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고글은 두 작가가 나눈 글과 피드백을 서간문 형태로 수정했습니다. 서로의 글을 읽고 나누는 건 진심어린 편지를 주고받는 마음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세모문 독자 분들도 마음 속 편지와 답장을 떠올리며 함께 글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까만 밤에 띄우는 편지 - 보배
어딘가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죠. 오늘은 무거워져버린 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쓰고 난 뒤 한결 가벼워질 마음을 기대하며 말이에요. 백지였던 종이에 제 어두움을 담아 먼 바다에 띄워 보내고 싶어요. 그러면 조금 나아질까요. 아이를 기른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더 힘에 부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바다에도 쓰나미가 몰려올 때가 있잖아요. 유독 육아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어요. 잠을 잘 자지 못한다거나, 호르몬의 농간인지 감정이 널뛰기를 한다거나, 아이의 성장 시기에 맞춰 엄마도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거나 할 때요. 보통은 아기가 갑자기 크게 성장하는 시기에 엄마의 체력도, 바이오리듬도 새롭게 정비되는 것 같아요.
이제 11개월이 된 아들 윤우는 8개월에 무언가를 잡고 걷더니 이제는 완전히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말도 제법 알아듣고, 체력도 더 좋아졌고요. 건강하게 자라주는 윤우를 보면서 때때로 하늘을 보며 감사하다는 말을 주절거리며 지내요. 그런데 이 꼬마 천하장사는 하루 종일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낮잠은 한 번밖에 자지 않네요. 또래 아기들이 하루 평균 두 번의 낮잠을 자는 데에 비해 윤우는 한 번의 낮잠을 짧고 굵게 자는 편이에요. 이 말은 엄마의 달콤한 휴식 시간 한 번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침에는 아기가 먹기 좋게 브로콜리나 사과 같은 걸 다듬어 주거나 종종 오트밀 쿠키 같은 걸 구워요. 모든 게 새로운 윤우는 머핀도, 과일도, 야채도 이리저리 탐색하며 맛있게 먹어요. 뒷정리를 한 뒤에 짧은 낮잠을 재우고, 아기가 일어나면 다시 점심 이유식을 끓이죠. 남은 오후 시간은 아기와 실컷 놀아주기도 하고, 식재료를 다듬기도 하고, 제 끼니를 챙기기도 해요. 그러다 아기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나면 그제야 퇴근한 남편이 등장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중간중간 아기 기저귀 처리, 집 청소, 어질러진 장난감 정리, 이불 빨래 같은 걸 하다 보면 앉아있을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고된 육체노동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해요. 하루하루가 빨리 지난 만큼 아기가 태어난 뒤의 11개월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요. 베시시 웃기만 하던 갓난쟁이 아기가 벌써 개구쟁이 ‘키즈’가 되어 버린 느낌에 아쉽기도 하네요.
윤우는 호기심이 많아진 만큼 자아도 생기고, 그만큼 엄마의 손길도 더 많이 필요해졌어요. 냉장고를 열면 냉동실 문 열고 버티기, 응가 닦으러 화장실에 가면 기저귀 갈이대에 두 발 떼고 매달리기, 이리저리 수납장 열다가 부딪혀서 찡찡 울기 등 힘센 병아리의 우당탕탕 일상을 보내요. 개구진 눈망울에 반달 웃음을 짓는 아들 윤우를 보면 ‘이 사랑스러운 꼬마!’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그러다가도 퇴근한 남편 얼굴만 보면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나네요. 화가 불쑥 올라오는 것처럼 눈물이 불쑥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어요. 서서히 밀려드는 슬픔이 아니라, 왈칵 쏟아지는 슬픔도 있나 봐요.
건강식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제가 이렇게 컵라면을 자주 먹으며 지낸 적이 있나 싶어요. 배를 채우려고 좋아하지도 않는 라면을 부랴부랴 먹을 때마다 서러워지기도 해요. 이유식 새끼, 아니 세끼를 시작하면서 하루 최소 5시간은 부엌에만 머무르는 것 같아요. 요리에 ‘요’자도, 설거지의 ‘설’자도 벗어나고 싶은 업무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요. 타인의 삼시세끼를 챙기는 일이 이렇게 고단한 일이었구나 싶고, 이럴 땐 저의 엄마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오후에 아기 이유식 재료라도 준비하는 날이면 온종일 부엌에만 있기도 하네요. 부지런히 퇴근한 남편에게 오늘도 불닭볶음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아기 응가 네 번 치우고, 이불 빨래를 했다고 지친 목소리로 속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눈가가 벌겋게 촉촉해집니다. 좋은 에너지를 주고 싶은데, 쉽지 않아요.
한 번은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문제가 터진 건 괜찮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보통 저는 토요일에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과외를 하러 가요. 출산 직전까지 하던 일이기도 하고, 집에서 아기만 보는 것보다 밖에 나가 사람도 만나고, 일하는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어서요. 바람 쐬는 느낌으로 집 근처로 짧게 다녀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마저 지치더라고요. 도로에 노랗게 물이 든 은행나무를 보며 걷다가 갑자기 달리는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내가 사라지면 어떨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모든 잡무로부터 가벼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죽음일까. 이런 생각이요. 극단적이었죠.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제게는 정말 낯선 감정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울하지 않았어요. 산후 우울증이나 육아 우울증이 저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고 생각했어요. 위험한 생각이 한두 번에서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일요일에 남편과 함께 나들이를 가는 차 안에서는 대뜸 차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어졌어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거예요. 운전을 하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의 시큰둥한 말투에 기분이 상해버린 탓이었죠. 언제나 내게 한없이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욕심 아닌 욕심을 부린 걸까요. 그러다 저는 결국 남편에게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을 육성으로 내뱉고 말았어요. 남편은 놀랐고, 저는 속이 후련했습니다. 왜 이렇게 위태로운 생각들이, 혹은 슬픔이 불쑥 올라오는 걸까요.
