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한 지 딱 100일이 지났다는 걸 알았다. 10년 이상 이곳에 살아온 사람처럼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이제 겨우 100일 된 ‘이 구역 새내기’라는 사실에 놀라고, 서울 도심을 누비던 이전 삶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란다.
오늘은 정원이 있는 시골민박을 위한 첫 작업이 있었다. 한국국토정보공사에 신청해 정확한 땅의 경계를 측량하는 일이 그것이다. 땅을 증여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고, 앞으로 건물을 짓고 정원을 가꾸려면 땅의 경계와 모양을 명확히 아는 것이 기본이라 서둘러 측량을 신청하고 비용을 입금했다. 돈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이제야 진짜 시작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 9시부터 두분이 나오셔서 세시간 가까이 걸려 분할면과 경계를 표시해주셨다. 한분이 GPS와 컴퓨터를 이용해 정확한 지점을 잡으면 다른 한분이 빨간 말뚝을 박고 파란색 스프레이도 뿌려 경계를 표시한다. 그간 우리 땅인줄 알고 열심히 가꿨던 부분이 알고보니 아닌 곳도 있고, 울창한 밤나무 때문에 잘 출입하지 않던 뒷산과 접한 땅의 많은 부분이 우리 경계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재밌다.
땅의 형태와 해가 드는 방향, 그 사이 어떤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고, 어떤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부터 정원그림이 시작일테다. 숲과 접해있는 땅을 생각지 못하게 얻고 보니 그동안 꿈꾸던 숲정원과 이끼정원이 가능한건가 싶어 방법도 모르면서 괜히 설렌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풍성한 정원으로 가꾸는 일도 만만치 않겠지만, 타인의 취향과 열심이 오랜시간 자리잡은 땅을 바꿔가는 것도 참 큰 일이다 싶다. 아버지께서 열심히 이것저것 심고 가꾸신 덕에 눈길이 닿는 곳마다 쉽게 바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꿈이 있으니 굽히지 말고 나아가야지. 옛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가 잘 녹아든 정원을 만들려면 방대한 자료와 끝없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쉽지 않은 미션이 주어져서인지 나는 더 설렌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부지런히 할 일을 마친 후 밖으로 나서는 오후 두시 쯤이다. 날씨와 기온에 맞는 옷을 걸치고 운동화 끈을 조이고 나면 데이트를 나가는 사람 마냥 마음이 부푼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에게 인사하듯 잘 다듬어진 아파트 단지 나무들과 눈맞춤하고, 공원을 통과하며 발견한 새로운 빛깔의 단풍과 열매를 손으로 만지다 보면 발 아래에선 바스락 하며 부서지는 낙엽의 인사가 들린다. 커다란 관목 사이로 한낮의 빛이 새어드는 숲 속 산책로로 들어서면 오랜 여행 후에 집에 도착한 사람 마냥 깊은 안도의 숨이 내쉬어진다.
자연은 말이 없어 좋다. 의미없는 인사치례를 반복하지도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무례하게 잡아끌지도 않으며 나이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아 좋다. 말은 없는데 질문을 걸어오고, 감각을 깨우는 소리로 사색을 건네는 자연. 쉭,쉬익-,스으윽, 빠지익, 짹짹, 까아악, 툭. 매일 다른 바람과 나뭇가지, 낙엽과 새가 건네는 소리는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새로운 언어이다. 내 오십의 ‘고요’를 채우는 새로운 재료이다.
매력적인 삽화와 우아한 문장으로 계절을 탐구하는 책 <야생의 위로>를 읽고 있는데 초록 색연필로 그은 밑줄이 가득하다. 아마도 이 책을 다 읽을 쯤이면 나도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을지 모르겠다. 오십의 나를 안아주는 자연의 품에 감사하는 마음에, 이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지 않고 떠나보내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그릴 결심’을 할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인용한 철학자이자 시인, 신학자였던 키르케고르의 고백이 꼭 나의 고백같다.
“나는 날마다 더없는 행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시에 일상의 고통으로부터 걸어 나간다. 내 인생 최고의 사상은 내가 걷는 동안 발견한 것이며, 산책길에 함께할 수 없을 만큼 부담스러운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글쓴이 – 이설아
작가,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안내자, 글쓰는 오두막 <온리앳오운리> 주인장. 저서로는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돌봄과 작업/공저>,<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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