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구 페이스북)가 VR기업 오큘러스를 인수하고 VR과 메타버스 시장에 공격적인 투자를 한 지도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40조로 추정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누적적자에도 메타는 투자를 이어가겠다고 하는데요, 올해 애플이 비전 프로를 발표하면서 전체적인 시장 규모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입니다.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MR(혼합현실), 그리고 이를 모두 뭉뚱그려 부르는 XR(확장현실)까지, 관련 기술을 부르는 이름이 많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가 현실에서 몸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사용해 현실을 확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VR게임의 한계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그려진 것처럼 VR게임은 과연 게임의 미래가 될까요?
VR게임, 빛바랜 장밋빛 예측
VR 헤드셋의 역사는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생각보다 깁니다만, 일반 소비자를 위한 최초의 VR 헤드셋이라고 할 만한 오큘러스 리프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에 등장했습니다. 오큘러스 리프트가 출시된 다음 해인 2014년에 저는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석사과정을 시작했는데요, 학과에서 VR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덕분에 오큘러스 리프트를 사용해 게임을 개발하거나 동료들이 개발한 컨텐츠를 체험해 볼 일이 많았습니다.
학과의 적극적인 VR연구 지원은 학과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제시 쉘Jesse Schell 교수님 덕분이기도 했는데요, 제시 쉘 교수님은 VR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오큘러스의 등장 한참 이전부터 일찍이 VR게임을 연구해 오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흥행에 성공한 VR 탈출게임 <나는 당신이 죽으리라 예상합니다I Expect You To Die>시리즈를 만든 쉘 게임즈의 CEO이기도 하죠.
VR게임의 선구자이자 열렬한 지지자였던 제시 쉘 교수님은 2015년에 다음과 같은 예측을 공개적으로 내놓았습니다.
과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의 VR 시장은 어떠할까요? CNBC의 기사에 따르면, 2022년 VR 헤드셋 판매량은 9백 6십만대로, 제시 쉘 교수님의 예측인 5억대와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 5억대는 예측된 총 VR 헤드셋 판매량 중에서 모바일 VR 헤드셋 판매량 20억대를 제외한 수치입니다. 교수님의 예측은 빗나가도 너무 크게 빗나간 셈이죠.
그렇다고 해서 VR 시장이 망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쉘 게임즈의 <나는 당신이 죽으리라 예상합니다I Expect You To Die> 시리즈를 비롯해 <비트 세이버>나 <수퍼핫 VR>, 그리고 <하프라이프:알릭스> 같은, VR 경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게임은 VR 헤드셋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필수 게임이 되면서 흥행에도 성공했죠.
하지만, 본격적인 소비자 시장이 열린 지 10년, 앞서 살펴본 VR 헤드셋 판매량이 증명하듯, VR게임은 '게임의 미래'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입니다. 제시 쉘 교수님은 자신의 빗나간 예측을 회고하며 '더딘 하드웨어의 발전이 주요 원인이다' 라고 했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하드웨어가 상당 수준 발전해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나온 것 같은 현실이 가능해져도, VR게임은 주류 게임시장을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현실감'의 대가
본격적인 VR게임의 역사가 열린 지 십여 년, 이제 우리는 그동안 성공적인 VR게임에서 어떠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상현실 속의 게이머 캐릭터가 크게 이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탁구, 리듬액션, 복싱, 방탈출, 탈것을 타는 게임 등, 가장 많이 판매되는 VR게임은 가상현실 속 캐릭터의 이동 범위가 실제 세계에서 사람의 이동 범위와 일치합니다. VR게임이 대부분 집이라는 제약된 공간에서 플레이되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VR, AR, MR을 통칭하는 XR 기술은, 우리가 실제 세상에서 우리의 몸을 사용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가상세계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현실, 우리의 몸에 기반하여 현실을 확장합니다. 현실세계처럼 고개를 돌리면 시선을 바꿀 수 있고, 손을 뻗으면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걸음을 딛으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현실'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 XR 경험의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VR이 아닌 기존의 비디오게임을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비디오게임에서 우리는 먼 거리를 달리고, 높이 뛰고, 탈 것을 타고, 날 수 있습니다. 또는 디아블로나 스타크래프트처럼 1인칭 시점이 아닌 완전히 다른 시점에서 세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 같은 영상매체는 어떤가요? 영상매체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찍은 장면을 이어붙이는 컷을 사용하여 시청자가 끊임없이 다른 시점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두 인물의 간단한 대화 장면에서도 카메라가 두 인물의 어깨를 교차적으로 넘나들며 시청자가 감정과 호흡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연출은 이제 영상연출의 기본이 되었죠. 그 외에도 카메라의 시선을 이동시키는 패닝, 줌 인/줌 아웃이나 교차편집 등 영상매체의 특징을 활용한 다양한 연출 기법이 있습니다.
