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우리를 살려낸 건 무엇이었을까

2024.06.09 | 조회 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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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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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이는 베란다 창살 위에 두 팔을 얹은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전 10시밖에 안 되었으나 햇살은 꽤 강했고, 짙푸른 하늘 여기저기엔 바닐라 아이스크림 덩어리 같은 구름 뭉치들이 툭툭 흩뿌려져 있었다. 아이 잠옷의 바짓단을 살짝 밀어젖히는 바람도 불고 언뜻언뜻 새 소리도 들려왔으니 어찌 보면 그저 평온한 오전 풍경이었다. 적어도 우리 아파트 베란다, 그 위부터는 그랬다는 뜻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의 1년 

그로부터 1년여 전인 2020년 3월, 베란다 밑의 세상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탓에 봉쇄령으로 꽁꽁 묶여버렸다. 모든 학교들의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카페와 식당 들의 셔터도 일제히 내려졌다. 마트에 장보러 가는 사람도 가구당 한 명으로 제한되는 등 나와 아이는 그때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졌다. 그렇지 않아도 쿠알라룸푸르는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낯선 도시였는데 말이다. 

아이는 주재원인 아빠 덕에 타국의 국제학교에서 초등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바 있었다. 이후 주재원 임기가 끝나 우리 부부가 귀국 준비를 시작하려던 때,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고집을 부렸다. 앞으로도 해외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밝힌 것이다. 아이는 제 나름의 근거들도 꽤나 명확히 제시하며 2주가량을 버텼고, 나와 남편은 고심 끝에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선 기러기 생활을 해보자는 데 동의했다. 그런 뒤 몇몇 후보 도시들을 비교해 선택한 도시가 쿠알라룸푸르였다.

그렇게 얼결에 아이와 단둘이 이 도시에 와 고작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봉쇄령이 내려진 것이다. 아는 이 한 명 없어 모든 걸 하나하나 몸으로 경험하며 배워가야 하는 시기에 글자 그대로 집에 묶였으니 난감하고 비현실적이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이러스는 때마침 사춘기에까지 들어서버린 아이의 맘속에서도 세를 키우는 듯했다. 단짝 친구나 동네 친구라 할 만한 누군가도 아직 없는데 느닷없이 갇혀 살게 되었으니 갑갑하고 우울해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갱년기 근처의 엄마와 단둘이, 24시간 내내 붙어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을 테고 말이다.

아이는 온라인 수업 중이라며 컴퓨터 앞에 매일 몇 시간씩 당당히 붙어 있었다. 다만 그 아이의 관심은 수업용 창이 아니라 그 뒤에 몰래 띄워놓은 유튜브 혹은 게임 창으로 점점 쏠렸다. 사춘기 존재와 갱년기 존재 사이의 갈등은 그걸 계기로 본궤도에 올랐다. 내가 슬쩍 제 컴퓨터를 쳐다볼 때마다 아이는 매번 황급히 화면을 전환하기에 바빴고, 그런 모습을 계속 접하다 보니 걱정이 커져갔다. 우리 부부가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던 건 잘한 일일까, 사춘기의 저 아이가 저리 지내다 자칫 완전히 엇나가면 어쩌나, 어떻게 해야 저 아이를 잘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손에 손을 붙잡고 달려오는 걱정들은 불안과 우울을 부르고 또 낳았다. 

