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목욕탕 가기
어렸을 때 매주 엄마와 대중목욕탕에 갔다. 90년대 낡은 주택에서는 샤워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목욕탕에 가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토요일 오후 목욕탕은 굉장히 붐볐으므로 엄마는 항상 나와 팀플레이를 해야 했다. 엄마는 내가 하교할 즈음 미리 가서 자리를 맡기 위해 선발대로 목욕탕에 갔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후발대로 나섰다. 목욕탕 문을 열면 습기와 함께 사람들의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김서린 안경을 후딱 헹궈서 고쳐 쓰고 엄마를 찾았다. 다 비슷한 체형에 똑같은 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손짓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목욕이 시작되었다.
까끌한 때수건을 손에 끼고 열심히 때를 밀었다. 나는 자꾸 종아리만 밀게 되는데 엄마는 목 뒤에도 밀고 허벅지 안쪽도 밀라며 채근했다. “거기는 이미 다 했어.” “다 하기는 무슨, 여기 그대로 때가 나오는데, 비켜봐.”하시고는 그때부터 엄마가 밀어줬다. “아, 아프다고!” 빨리 끝내달라고 얼굴을 찌푸려보지만 소용없었다. 등을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나 결국 온 몸 구석구석 엄마의 까칠한 손길이 지나갔다. 밀고 밀어서 때가 안나오고 살갗이 벌겋게 변해야 거의 끝이 난다. 마지막에 비누칠을 할 때면 콕콕콕 찌르는 느낌마저 드는데 못참겠다 싶은 순간 미지근한 물로 한번 헹궈내면 비로소 끝이 났다.
그렇게 한판을 밀고 나면 갈증이 난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바나나 단지 우유나 아줌마들이 마시는 미에로 화이바 같은 게 먹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밖에서 간식거리를 사먹는 일 따위로는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이었다. 늘 그렇듯 봉지에서 귤을 꺼내 주었다. 밀감이라고 불렀던 그 귤은 이미 까는 동안 축축해졋다. 개중에는 단것도 있고 새콤한 것도 있었겠지만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불어서 쭈글거리는 손으로 귤에 붙은 흰색 부분을 떼내며 젖은 귤을 먹었다. 미지근했던 맛만 기억난다.
엄마는 박봉 외벌이 가정의 전업주부였다. 그녀의 특명은 적은 돈으로 알짜배기 살림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쥐어짜듯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내가 결핍을 느끼지 않았던 건 엄마의 희생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위험에 최대한 덜 노출 되는 것이며 큰 걱정거리 없이 밤에 잠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바나나 우유를 사먹는 간식비는 아꼈지만 학창시절 책값, 학원비를 지원받는다거나 나 혼자 목욕탕에 걸어 들어오게 했지만 한밤 중 귀가길에는 엄마가 자주 데리러 나왔다. 그렇게 나는 가계 상황이나 사회의 가시들로부터 보호받으며 철들지 않은 학생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엄마랑 목욕탕 다시 가기
이제 그때 엄마보다 내 나이가 더 많다. 종종 엄마와 목욕탕에 간다. 같이 차를 타고 가고 결제도 내가 한다. 박봉 외벌이에 알뜰 살림을 보고 배운 나는 자연스럽게 집에서부터 아이스커피며 우엉차를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 목욕탕은 주말이어도 더이상 붐비지 않고 자리 경쟁도 치열하지 않다. 내가 커버린 탓에 어지간히 규모가 큰 목욕탕도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내가 먼저 엄마 등을 민다. 초등학생 때는 엄마 등을 밀 때 너무 넓어서 언제 다 미냐며 팔 아프다고 투덜거렸는데 이제는 손을 좌로 우로 몇 번만 하면 끝나버리는 것 같다. 굽고 좁아진 등을 최대한 열심히 밀어본다. 여기가 덜된 것 같다 옆구리 더 밀어달라 등의 주문도 없다 그저 엄마는 잠자코 등을 나한테 맡기고는 기다릴 뿐이다. 내가 미는 대로 엄마의 등이 같이 떠밀린다. 등이 밀릴 때 버티는 힘조차 엄마에게는 약간 버거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든다.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이전에 또 했던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도 훌쩍 지나고 몸도 어느정도 다 씻게 된다. 그다음 바리바리 싸온 커피며 음료를 홀짝거려본다. 음료수 집에서 싸오니까 돈아끼고 좋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이며 또 한 모금 마신다. 한평생을 ‘아낄여사’로 살아온 엄마답게 아이스커피 2잔 여기서 사먹으려면 돈 만원은 줘야하는 거 아니냐며 ‘역시 너는 내 딸이야’하는 눈빛을 쏘며 다시 한 모금 마신다.
