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카페를 떠올리면 늘 백발의 노인들이 여유있게 앉아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집 앞에도 동네에서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가 있는데 아침 7시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대부분 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은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출퇴근길에 빵을 포장해가기 바쁘고 여유있게 커피 한 잔과 생크림 가득한 케익을 즐기는 건 주로 백발의 손님들이었다. 소도시만의 일은 아니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등 독일의 대도시를 가봐도 클래식한 동네 카페는 백발의 노인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만큼이나, 커피를 마시며 여유있게 종이 신문을 꺼내 읽는 할아버지들도 많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나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게 된다. 나이가 들면 저렇게 여유있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실제로 이 장면을 눈으로 본 적은 독일에 오기 전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오후 시간대에 종종 오시는 할아버지 고객들이 있었다. 점심시간 몰려들었던 직장인 고객들이 빠져나간 후엔 할아버지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백발의 손님들이 모여들면 가장 식은땀이 났던 이유는 주문을 하지 않고 앉아서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매니저님은 아르바이트생을 붙잡고 ‘또 넷이 와서 한 잔 시키지'하고 불편한 기색을 팍 드러내곤 했다. 수시로 뜨거운 물을 리필하고 빈 컵을 인원수대로 요구하며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네 명이서 나눠먹는 손님들은 예외없이 노년의 고객층이었다. 큰소리로 고래고래 이야기를 하거나, 반말로 ‘커피 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쾌함을 꾹 참으며 주문을 받았던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며 자연스레 카페에서 백발의 손님은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내가 노년층을 만날 일은 대부분 대중교통 정도였고, 주말에 붐비는 카페에서는 젊은 사람들로만 붐비곤 했다. 노령 인구가 점점 많아지는 한국에서 과연 노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두 분의 할머니의 생활 반경으로 추정해 보건데 경로당, 복지관, 놀이터 정자, 교회, 손주를 만나러 들르는 자식들의 집 정도다. 공통점은 돈을 들일 필요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한국전쟁 후 이산가족이 된 친할머니는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고 네 남매를 키우느라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내셨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꽤 오래 일을 하지 않으셨고 네 남매를 혼자 키우다시피 하신 외할머니는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셨다. 두 할머니의 공통점은 ‘외식하는 것도 돈 아까운데, 도대체 왜 커피 한 잔에 5천원을 주고 사느냐'며 카페에서 돈 주고 앉아있는 걸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점이다.
독일의 유명 카페들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의 카페 문화가 비교적 최근에 자리잡았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계와 부양으로 청춘을 다 바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갑자기 밥값만큼 비싼 커피를 즐기라고 한들 없던 마음의 여유가 갑자기 생기기도 쉽지 않을테니까. 나의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다달이 용돈을 받더라도 그 돈으로 엉뚱하게 비싼 안마기나 효능을 증명할 수 없는 보약같은 걸 사오기는 하셔도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셨다. 게다가 친한 할머니들은 모두 경로당에 모여있는데 다같이 커피 한 잔하러 갑자기 카페로 향하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을 거다.
카페 문화가 낯선 문화라는 것을 감안하고서도 할머니들이 카페를 불편해하는 건 아무래도 경제적인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할아버지 네 명이 와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눈치를 팍팍 주는 매니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더 리필해가는 것은 실제로 그만큼의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용돈을 넉넉히 받거나 연금을 넉넉하게 받는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노인 빈곤은 우리나라의 사회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경제적 자유'가 열풍처럼 유행하는 것도 여유있는 노후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라고 본다. 나의 남은 인생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때마다 활발하게 사람들과 교류하고, 일하며, 여행하는 모습은 선명하게 상상이 되곤 했지만 백발의 노인인 내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캄캄하기만 했다. 은퇴 시기가 점점 빨라지는 요즘 평균 수명은 90세를 넘어가는데 도대체 뭘 하며 노후를 보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한 문제다.
독일은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세금과 연금을 한국에 비해 훨씬 많이 내는 데다 노동권이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보장되어 있어 본인이 원한다면 65세까지 일을 할 수 있다. 연금을 내는 기간도 금액도 많다보니 노후에 연금 수령액도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공짜로 주어진 여유있는 노후가 아니라,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지급했던 연금을 나이가 들어 돌려받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곳의 직장인들은 알뜰살뜰히 돈을 저축하기보다는 실컷 여행을 다니고 젊음을 충분히 즐기는 편이다. 어차피 강제적으로 연금을 많이 내고 있고, 노후에는 낸 만큼 다시 돌려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젊은 시절 충분히 부를 축적하거나,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거나, 노후에도 여전히 소일거리를 찾아 일하는 것 외에는 여유있는 노후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나에게는 꽤나 참신한 장면들이었다. 젊었을 때는 월급의 꽤 큰 부분을 연금으로 납부하는 대신 노후 걱정 없이 열심히 젊음을 즐기고, 노후에는 연금으로 여유있게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은 즐길 수 있는 삶이라니. 심지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독일인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할머니가 되면 연금을 많이 받으니까 폭스바겐 한 대 정도 새로 뽑을 수 있어. 우리 할머니가 그랬거든.’
물론 독일도 여전히 노인 빈곤과 저연금으로 수많은 논쟁이 오고가고,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젊었을 적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한 교육빈곤층, 이민자, 여성 등 충분하지 못한 연금으로 인해 공병을 줍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다만 포브스가 발표한 한 자료에 따르면 노인 연금수령자 빈곤율이 독일은 10.2%인데 비해 한국은 43.4%에 육박하는 걸 보아 그 차이를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18년 기준)
노인 빈곤이나 연금 제도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 없던 내가 일상 속에서 어딜가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요 고객층인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노후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 돈을 열심히 모아서 재테크를 해야 노후에 편안할텐데’를 넘어선 고민을 하기 어려웠던 건 내가 목격한 노인의 삶이 대부분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도 나이가 들었을 때 커피 한 잔과 케익 하나는 여유있게 즐길 수 있는 삶에 대해 상상하다보면, 카페에서 마주치는 할아버지들을 나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 있다. 노년의 시기는 비생산적이거나 외롭거나 눈치를 봐야하는 시기가 아니라, 날씨 좋은 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걸으며 가끔 카페에서 대화도 즐기는 여유롭고 아름다운 시기일 수 있다는 걸 떠올리며.
* 글쓴이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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