물론 부드럽게 타이르려 애쓴 시기도 있긴 했다. “네가 너무나 유학 생활을 원해서 여기에 와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니, 공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같은 말들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을 뿐이다. 자꾸 딴짓만 파고드는 아이, 그 버릇을 잡아보겠다며 잔소리와 독설을 퍼붓는 나, 그런 현실을 잊고 싶어 아이가 더 빠져드는 온라인 세계, 그 모습에 내 맘속에서 더욱 크게 올라오는 분노는 우리 집을 지옥에 있다는 불구덩이로 차근차근 바꿔나가기에 충분했다. 아이는 분노와 고통과 사춘기의 방황 속에서, 나는 죄책감과 암담함과 불안감이 펼치는 삼단콤보의 공격 속에서 각자 어지간히도 흔들리고 넘어졌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난 그날, 베란다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은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내 방으로 숨어들 듯 돌아왔다. 저 아이는 훨훨 날아다녀도 모자랄 시기인데 때를 잘못 만나 새장 속 새처럼 지내고 있구나, 낯선 곳의 꽉 막힌 환경에서 오래도록 힘들긴 매한가지였을 텐데 나는 엄마라면서 그 마음도 헤아려주지 못했구나, 밝고 활기찼던 아이를 고작 1년 만에 저렇게 힘없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렸구나… 여러 생각들이 한꺼번에 나를 두들겨댔다. 이미 피고름이 잔뜩 들어찬 마음들, 적잖이 얼어붙은 둘 사이를 이제부터라도 살펴주지 않으면 아이나 나나 지금보다 더욱 깊어질 상처와 흉터에 두고두고 괴로울 게 자명했다.  

 

호텔 앞 나무 한 그루

며칠 뒤 오후, 우리는 시내에 있는 어느 5성급 호텔의 객실에 들어섰다. 1년의 봉쇄령 탓에 도산 직전에 내몰린 호텔들에게 말레이시아 정부는 그 무렵부터 점차 영업을 허가해주었고, 각 호텔들은 반값할인 이벤트를 내걸며 모객에 나섰다.

그 이벤트가 없었다면 나도 아이와의 호캉스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캉스는 돈 낭비라 여기기도 했고, 1일 신규확진자가 여전히 수천 명인 시기에 사람 많은 호텔을 가는 건 자살행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숨구멍이 간절히 필요했다. 연간 몇 번씩 가족 여행을 다녔던 과거와 달리 이 도시에 와서부턴 여행은커녕 집 밖에서의 생활도 제대로 못 했으니 말이다. 사실 한국행 비행기도 뜨지 않는 시국에 조신하게 있지 않고 돌아다니다 코로나에 감염되면 그야말로 최악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둘 다 코로나보다 더한 무언가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 편이 나을 것 같았고, 기왕 할 거라면 반값할인을 하는 이때 해야 한다 싶었다.

간단히 꾸려 온 짐을 풀고 나니 방 안엔 영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마냥 가깝고 살갑다 하기도 어려운 게 지금 나와 아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침묵이었다. 

아이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취하는 방법은 뭔가를 함께 먹는 것이다. 아이나 나나 음식에는 매우 진심이라, 맛이 있든 없든 일단 같이 먹고 나면 그 음식에 대해 꽤나 긴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이른 저녁 시간이 된 터라 우리는 호텔 옆의 큰 쇼핑몰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고, 운 좋게 맛있는 커리집을 발견해 위장과 분위기 모두를 꽤 따스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다만 그다음으로 뭘 할지가 좀 막막했다. 코로나 탓에 문 연 매장들이 많지 않아, 그 명칭이 무색하게 쇼핑조차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할 것도 없는 곳을 멀뚱히 둘이 돌아다니다 또다시 어색해지느니 차라리 객실에 들어가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쇼핑몰 밖의 하늘은 이미 검은색에 가까워졌고, 100미터쯤 되는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호텔과 쇼핑몰의 외벽엔 조명들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들 사이로, 그 무렵 그 어느 날의 것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와 대화하려 노력하며 호텔을 향해 걷던 나는 문득 발길을 멈췄다.

“어, 얘 잎이 왜 이러지?”

호텔과 쇼핑몰 사이에는 내 키보다 조금 큰 고무나무들 몇몇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그중 한 그루의 잎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마치 진흙탕 물이 뿌려졌다 마른 듯 희끗희끗한 점들에 점령당한 잎이었다. 그 하나뿐 아니라 그 나무의 모든 잎들이 같은 상태였고, 주변을 살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비가 오거나 햇빛 강한 날에도 사람들이 호텔과 쇼핑몰 사이를 편히 오갈 수 있도록 반투명 플라스틱 가림막이 나무들 위쪽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가림막 탓에 나무들은 비도 햇볕도 제대로 맞지 못할 텐데, 봉쇄령 때문에 나무 관리인들의 손길조차 그간 사라져 거의 버림받은 상태에 이른 듯했다.