글을 통해 확장현실을 제공하는 소설은 더 자유롭습니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매우 추상적인 개념을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죠.
VR게임의 본질적 한계는 위와 같은 기존 매체들에 비해 시공간이 극도로 제약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제약은 기술적 한계가 아닌, 현실감을 위해 우리의 몸을 사용한다는 태생적 한계에서 옵니다. 현실의 공간이 가상현실에서도 1:1로 매핑(대응)되기 때문에, VR은 가상공간의 게이머에게 현실의 공간이라는 제약을 부여하는 셈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VR게임에서 게이머는 가상공간에서도 육신의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게이머뿐 아니라 경험을 제공하는 창작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수단을 매우 제한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VR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크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지만, 공간의 제약이 없는 가상현실에서도 캐릭터가 크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움직이지 못해도 가상현실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면 되지 않으냐는 것이죠. 실제로 VR게임 중에서는 실제 사람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비디오 게임처럼 컨트롤러의 버튼을 이용해 캐릭터의 이동을 구현한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혹은 현실에서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더라도 가상현실에서는 몇 발짝 이동하는, 마치 축지법 같은 경험을 제공한 게임도 있죠.
하지만,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비해 가상세계에서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더라도, 이것이 그다지 좋은 사용자 경험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일까요? 아마 그런 경험이 VR이 주는 현실감을 깨뜨리고 이질감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VR은 우리의 몸이라는 현실의 제약을 도입함으로써 현실감을 제공하는데, 실제와 다른 공간 대응으로 그 제약을 깨뜨리면 VR의 강점인 현실감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많은 사람이 현실과 는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가 이동하는 VR게임에서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것이 VR매체가 가진 딜레마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VR의 현실감과 충돌합니다. VR은 현실감을 위해 현실의 제약을 떠안은 셈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축지법을 쓰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이러한 능력을 마다할 사람이 많진 않겠습니다만, 조금만 사용해도 피곤해질 것 같다는 것이 학교에서 VR게임을 연구하고 경험해본 제 생각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몸과 공간이 1:1로 대응되는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죠. 아주 어릴 때 부터 VR을 접한 신인류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미래가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VR게임의 진짜 미래
VR 경험이 보잘것없다거나 VR게임 시장이 사장될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제게 VR게임은 가장 놀라웠던 경험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한동안 <비트 세이버>에서 땀이 날 때까지 춤을 추고,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멀리 떨어진 곳의 지인과 VR 탁구게임에서 열심히 탁구를 쳤던 기억이 나네요. 친구들이 <수퍼핫 VR>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자지러지게 웃기도 하고, 부모님께 오큘러스 퀘스트 2를 사용하여 세계 곳곳으로 효도관광(?)을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
VR게임과 이를 포함하는 XR은 언젠가 우리의 삶에서 분명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어떤 상황에 '들어가 봐야 하는' 현장교육이나 인지행동치료 등의 분야에서 VR은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영상으로 인해 활자가 사라지지 않았듯, VR게임이 기존 게임을 모두 대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각 매체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은 강점이 되기도 하고 약점이 됩니다. 우리 몸을 가상공간에 대응시키는 VR의 특성은 VR의 용례를 매우 제한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VR이 처음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진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들은, 제가 첫 레터에서 이야기했듯 신기술이 주는 고양감에 도취되어 나타나는 '자기애적 마비상태'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술로 인한 자기 확장이라는 도취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VR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VR게임을 통해 XR이 가진 현실의 시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제약을 살펴봤지만, 저는 현장교육과 다큐멘터리, 인지행동치료 등의 분야에서 획기적인 도움이 될 VR의 미래가 기대가 됩니다. 기존 게임 시장과는 별도로 VR이 강점을 보이는 장르의 게임도 계속해서 발전할 것입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응용도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 기술이 유용한 영역에서의 유의미한 변화는 꾸준히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VR게임의 미래입니다.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게임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미국에 온 뒤, 게임을 만들며 게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게임 개발자입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NBA2K> 시리즈와 최근 발매된 <레고 2K 드라이브>에 게임플레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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