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집에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퇴원 후 곧바로 N고 함께 살 거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의 의미가 걱정인 걸 알았기에 나는 조심스레 웃었다. N이랑은 예전에도 같이 지낸 적이 있어서 괜찮아요. 사소한 부분도 잘 맞고, 혼자 있는 것보다 오히려 좋을 거예요.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원래 지내던 방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N과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결핵과 입원이라는 사건 때문에 갑작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본가에는 제 짐이 들어갈 자리도 없잖아요. 괜히 억지로 옮겨 놓으면 작은형이나 큰형도 불편할 거고요, 무엇보다…… 집에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본가에는 책상 둘 곳이 없잖아요.
붉은 빛이 도는 호두나무와 하얀 광택이 있는 물푸레나무를 접합한 책상은 독특한 색깔만큼이나 기성품보다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동안 살던 방에 맞도록 재료부터 크기까지 내가 직접 구상하고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었다. 한구석에 책을 가득 쌓아두고도 노트북과 독서대를 세울 공간이 남는 책상. 본가에는 그 책상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이유였다. 나는 책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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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족이 모여 살던 빌라는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컴퓨터를 두고 형들과 다투거나, 놔둔 물건이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일이 흔했다. 그곳은 마치 각자의 생활이 범람하여 허우적대는 작은 보트 같았다. 들이차는 바닷물을 퍼내는 일은 끝이 없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노를 젓고 싶어도 금세 파도에 휩쓸려 갔다.
무엇보다 집에는 책상이 없었다.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때로는 멍하니 있다가 떠오르는 감상을 적어 둘 자리가 없었다. 집에 새로운 침대나 붙박이장이 들어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책상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책상이 있던 곳은 언제나 집 밖이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역시 학교였다. 학원을 따로 다니지 않았던 나는 중학교 시절 항상 학교에 남아 공부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나중에는 경비 아저씨와 친해져 미리 교실 열쇠를 받아 돌아갈 때 반납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교는 나에게 구명정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4명이서 함께 쓰는 방에, 소등과 기상 시간을 엄격히 지켜야 했지만, 그곳에는 온전히 내 몫의 책상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주말에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날이 많았다. 중간·기말평가나 자격증 시험처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수록 더 그랬다.
학교를 졸업한 후 내 책상은 회사 기숙사가 되기도, 근처 도서관이 되기도, 자주 가던 카페가 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이나 직장인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할 때도 많았다. 남들의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공부나 사색도 그곳에서는 간섭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책상에서는 일상적 호흡이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
반면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여전했다. 늦게까지 잠을 자고, 가족들과 밥을 먹고, 평소에는 보지 않는 프로야구나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떠다니는 대로 저항 없이 주변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은 편안하기보다는 답답했다. 어쩌면 나는 높은 파도를 거슬러서라도 가고 싶은 섬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나만의 유토피아를 말이다. 책상은 그곳으로 가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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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혼자 살 방을 구할 때도 책상을 둘 장소를 가장 눈 여겨 봤다. 부동산 직원과 함께 3번째로 둘러본 방이었다. 낡은 철제문을 열자 정면의 베란다 창가에서 길고 곧은 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건물이 오래되고, 4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도시 가스 배관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반짝이는 조각이 널브러진 창가 옆자리가 좋았다. 여기 오래 앉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왕이면 내가 원하는 형태로 그곳을 채우고 싶었다. 가구를 배우던 공방에 부탁하니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평소 작은 책상이 답답했기에 상판 크기를 일부로 넓게 설계했다. 사용할 원목도 신중히 골랐다. 크기가 비슷하지만 색이 다른 나무를 접합하기로 하고 기초 가공을 했다. 크기가 상당해서 자동 대폐기계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톱밥을 퍼내는 일이 끝이 없었다.
하지만 기계를 한번 지나칠 때마다 드러나는, 파도무늬를 닮은 나뭇결을 보고 있으면 힘든 것도 잊혔다. 가로 1800mm 세로 700mm 짜리 나무 상판의 마감을 끝낸 후에는 40x40 사각 앵글을 용접해 철제 다리를 만들었다. 있는 힘껏 무게를 실어도 무너지지 않은 걸 확인한 후에야 짐을 올렸다.
어쩌면 나는 억지로라도 무너지지 않을 환경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책상에서 내가 몰두했던 일이란 현재에 충실한 것도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몇 번이나 자신을 과거로 보냈다. 이미 졸업한 학교를, 퇴사한 회사를, 지나온 사건을 되돌리며 어떤 의미를 찾으려 했다. 사업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생겨나는 새로운 문제들로 바쁠 때도 그랬다. 책상에서만큼은 그 우선순위에 대해 변명하거나 납득시키지 않아도 됐다.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힘든 시기였는데, 이상하게 책상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하루를 보내다가도 책상에 앉아 숨을 고르면 금방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정은 적절한 자리를 찾고, 우리는 지난 기억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화해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이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모두 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은 다시 난잡한 상태로 되돌아가고는 했으니까. 20세기 철학자 미셸 푸코도 유토피아를 “실제 장소를 갖지 않는”,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계속해서 뻗어나가 사회 안에서 한정적으로 유토피아적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에 대해 성찰했다. 마치 유년 시절의 다락방이나 조악하게 만든 비밀 아지트처럼, 일상의 질서에 “이의제기”를 하는 다른 장소. 푸코는 그곳에 ‘헤테로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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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들으면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사실 병실에도 책상이 있었다. 처음에는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것도 힘들어 꾸벅꾸벅 졸고는 했다. 하지만 점차 통증이 가라앉고 휴대전화로 틈틈이 치료 과정을 기록하다보니, 가지고 온 노트북을 펼치고 쓰던 책의 원고도 살펴볼 수 있었다.
문장을 하나씩 더하고 옮기고 빼다 보면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음압병동도, 비쩍 마른 아픈 몸도 그대로지만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차례를 정리하고 두 편의 원고를 추가로 썼다. 책의 제목도 거기서 정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전화로 의견을 나누던 출판사 편집자님도 그게 가장 좋다고 했다.
책상 앞에서 나는 항상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더 먼 어딘가, 형태만 다른 수많은 섬을 향해 끊임없이 노를 저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중요했던 건 섬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나운 파도에 휩쓸리고 흔들리면서도 고개를 들고 팔을 휘저을 때면 내가 떠도는 바로 여기, 망망대해의 구명정이야말로 내가 찾던 그 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책상이 있는 곳에서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니까.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니까. 여전히 엉망진창이 삶의 한가운데서도, 변명하거나 탓하는 대신 가만히 지난 기억을 뒤적이며 어질러진 감정의 자리를 찾아내곤 하니까. 그곳에서 마침내 파도는 섬의 무늬가 되고, 우리는 착각이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해당 글의 인용 부분은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문학과지성사, 2023)를 참고하였습니다.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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