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이란 바쁜 일상 속에서 푹 쉬어가는 휴가라는 의미가 가장 컸다. 그래서 되도록 관광지를 피해, 인파가 몰리는 걸 피해 조용하고 잔잔하게 나만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주로 찾았다. 줄을 서서 먹을 수 있는 맛집이나 사람이 많아 조용히 감상할 수 없는 전시회는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휴가를 가는 타이밍도 바쁜 일을 모두 끝내고 스스로 쉴 자격이 충분하다고 느낄 때로 잡았다. 그런데 이번 파리행은 달랐다. 미리 사놓은 기차표의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초조해졌고 할 일은 점점 늘어났으며 마음은 무거웠다. 출발 전 설렘보다는 무려 5일이나 되는 휴가다보니 가서 해야할 일들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챙겼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기에 마냥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독일의 본(Bonn)이라는 도시는 기차로 4시간이면 파리에 갈 수 있다. 겨우 왕복 100유로 남짓의 금액으로 파리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몇 번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체류 허가가 승인된 이후 가장 먼저 했던 것이 파리행 기차를 예약하는 일이었다. 다만 파리는 마음을 놓기 어려운 도시였다. 다녀온 사람마다 소매치기를 당한 일, 노숙자에게 돈을 빼앗긴 일, 인종 차별을 당한 일, 불쾌했던 경험들을 하소연하듯 쏟아내서 유독 걱정도 많았다. 유명한 관광지는 원래도 기피하는 편인데 그래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파리가 있는데 지나치기는 아까워서 저지른 여행이었다. 물가도 너무 높아서 식사는 되도록 직접 숙소에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각종 식재료도 챙겼다. 기차에는 도둑이 많다고 해서 가방마다 자물쇠를 걸었다. 관광객이 몰려있는 수많은 관광지에서 휴식은 커녕 나도 남들과 똑같은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올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없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묘하게 독일과는 이질적인 풍경에 살랑살랑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파리 북역 앞 좁은 도로는 신호등을 누군가 보고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만큼 운전자와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가 도로 위에 엉켜있었다. 택시로 10분 거리라고 듣고 우버를 잡았지만, 차가 너무 막혀서 30분 가까이 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도로 위 양보 운전, 신호 준수는 칼같이 지키는 독일에서 지내다 이 혼잡한 파리 시내를 보니 바로 옆 나라 같은 유럽이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서 새삼 신기했다. 정돈되지 않은 도로를 달리는데 이상하게 복잡한 마음이 차분해졌다. 가는 길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지만 어지러운 것은 어지러운 대로 새로워서 계속 도시를 관찰하기 바빴다.
파리 여행은 확실히 지금까지 경험한 다른 여행과는 달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파리 가면 여긴 꼭 가야 해'라고 말하다보니 마음 편히 쉬려고 해도 마치 숙제하듯이 이 곳 저 곳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 투어를 그토록 싫어하는 나였지만 파리에서는 별 수 없었다. 물론 여행 내내 좋은 순간도 있었다. 유명한 미술관과 궁전을 부지런히 걸어다니며 틈날 때마다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내가 여행에서 행복한 순간들은 주로 걷다가 잠깐 마주한 석양, 관광지를 벗어나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 풍경, 스냅 촬영을 마치고 우연히 발견한 카페 테라스에서 기가 막힌 에스프레소를 만나서 감탄할 때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어쩐지 나만의 감동을 느끼는 순간보다는 정신없고 바쁘게 가야할 곳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고생스럽게 걸어다니던 중 문득 내가 몇 달 간 고민하고 집착하던 잡념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행여 소매치기가 다가올까 가방을 움켜쥐고, 예약한 일정에 늦을까 지도를 보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쏟아지는 인파를 따라 걸으며 남들 다 찍는 똑같은 사진을 찍는 동안 내 생각과 시야는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를 완전히 넋을 잃게 만든 풍경이나 작품을 볼 때만이 아니라 그저 여행지의 순간순간을 바쁘게 수행하다보니 미래를 고민할 여력도 지나간 말을 곱씹을 새도 없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앉고 싶어서 온 신경은 빈 벤치를 찾는데 집중했고 맛있는 커피가 나오면 그저 행복했다. 커피가 맛있기도 했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잠깐 카페에 앉는 그 시간이 몇 배의 행복으로 과장됐다.
한 때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행에 쓰는 돈과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충분히 주변에서도 내 기분을 즐겁게 할 사소한 경험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맛있는 걸 먹고 새로운 걸 봤을 때의 행복보다는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 인정욕구가 더 컸던 나로서는 푹 자고 일어나서 일상의 에너지를 찾는 게 훨씬 나에게 좋은 리프레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행복을 느끼는 방식은 ‘미래를 잘 준비하는 나'의 비중이 너무 큰 나머지 ‘현재를 생생하게 감각하는 나'가 뒤로 밀려나있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왠지 미래의 행복을 땡겨쓰는 것 같다는 이상한 불안감도 컸다. 그래서 자꾸 현재의 행복에 죄책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현재의 행복이 쌓여서 미래의 내가 된다기보다는 행복의 총량이라는 게 정해져 있어서 지금 너무 행복하면 미래에는 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서 조금씩 행복을 미뤄두면 나중에는 더 크게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이상한 습관들이 행복할수록 더욱 잡념을 만들었던 것이다.
먼 미래를 불안해하고 과거를 자책하며 현재가 막막한 사람에게는 때론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여행을 권하고 싶다. 꼭 파리처럼 유명한 관광지일 필요는 없다. 걸을 일이 별로 없었다면 많이 걷는 여행을, 한 번도 안 해봤던 액티비티를 도전해도 좋다. 평소와는 다른 방식대로 보고 듣고 경험하다보면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온 정신이 쏠려서 쓸데없는 불안을 느낄 새가 없다. 늘 갖춰진 편한 코스의 여행만 다녔다면 조금은 고생스러운 여행지를, 사람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아 늘 한적한 곳을 다녔다면 정신없이 북적거리는 여행지를 찾아봐도 좋다. 수많은 인파가 몰린 곳에서 덩달아 사진 한 장 찍는 경험의 의미는 ‘나도 남들 다 찍는 사진 한 장 남겼다'가 아니라 그 순간 별 것 아닌 무언가에 기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인파에서 빠져나와 한적한 곳을 걸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라는 생각이 쌓이다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정신없이 노트북으로 밀린 일을 처리할 힘도 생긴다. 행복하느라 못한 일들 얼른 집에 가서 해야지! 같은 에너지를 얻게 되면 그야말로 더 없이 완벽한 여행이 아닐까.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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