“아, 나 이런 거 본 적 있어. 작년에 우리 집서 키웠던 선인장 중 하나가 이런 점들에 점점 뒤덮이다가 결국은 죽었잖아. 기억나?”

잠시 생각하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그냥 두면 그 선인장처럼 죽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

잎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손톱 끝으로 톡, 흰 점 하나를 긁어내며 내가 말했다. 점처럼 들러붙어 있는 그것들은 병충해의 일종이다(게을러서 여태껏 이름은 찾아보지 못했다). 주로 반들반들하고 빤빤한 잎에 기생하며 양분을 빨아 먹는데, 한 번 번지기 시작하면 수시로 긁어내고 약을 쳐줘도 박멸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걸 나는 지난 1년간 이미 배운 바 있었다. 그런 벌레들이 이 많은 잎에 이렇게나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나무는 머지않아 죽을 것 같았다.

“잠시만요, 저한테…”

아이는 뒤에 메고 있던 백팩을 앞으로 돌려 잡더니, 지퍼를 열고 속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휴지가 있어요. 이걸로라도 좀 닦아볼까요?” 

 

여기에, 그때 그 아이가 있었다

아이와 나는 각각 휴지 한 장을 들고 잎 하나씩을 닦기 시작했다. 벌레도 문제였지만 그간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잎 표면엔 새까만 먼지가 버석버석 층을 이루고 있었다. 명색이 유명 호텔과 큰 쇼핑몰 사이에 나름 관상용으로 심긴 나무였건만, 이 녀석도 창살 없는 이 감옥에서 1년 넘게 붙박인 채로 망가져온 게 분명했다.

휴지를 바짝 뭉쳐 잡고 잎 앞뒷면을 조심스레 긁다시피 하며 10분여쯤 닦으니 먼지도 흰 점 같은 벌레들도 거의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고무나무의 매력 포인트, 그러니까 건강한 광택이 도는 진녹색 잎이 되었다 하기엔 좀 모자랐다. 마침 갖고 있던 생수병의 물로 휴지를 적셔 물청소까지 해주니, 병충해의 흔적들은 남아 있으나 그제야 잎이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예쁠 수 있는데 그렇게나 맥없는 모양새였다는 데 가벼운 분노마저 일었다. 

거기까지만 하고 나는 객실로 돌아가자 할 생각이었다. 배가 부른 데다 덥고 습해 빨리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는 도통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눈높이에 있는 잎 하나를 싹싹 닦고 나처럼 물청소까지 해준 아이는 “이제 들어가자.”라는 내게 “요거 하나만 더 하고요.” 하며 그 옆, 그 옆의 옆, 그 아래의 잎들로 차례로 눈과 손을 옮겼다. ‘최근 1년 동안 저 아이가 저리 몰두했던 게 유튜브와 게임 말고 있었던가…’ 싶어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 나도 다른 잎들을 닦기 시작했다. 예뻐진 잎을 보는 기분이 썩 괜찮긴 했던 것이다.

아이와 나는 조용히, 또 부지런히 잎들을 닦고 또 닦았다. 어떤 이들은 지나가다 우릴 보고선 “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혹은 “이걸 왜 하는 거지?”라 물었고, 어느 꼬마 남매는 저마다 막대사탕을 쪽쪽 빨면서 우리 옆에 다가와 한참을 구경하다 엄마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짧게나마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부담스럽고 민망했지만, 그 또한 1시간쯤 뒤엔 거의 무덤덤해졌다. 

이제 손은 잎 위에 앉아 있던 먼지 탓에 새까매졌고, 역시 그만큼 새까매진 휴지들도 발치에 꽤 쌓였다. 잔뜩 힘주고 있었던 손가락 마디들이 조금씩 쑤셔오는 탓에 잠시 손을 멈추고선 허리를 곧게 폈다. 내 옆에서 나란히 잎을 닦기 시작했던 아이는 이제 내 반대쪽으로 가 쪼그려 앉은 채로 아래쪽 잎들을 닦아주는 데 여념이 없다. 목덜미를 보아 하니 땀 깨나 흘린 듯한데, 가뜩이나 더운 걸 싫어하는 아이가 객실로 들어가자는 말 한마디를 지금껏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이가 생후 20개월도 채 안 되었을 즈음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무렵의 아이는 동네 산책을 나가면 집 근처에서 한창 작업 중인 포클레인에 정신을 빼앗겨 20분이고 30분이고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곤 했다. 그 기억 속 아이의 모습이 스르륵, 나무 반대쪽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 모습 위로 오버랩되는 순간 무언가에 머리 한가운데를 맞은 듯했다.

