나서 밀롱가도 갔는걸.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탱고 공연을 몇 시간씩 하기도 하고, 몸 관리를 위한 운동도 당연히 했지. 멜리사는 마르기도 하고, 체력도 부족해서 식이 조절을 공부하기도 했어. 이 생활을 이어가려면 우리의 체력과 식단을 분석해서 적용해야만 했으니까. 그 뒤로 몸에 힘이 좀 생겼던 것 같기도 해. 운동은 보통 발레 댄서이자 교수한테 수업을 들었어. 하루에 2시간 정도 정말 미친 트레이닝이었지.
멜리사: 크리스티안이 철봉에 매달리면 그 교수가 크리스티안 엉덩이에 매달려 무게를 더해준 적도 있었어. 엄청났지.
크리스티안: 진짜 힘들었지만 도움이 많이 됐어. 멜리사는 항상 새로운 트레이닝 방법을 찾아보는 거 같아.
멜리사: 정말로 추천하는 게 탱고를 위해서 탱고만 할 게 아니라 헬스장도 가고, 발레 트레이닝도 하고, 요가도 하고, 식이조절도 했으면 좋겠어. 특히 다른 종류의 운동을 하는 건 정말 추천해. 나의 경우엔 종일 탱고를 추다 보니 몸이 탱고형 몸이 된 것마냥 상대방을 완전히 안아주는 방식으로 좀 근육이나 관절들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고 느꼈거든. 그래서인지 스트레칭을 많이 하는 요가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
탱고를 추면서 한 가지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건 한동안 너무 탱고만 했다는 거야. 탱고에서 몸을 쓰는 방식은 그닥 자연스러운 모양새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할 수 있다면 반대로 몸을 쓰는 요가나 탱고와는 다른 근육을 쓰는 헬스를 하는 게 좋아. 발레도 좋고. 특히나 전문 탱고 댄서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 챔피언이 되고 난 뒤에 달라진 점이나 주변의 반응이 궁금해
크리스티안: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우리 천사 막시모가 태어난 일이고, 두 번째가 문디알 챔피언이 된 거였어. 생각해봐. 한 카테고리에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걸! 세계 1위를 한다는 건 정말 너무 놀랍고 좋았어. 사실 결승에 진출한 사람들은 모두가 챔피언이 될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우리는 무조건 1등을 해야만 했어. 전년도 문디알 2등이었으니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1등을 하거나 내려가는 거였지. 정말로 내려갈 순 없잖아.
무조건 우리가 1등할 거라고 스스로를 믿었어. 그러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 그리고 스타일링부터 대회 중 둘의 행동까지 모든 걸 사전에 맞추고 연습했어. 머릿속으로 대회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실제로 구현한 거야. 그 와중에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차를 한 대 팔기도 했어. 원래 예술하다 보면 좀 가난해지잖아.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아. 세계 챔피언으로 우리 이름이 호명됐을 때 나는 다른 세상에 들어서는 기분이었어. 멜리사도 그렇고 둘 다 계속 울기만 했던 것 같아.
멜리사: 나는 뭐랄까 무서웠어. 앞으로 다가올 상황들에 대해서 무서웠던 것 같아. 놀랍기도 하고 믿기지 않기도 했지. 예상치 못했거든. 우리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온 세상이 깜깜해진 것 같았어. 어떤 일들을 겪고 닥쳐야 할지 두려웠나 봐. 꽃, 비행기 티켓, 수많은 인터뷰와 사진, 실제로 매일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뷰에 둘러싸여 살았어. 전 세계 탱고 페스티벌에 초대도 많이 받았고.
크리스티안: 재미있는 게 옆집 사람이 이전까지 내가 인사해도 그냥 데면데면했는데, 챔피언을 한 뒤에는 나를 뉴스에서 봤다면서 반가워했어.
멜리사: 나는 춤 추는 삶을 오래도록 해왔지만 이런 결과를 상상해보진 않았거든. 일종의 보상 같았어.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좋네. 맞아, 나 그럴 만했어. 인생 한 번 사는데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일인 것 같아.