목욕을 다 마치고 엄마한테 수건 가지고 올 테니 락커룸으로 나오지말고 안에 있으라 당부한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는 정말 한발도 안 움직이고 거기 그대로 서 있다. 구부정한 허리에 굽은 등, 얇은 다리, 적어진 머리숱이 유독 눈에 띈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구나 생각해본다. 감기들세라 마른 수건을 건네고 특히 머리 잘 말리라고 잔소리도 덧붙인다. 잔소리는 보호자의 의무이자 권리 같기도 하다. 딸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으니 거기서 꼼작않고 고이 기다리던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벌써 아린다.
한때 엄마는 전투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장군 같았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단호히 내리고 ‘적은 월급으로 자식들 공부시켜 독립시키기’라는 작전을 빈틈없이 수행했던 대장님 같았다. 내가 사소한 걱정으로 하소연을 할 때도 약해빠진 소리라며 네 할 일 하다 보면 뭐든 되게 되어있다 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이제는 찬바람을 무서워하고 낯선 곳에서는 일단 멈칫하게 되는 엄마를 본다. 엄마는 더이상 누구를 보호해야 할 입장이 아니고 양보와 배려를 받으며 보호받는 입장이 되었다. 어느덧 우리의 입장이 이렇게나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서글퍼진다.
우리 인생의 후반부
몇 달 전 엄마에게 요즘 뭐가 제일 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많이 놀러 다니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는 숙박비가 비싸다느니 한 번 가본 곳은 안가도 된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어디든지 가자고 하면 바로 떠날 채비를 한다. 엄마는 나랑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딸이랑 여행 다닌다고 하면 주변에서 엄청 부럽다는 듯 반응을 해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역시 비용이다. 내 차가 전기차이기 때문인데 이동을 많이 해도 비용이 적게 들고 우리 둘만 자는 숙소는 컨디션을 따지지 않고 아무 방이나 써도 되기 때문이다. 돈 몇만원에 잘 갔다 왔다며 일주일 내내 자랑삼아 얘기한다. ‘알뜰여사’는 아직 건재한 듯 하다.
한없이 짠순이 같이 굴었으면 엄마와는 친구처럼 지내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 우리가 40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녀도 조금 바뀌어 간다. 최근 엄마의 소소한 취미는 카페에서 라떼를 마시는 것이다. 라떼아트가 잘되었는지 우유와 커피의 비율 같은 것을 분석하며 즐긴다. 그래서 카페가서 차 한잔 하자라는 말을 그렇게 반긴다. ‘핫플헌터’ 같이 새로운 카페에 가서 라떼도 마시고 늘 그렇듯 밀린 아빠 험담도 늘어놓는다.
한번은 엄마에게 나는 나중에 제사 같은 거는 모르겠고 살아 있는 동안 좋은 데 놀러 많이 다니고 맛있는 거나 많이 먹자 했다. 그리고 엄마 기일이 다가오면 내가 다시 곳곳마다 차례로 들르면서 엄마를 추억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가만히 듣더니 “내사 죽으면 알끼 뭐꼬.(나야 죽으면 알게 뭐야) 그라든지(그러던지)”하며 대답했다. 폐륜아 같은 질문에 벼락같은 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 날 때마다 엄마랑 갈만한 여행지를 검색해본다. 베이커리 카페들도 찾아본다. 어느 순간 우리의 어느 부분이 동기화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제 내가 엄마를 보호하고 부양해야할 것만 같은 생각에 더 책임감을 느끼지만 사실 나도 아직은 엄마가 너무 필요하다. 엄마집에 다녀오면 싸주는 국이며 반찬들 때문만은 아니다. 내 평생을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준 유일한 사람이 우리 엄마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보호하든 엄마가 나를 지켜주든 이제는 크게 상관이 없다. 결국 우리가 서로 보호하고 아끼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 글쓴이 - 곽설영
학교도서관에서 사서교사로 일합니다. 경상도 K장녀로 한 세월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냥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학생들과 책 이야기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인스타그램: @sseol_lib
의견을 남겨주세요
이서영
덕분에 엄마의 등을 생각했습니다 . 라떼한잔 같이 할수있는 기회도요. 작가님 고맙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