‘아, 저 아이는 아직, 그때의 순수한 그 아이구나.’

사춘기란 곧 ‘과도기’, 다시 말해 몸은 빠르게 성장하지만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아이일 수 있는 시기임을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덩치도 나보다 커졌으니 이제 아이는 공부든 생활이든 알아서 야무지게 해낼 거라는 기대치만 나 혼자 높여왔던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버거웠던 건 어쩌면 낯선 도시나 봉쇄령이 아니라 빛의 속도로 달라지고 요동치는 심신이었을 텐데, 커져버린 몸집 속에는 여전히 여리고 작은 아이가 웅크리고 있을 텐데, 낯선 환경이 주는 위기감 탓에 나는 아이를 그저 몰아치기만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참 못난 에미다…’

베란다에 서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봤을 때보다 콧등이 더 빨리, 더 찌릿하게 아파왔다. 나는 얼른 발치의 휴지들을 모아 들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휴지통으로 재빨리 걸었다.

 

살아난 나무, 살아난 우리

이틀째, 그리고 사흘째의 저녁 식사 후에도 나와 아이는 그 고무나무 한 그루의 잎들에 계속 매달렸다. 둘째 날엔 어느 말레이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보이며 지나갔고, 셋째 날엔 아주 편안한 런닝셔츠 차림의 중국계 말레이인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옆으로 와 담배를 뽀꼼뽀꼼 피우며 “어제도 그제도 너희가 잎 닦아주는 거 봤어.” 하고선 씩 웃으셨다. 그때마다 아이도 그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타인의 시선을 싫어하고 피하려 했던 사춘기 소년답지 않은, 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미소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밤, 우리는 그 나무의 모든 잎들이 진녹색을 되찾게 해주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날 오전은 이곳의 전형적인 아침 햇살처럼 밝고 상쾌했으며, 아이의 얼굴과 웃음도 그랬다. 아이와 나는 다정하게 조식을 먹었고, 예전처럼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호텔 바로 앞의 큰 공원을 산책했다. 아이의 얼굴과 몸짓에서 어린아이였을 때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이는 게 신기하면서도 애틋했다. 

객실로 돌아와 짐을 꾸린 뒤 꾸리길 마친 뒤 혹 놔두고 가는 건 없는지 마지막으로 둘이서 방 안을 훑어보는데, 아이가 갑자기 저 잤던 침대로 가더니 베개들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이불도 얌전히 펼쳐 놓는다. 어느 여행지에서든 방을 나서기 전 내가 으레 했던 그 일을 제 방 침대 정리도 안 하던 아이가 하니 조금 놀라웠다. 짐작할 순 있었지만 모르는 척 슬쩍 이유를 물으니 아이가 조금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해놓으면 청소하시는 분들이 덜 힘드실 것 같아서요.”

아이의 닫히고 다쳐 있던 마음은 어떻게 저리 보드라워진 걸까 궁금했다.

캐리어를 끌고 호텔 밖으로 나오다 다시금 그 나무에 시선이 갔다. 여전히 햇살을 직접 받진 못하지만 사흘 전보다 짙푸르러진 잎들 덕에 한층 살아 있는 생명체다워 보였다. 떠나기가 어쩐지 아쉬워 아이와 함께 나무에게로 다가가 아무 말 없이 잎을 쓰다듬어주었다. 나와 아이가 사흘에 걸쳐 닦고 다시 살려낸 건 어쩌면, 켜켜이 쌓인 먼지 밑에서 오래도록 숨죽이며 울고 있던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 글쓴이 소개 - 서혜윰

타인의 글을 매만지고, 나의 글을 끄적이고, 때로는 한국어도 가르치며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고 있다. ‘즐거운 글쓰기’라는 행위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싶어 노력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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