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등학교에서 근무 중이에요.”라는 나의 인사말에 십중팔구는 “어머, 고등학교에서 일하시면 애들이 말을 잘 듣나요? 많이 힘드시겠어요.” 혹은 “수업하는거 힘드지 않으세요?”라는 말들이 되돌아온다. 그 누구도 이 일이 얼마나 보람 있을지, 재미있을지 묻지 않고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날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면 뒤따라왔을 나의 말을 아마도 바르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요. 고등학생들, 생각보다 착해요. 말을 얼마나 잘 듣는대요. 수업도 열심히 들어요.” - 여기서 내가 늘 씩씩하고 긍정적인 편은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고등학교의 시험 기간은 닷새인데, 바로 지난주가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선생님들은 시험 기간을 ‘미니 방학’이라 부르며 수업 없는 이 닷새를 최대한 알차게 보내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던 중 엊그제, 다른 학년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이 주신 작년 수업 자료를 봤는데, 정말 너무 좋네요.” 전화를 끊고 이상하게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학생들은 대체로 내 수업을 좋아해 줬지만, 내가 얼마나 수업에 공을 들이고 자료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지 동료 교사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바로 커피숍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나의 학습지 뭉치를 꺼내시며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셨다. 영어 본문에 한글 해석을 달지 않는 이유, 본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를 짝과 함께 찾게 하는 방법, 그날 배운 영어 단어들을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외국 사이트 등을 알려드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학습지마다 있는 어느 빈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날 새롭게 배운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거나, 자신의 느낌 혹은 생각을 적도록 만든 칸인데 아이들은 그곳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적어냈다. 예를 들어, 수업 중 지나가는 말로 출근 길에 들을 봄노래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봄노래 추천 리스트를 뽑아주기도 하고, 부모님과 아침에 다퉈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을 적어두기도 한다. 나는 그 말들을 도저히 도장 하나로는 지나칠 수가 없어 늘 답글을 달아준다. 그래서인지 “선생님. 저는 이제 글씨체만 봐도 이게 누구 학습진지 대충 다 알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며 살짝 울컥하기도 했다.
영어 교사로서의 수업 준비는 이러하다. 매년 몇 학년 영어를 맡게 될지는 새 학기 바로 직전 봄방학 중에 정해지게 되고, 학교마다 선택하는 교과서의 출판사가 다르다. 같은 출판사라 하더라도 몇 년에 한 번씩 교과서 개정을 하기에 한 번 만들어놓은 수업 자료를 재활용할 수 있는 행운은 그렇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편이다. 거의 매해, 새로운 수업 자료를 매 차시 준비한다. 햇수로 10년이 넘은 나에게도 어느새 수업의 루틴이 생겼는데, 새 단원에 들어가기 전에 해당 단원을 관통하는 Big Question을 짚고 넘어간다. 그다음에 아이들의 삶과 실제로 닿아있는 기사나 영상, 강연 등을 찾아 그들과 생각을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색연필과 도화지, 칼과 가위, 그리고 음악 등을 쥐게 하는 편이다. 그것들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수업에 참여하게 하는 도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부서 선생님들 여럿과 함께 급식을 먹는 중이었다. “은호랑이쌤은 애들 이름을 거의 다 아세요?” “이름이요? 네. 수업하는 반 아이들 이름은 거의 다 알걸요?” “너무 대단하세요. 일부러 외우시는 거에요?” “그럼요. 처음 몇 주간 열심히 외우는거죠.” 그러자 옆에 있던 선생님들도 “일부러 외우신다구요? 와…”라며 내게 말을 건 선생님의 놀람에 동참한다. 이게 놀라울 일이라는 사실에 나 역시 놀라면서도 내가 행여나 바보 같아 보이진 않을까 하는 소심한 마음으로 남은 급식을 먹어 치웠다.
대체로 똑같이 반복되는 교사의 일 년이 쌓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점점 기계처럼 수업하고, 기계처럼 학생들을 대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교사는 자신의 성장이나 발전의 측면에서 보람을 찾기란 어려운 직업이고, 그것을 캐낼 수 있는 지점이란 교사와 학생이 만나 만들어내는 역동성 그 자체뿐이다. 하지만 그 지점은 자칫 생략되기 쉽고 그런 경험이 계속되면 보람을 느끼기 어렵게 되어버리고 만다. 나 역시 그러했던 일 년이 있었을 테고, 그랬던 바로 어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날들은 그저 듣는 이 없는, 말하는 이도 진심이 아닌 그런 공허한 말들만이 교실에 울렸다가 이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독해 수업을 위주로 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현실에서 일방적이지 않은 수업을 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학생들 대다수도 50분간 입을 꽉 다물고 앉아있는 것을 훨씬 선호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난 영어 문장에 절대 한글 해석을 달지 않고, 내가 수업한 후 아이들에게 직접 해석해 보도록 반복해서 시켜보는 편이다. 이번 중간고사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모의고사 지문은 학생들의 발표 수업으로 진행해보았는데, 아이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하게 된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가 앞에 나와 독해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 자신의 독해 실력에 진짜 도움이 될까?”
뭔가 한심했다. 그동안 나름 열정을 갖고 수업에 임하긴 했지만, 내 ‘독해 발표’를 듣고만 있다고 아이들은 무엇을, 얼마나 더 배우고 잘하게 되었을까? 하는 달갑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와 동시에 23년 상반기를 ChatGPT가 휩쓸고 있던 중이었다. 시험 문제도 대신 만들어주는 와중에, 회화도 아닌 독해 혹은 작문이야말로 ChatGPT가 하면 될 일 아니던가. 연달아 몰아치는 파도에 나 역시 휘청거릴 수밖에 없어 “애들아, ChatGPT가 다 독해해주고, 영작해줄 텐데 우린 뭘 하고 있는 걸까? 너네는 선생님 수업이 도움이 되니?”라고 어느 반에서 나의 마음을 고백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몇몇에서 작은 말풍선이 피어올랐다. “네. 도움 되죠!” 또 몇 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날은 수업할 때 힘이 났다.
다음 날이 되었고, 나의 마음을 고백했던 바로 그 반에서였다. “선생님. 어제 하신 얘기 때문에 든 생각인데요. 선생님이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영어 독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거에요, 아니면 ChatGPT를 제대로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실 거에요?” 나는 당연히 영어 독해 방법을 가르칠 것이라 대답했다. 나는 아이가 ChatGPT 같은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세계 공용어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잠시 이 남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학생은 아니지만, 특유의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엉뚱하지만 깊이 있는 질문을 자주 하는, 내가 참 좋아하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대답과 동시에 무릎을 쳤다. ‘학교에 있는 한 이 아이들은 언제고 내가 필요하겠구나.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난 최선만 다하면 되는구나. ChatGPT야! 니가 아무리 뛰어나봐라. 내가 물러서나, 더 열심히 하지!’ 결코 생략해서는 안 되는 과정과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교사로서의 보람을 캐내는 역동적인 현장일 것이다.
* 글쓴이 - 은호랑이
현재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채널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회, 정치, 환경, 연예 등 다양한 지면을 아이들과 그리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읽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적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이 가장 설렙니다.
댓글 1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jerry kim
감사한 마음과 응원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아이들과 학교를 위해 수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