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죄송해요, 이번에도 안 되면 다른 분 불러올게요... 말끝을 흐리는 간호사에게 나는 괜찮다고 했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는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주사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서늘한 감각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순간순간 긴장을 하다 보니 어깨가 뻐근했다. 그래서 네 번째 주사 바늘이 드디어 혈관을 찾아냈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나도 진심으로 함께 기뻐했다.
몇 번이나 내뱉었을지 모를 ‘죄송하다’는 말이 그가 나간 뒤에도 병실 곳곳에 남았다. 그 모양이나 질감을 확인할 수 있다면 꽤나 익숙할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수많은 ‘죄송하다’를 입에 달고 무언가를 배워가는 사람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목공이나 가구를 공부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그리고 병실에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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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하고 며칠 동안은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어지러웠다. ‘결핵 환자’라는 정체성은 자신을 구성하는 다른 어떤 이름보다 앞서 나를 정의했다. 이름에 따라 지내는 공간과 상황이 달라졌고, 해야 하는 일과 일상적인 생활도 변화했다. 발맞추려 노력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몸과 생각의 불일치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간극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입원하러 오면서 쓰고 있던 책의 원고를 전부 프린트해서 챙겨오기까지 했다. 병원에서 추가 원고를 쓰고 첨삭을 마무리하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작업을 너무 빨리 끝내면 지루하지 않을까 책까지 몇 권 더 챙겼다. 그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는지 몰랐다. 아니, 나는 환자가 뭔지도, 치료가 뭔지도 몰랐다.
치료는 휴식이 아니었다. 매일 수십 개의 알약을 먹고, 왼쪽 팔에 연결된 호스로 항생제와 수액이 동시에 흘러들어왔다. 수시로 혈압과 체온을 재고, 오른쪽 팔에 주사를 맞고, 모터가 돌아가는 기계를 옆에 두고 액상 약물을 30분씩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체력이 떨어져 작은 행동에 하나에도 쉽게 지쳤다. 치료는 결코 편안하거나 느긋하지 않았다.
처음 나를 덮쳐온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글 쓰는 건 진즉에 포기하고 책이라도 읽어보려 했지만 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10분만 지나도 집중력이 떨어져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몸이 갑자기 늙어버린 걸까 의심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름이 온 몸에 퍼져 신경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가져온 집기들을 병상에서 모두 치워버리고 눈앞의 일에만 집중했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식사 시간에는 되도록 오래 음식물을 씹었고, 타이머를 맞춰 잊지 않고 약을 삼켰다. 그리고 틈만 나면 잠을 잤다. 아침에 깨어나면 어제와 달라진 점을 휴대전화에 메모했다. 낯선 몸을 교보재 삼아 자신의 일부가 된 ‘결핵 환자’라는 정체성을 하나씩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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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휴대전화의 메모는 어느새 긴 글이 됐다. 몸의 상태뿐만 아니라 치료를 받으며 느끼는 생각이나 경험을 함께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글에도 쓸모가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처음 통증을 느끼고 불안감에 검색창을 두드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필요했던 건 정제된 지식보다는 생생한 경험담이었다. 딱 그 정도의 쓸모가 있겠지 싶었다. 그렇게 여행이나 맛집 정보처럼, 블로그에 아픔의 ‘후기’를 쓰기 시작했다.
실제 겪은 증상이나 건강보험 적용 범위 등의 정보에서부터, 의학적 설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안이나 두려움에 대해 상세히 썼다. 처음에는 환자로서 지내는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한 개인적인 기록에 가까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꽤 많은 사람들이 글을 보고 있었다. '결핵'과 관련된 키워드를 검색해 블로그로 들어오는 이들은 결핵 환자이거나, 환자를 곁에 둔 보호자일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아프기 전까지 ‘결핵’을 검색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은 댓글로 질문이나 감상이 달리기도 했는데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결핵 전문 병원이 아니어도 괜찮은지, 입원은 꼭 해야 하는지, 약 먹으면서 힘들지는 않은지 등을 물었다. 어떤 이는 글을 읽고 펑펑 울었다며 자신의 치료 경험을 공유해주기도 했다. 그런 날은 나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각자의 아픔을 나누는 것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제외한다면 나는 댓글로 달리는 대부분의 질문에 ‘죄송합니다. 전문의와 상담해보세요’라는 뻔한 대답만 했다. 특히 약의 부작용이나, 내성 결핵 치료 과정 등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질문에 대해서는 함부로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환자’라는 정체성으로 지내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결국 ‘나’라는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적 경험이었다. 감정과 겪은 일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쓰더라도,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기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힘들고,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사건으로 느껴지기도 할 터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경험은 빈 주사바늘처럼 누군가를 아무 이유 없이 아프게 만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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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도 개인의 아픔을 ‘경험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 30년간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한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 아서 클라인먼은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라는 책을 통해 "치료는 의사의 대처가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환자의 아픔을 단순히 '질병코드'로 재단하는 대신 그 아픔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적 서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십만 명의 인생이 저마다 다르듯이 수십만 가지 아픔에도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 이를 ‘질병 서사(Illness Narratives)’라고 부른다.
치료진이 환자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질병 경험을 인정’할 때, 개인적이고 사소했던 이야기에는 권위가 생긴다. “각자의 삶이라는 텍스트” 속에서 그 사람만의 독특한 질병 서사를 파악하는 일은, 생물학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벗어나 환자의 상태를 더욱 면밀히 살필 수 있도록 돕는다. 클라인먼 교수는 이런 태도야말로 의사를 단순한 ‘치료자’가 아닌 ‘치유자(healer)’로 나아가게 한다고 보았다.
평생을 관련 연구에 힘써온 이들이 듣기에는 무모할 수 있겠지만, 약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허락된다면 클라이먼 교수의 주장에 하나를 보태고 싶었다. 질병 서사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환자와 환자, 환자와 보호자, 또는 환자의 아픔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 질병 서사는 낯설어져버린 자신의 몸을 통해 지금껏 보지 못했던 타인의 삶을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픔은 고유한 경험인 동시에, 그 자체로 나의 한계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언제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회사를 옮기거나 다른 분야에 도전할 때도 그랬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워야 할지가 선명해졌다. 이 기계 조작법은 잘 모르겠어요. 이 문제는 처음 보는 경우네요. 한 곳만 더 확인하고, 안되면 다른 분을 불러올게요... 한계를 벗어날 때마다 두려웠고, 지나온 자리에는 발자국처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남았다.
블로그 댓글창에 가득했던,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아픔 앞에 ‘죄송합니다’를 쓰면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그건 어쩌면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 당신의 아픔은 오로지 당신의 것이어서, 내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조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자칫 무력해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제야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존중하고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질병 서사가 주는 배움이 병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하다고 믿는다. 질병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아픔이 고유한 이야기로 거듭나길 소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아픔을 더 잘 표현하면,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한계와 부족함을 명확히 이해하고 다가서면, 우리가 ‘치유’의 주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그 생각에도 자국이 있다면, 아마도 당신에게 이어진 발자국 모양일 것이다.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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