크리스티안: 나는 전문 댄서가 되기 전에 기계를 전공했고 엔진이나 자동차 이런 것들을 너무 좋아했었어. 근데 내 인생 두 번째 열정이 탱고였던 건데, 탱고를 시작하면서 하던 자동차 사업도 접었지. 탱고 때문에 하던 사업을 접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거의 2달을 나와 말을 안 하셨어. 사업이 꽤 잘되고 있었거든. 물론 나중에는 챔피언이 되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응원해주셨지만. 그때가 아마 28살 때였나 그랬는데, 당시 세계 대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막 22살 이랬으니까 난 더 늦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보배: 근데 어떻게 그렇게 탱고가 그렇게 좋아진 거야?
크리스티안: 탱고를 2006년인가부터 알긴 했는데 그땐 잘 배우진 않았어. 대학교 수업으로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땐 재미가 없었어. 그 뒤에 처음 밀롱가를 갔던 게 2012년 3월이었는데 밀롱가 미쳤더라. 정말 최고야. 그 뒤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지.
* 곧 한국에 오는데, 한국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특별한 탱고 비법을 하나 공개해보자면?
멜리사: 내가 진짜 너희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한국의 탱고 커뮤니티는 정말 세계 최고 중 하나야.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잘 추고, 좋은 감정과 아브라소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 제일 중요한 건 지금처럼 즐기는 거야. 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탱고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게 탱고 쇼든, 밀롱가든, 대회든 인생은 너무 짧잖아. 항상 즐기면서 해야 잘할 수 있어.
크리스티안: 한 가지 우려하는 건 탱고 동작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기술적인 성장만 하려는 거야. 그리고 탱고에 대한 존경보다는 탱고를 마치 친구들과 마시는 ‘커피 한 잔’ 정도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는 기술적으로 연마하는 그런 것하고는 완전히 달라. 이 문화를 이해해준다면 탱고를 더 즐길 수 있을 거야.
우리에게 탱고는 그저 모든 세상과 같아. 참, 가사도 정말 중요해. 그러니까 설명이 좀 어려운데, 탱고는 그냥 춤추는 것 그 이상이야. 가사를 분석하고 듣다 보면 너의 탱고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 기술적으로만 새로운 걸 찾기보다 문화라든지 언어라든지 다른 것들도 같이 해봐.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야.
*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크리스티안, 멜리사: 각자의 개성. 대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춤을 잘 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게 너희 둘만의 탱고를 추는 거야. 결국 개성이지. 심사위원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가 티칭을 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있지만, 느끼는 게 있어.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카피가 되고 싶어한다는 점이 안타깝기도 해. *조나단 끌라리사나 하비에르(유명 탱고 댄서들)의 카피본이 되지 말고, 둘만의 춤을 추자고.
멜리사: 대회를 밖에서 보다 보면 많은 커플들이 진지하고 열심히 추지만, 춤추고 있는 그 상황을 즐긴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고. 그래서인지 즐기면서 추는 커플을 보면 한눈에 들어와. 경쟁에 집중하기보다 각자의 개성으로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
* 이제 사랑스러운 천사 막시모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게 바뀌었을 것 같아. 막시모가 지금 몇 개월 됐지?
크리스티안: 막시모가 태어난 지 벌써 2년 6개월 정도 됐어. 막시모는 요즘 자기만의 성격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 말을 잘 안 들어. 요즘엔 우리랑 수업을 다니면서 뿌글리에세 음악에 오초 동작을 하기도 해. 막시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거야. 막시모가 없던 이전 세상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
옛날에는 연습이나 수업 마치면 집에 가서 쉬었지만 이제 막시모랑 놀아줘야 할 시간이야. 공원도 가야 하고 그러니까 무조건 힘을 좀 남겨서 퇴근해야 해. 막시모는 진짜 에너지가 넘쳐.
멜리사: 나 정말 아기 기르는 게 이렇게 힘든지 상상도 못했어. 아니 어떻게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이야.
크리스티안: 수업을 하러 전 세계를 다니다 보면 시차, 언어, 문화, 음식 모든 게 달라져서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게 쉽지는 않아. 막시모도 최근 우리랑 여행 다니면서 힘들 거야. 얼마 전 필리핀에 있을 땐 망고 주스를 먹었는데 탈이 나서 고생하기도 했거든. 망고주스에 사용한 물이 안 맞았나봐. 이런 간단한 것들도 아이를 기르다보면 꼼꼼하게 챙겨야 해. 우리도 클 때 그랬을 거야.
멜리사: 우리의 탱고도 인생도 모든 게 바뀌었지만, 동시에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 바로 지금이야. 아기를 낳은 뒤에 내 머릿속도 많이 단순해졌어. 이전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이 이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 만약에 네가 아기를 낳고 밀롱가에 춤추러 가면 어쩌면 전보다 더 즐길 수 있을지도 몰라. 중요하게 생각했던 테크닉이나 동작들이 전혀 중요해지지 않거든. 그에 대한 압박감도 사라지고 말이야.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막시모’가 태어나니 다른 영역들에서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아이를 낳고 난 뒤 내 춤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크리스티안이 그러더라.
크리스티안: 이전에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났어. 가족을 가지는 것과 탱고를 함께 하며 여행을 다니는 것. 이건 우리 인생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야. 아마 최근 아이가 생긴 바네사나 조나단 커플도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할 거야.
* 임신 기간 동안 탱고는 어떻게 했어?
멜리사: 탱고 하나도 안 했어. 사실 막시모는 우리가 2019년에 한국에 있을 때 생겼어.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 나의 경우엔, 임신 기간 동안 하이힐도 안 신고, 탱고도 전혀 안 췄어. 임신을 안 순간부터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중했어. 어디서 이야기한 적은 없는데 자연주의 출산을 계획했었거든. 집에서 산파 선생님하고 편안한 침대, 요가볼, 수중 분만용 욕조를 준비해서 의료진의 개입을 최소화한 출산이었어.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잊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이었어. 아이한테 푹 빠져있었던 시기 같아.
아이를 낳고 난 뒤도 마찬가지였어. 탱고를 멈추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꼬박 2년을 보냈어. 돌이켜보면 지난 2년이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것 같아. 아마 ‘탱고는 우리를 기다려준다.’ 이 말 들어봤을 거야. 맞아. 탱고는 우리를 기다려줘. 하지만 인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 아이를 임신해 봐야 9~10개월이고, 아이가 태어나면 곧 말하기 시작한다고. 이런 건 우리 인생에서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야. 그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없지. 나의 경우에는, 임신과 육아 기간이 오롯이 아기에게만 연결되어 있겠다고 다짐했던 시기야. 인생은 짧으니까.
다른 댄서들은 아이를 임신하고 춤을 추기도 하지만, 이건 댄서들의 선택인 것 같아. 우리는 초음파 보러 병원에 갈 때도 참 즐거웠어.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행복했나 봐. 우리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즐길 뿐이야.
* 둘에게 탱고는 어떤 의미야?
멜리사: 나에게 탱고는 내 인생이야. 탱고는 내게 많은 걸 줘서 정말 고마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장소들, 소중한 밀롱가 친구들, 세계 탱고 대회에서의 우승, 덕분에 여권이 꽉 차도록 여행했던 전세계, 게다가 탱고 베이비 ‘막시모’까지. 탱고에 굉장히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아.
크리스티안: 나도 그래. 탱고는 내 인생이고, 내 가족이고, 내 직업이지. 그러니까 탱고는 내 모든 것이야. 지난 10년 동안 채워진 모든 게 탱고와 관련된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든 게 탱고야.
TANGO IS EVERYTHING.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시간 40분이 흘렀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탱고에 대한 꿈을 키우던 내가 그 챔피언들을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생기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멜리사와 크리스티안, 그리고 막시모까지 세 사람은 곧 한국에 들어온다. 중간 오거나이저가 없기 때문에 수업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진행할 거라고 한다. 밀롱가 내 공연의 경우 가까이 볼 수 있으면서도 가격도 1만원 대~3만원 대 정도로 괜찮으니 탱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공연 보러 나와도 좋겠다.
나는 전문 댄서는 아니지만, 취미로 지난 몇 년 간 탱고를 추면서 이 커플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탱고로 가득한 주말 일정이나 탱고를 잘 추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제는 탱고 친구들로 가득한 주변까지. 거기에 탱고로 이룬 가정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이토록 하나에 매료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탱고가 가진 힘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