‘이 집에서 내가 당장 사라지면 제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기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그리고 남편의 일상도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잖아. 매일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고된 육아를 하는 나의 공을 조금 더 알아줘. 제발 나를 조금 더 이해하고, 응원해 줘. 종일 아기만 먹이고 재울 게 아니라 나도 누가 밥도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잠도 좀 잘 수 있게 해줘’ 이런 엇나간 SOS가 아니었을까요.
실은 아기가 태어난 뒤부터 불면증이 생겼어요.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되면서부터 마음도 같이 병들고 있다고 느꼈어요. 아기의 울음소리나 뒤척임에 깨버리면 그대로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날이 잦았습니다. 간신히 3시간 정도 자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잠들 때마다 혹은 잠에서 깰 때마다 다시 잠들지 못할까봐, 아니면 또다시 금방 깨어버릴까 불안해하며 잠을 자지 못했어요.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주중을 보내고, 주말에는 일을 하고. 다시 월요일 오전이 되면 혼자 육아를 해야 한다며 남편 출근길에 철없이 주저앉아 울기도 했어요. 놀란 남편은 저를 토닥였고, 아무 죄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 윤우는 방실방실 웃으며 저희 곁에 다가왔어요. 마음에도 통각이 있다는 걸 알기 시작한 무렵이에요.
마음을 앓고 있던 시기, 남편과 저녁을 먹을 때 제가 종종 콧물 삼키는 소리라도 내면 남편은 얼른 제 눈가를 살폈어요. 집안에 행복하고 긍정적인 기운은 온데 간데 없고 한숨 소리, 앓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죠. 남편에게 힘들다는 말 대신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고, 울기를 자주 해버리니 남편도 고민이 많았나봐요. 회사에서 한참 바쁜 시기를 보내던 그였는데 제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묻더라고요.
짧게라도 다른 가족들의 도움을 받거나 휴가를 내고 아기를 돌보면 괜찮을 거라고 말이에요. 연애 시절에도 가끔 혼자 있고 싶어질 때면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던 유별난 제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지 너무 오래 된 것 같다고 했어요. 정말 그랬죠. 고요하게 혼자 있어야 숨을 쉬고 호흡을 하는 사람에게 이 생활은 가혹해요. 너무나 필요한 시간이지만, 저는 여전히 마음이 선뜻 움직여지지 않아요. 젖먹이 아이를 두고, 엄마와 네 시간 이상 떨어져 본 적 없는 아이를 두고, 엄마 품에서 잠드는 걸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두고 어떻게 발이 떨어지겠어요.
아기가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빠와 할머니랑 있는데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남편을 보면서 고마우면서 미안하고. 불안했어요. 그리고 저는 결국 여행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 마음을 접었습니다. 자신도 없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작은 메시지 하나로도 기운이 나요. 제가 이 집을 떠나도 될 거라는 제안, 모든 게 바뀌어버린 제 생활을 더 이상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태도. 엄마들은 그래요. 저의 노동이, 그로 인해 추레해진 제 모습이, 저의 고단함이 집에서 당연해지는 순간 몸도 마음도 지구 끝으로,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생활이 힘들어요. 엄마도 모든 욕구와 욕망이 살아있는 인간이기도 하고요.
이 여행을 제가 떠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매일매일 위태로워지는 제 모습이 낯설지만 그럼에도 저의 이 여행이 과연 저희 세 가족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 다녀오고 난 뒤에는 더 잘해내야 할 텐데, 그것도 자신이 없어요. 다녀온 뒤에도 똑같은 일상과 육아에 지쳐서 같은 모습일 텐데 그래도 될까요. 너무도 떠나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고리에 발이 묶여버린 것만 같아요. 가게 된다면 혼자 떠나는 여행이지만 동시에 셋이 합세해 완성해야 하는 여행이기도 하네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시기를 감기처럼 한 차례 앓고만 지나갈 수 있을까요.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마음으로, 보배 씀
까만 밤에 띄우는 답장 - 허태준
답장을 써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고백이 ‘너’의 문제에서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연결될 때, 그 이야기에 저 나름의 답을 보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바다에 띄워진 편지가 해류를 따라 결국 해안가로 닿듯이, 우리 사이에 막막한 어둠만 있다고 느껴져도 분명 서로에게 닿는 마음이 있을 겁니다.
저는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경험해보지 않은 독신 남성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떠오르는 감정에 대해 함부로 말을 더하기 어려운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저는 작가님의 감정이 단순히 ‘육아 우울증’으로 축소되어선 안 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름 짓기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이해하고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름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서사를 마음속에 남겨두기도 합니다. 저는 작가님이 글 속에 남겨둔 우울이나 무력감, 또는 왜인지 모를 불편함으로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이건 작가님의 글 속에서 읽어낸 아주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겠지만, 이름에 담기지 못한 작가님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주워들 수 있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작가님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나 애정이 ‘일방향’이기에 생기는 허탈감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관계의 대부분은 양방향입니다. 한쪽이 열렬한 호의를 표해도, 반대쪽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오래 갈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의미 있는 대화나 행동, 즉 ‘소통’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오며 학습하고 맺어 온 관계의 모습이니까요.
그런데 ‘육아’라는 관계는 우리가 지금껏 맺어 온 관계와는 무척 다르다고 느꼈어요. 사랑과 관심을 주지만, 그만큼 돌려받지는 못하는…… 정확히는 지금까지 우리가 학습하고 맺어 온 ‘의미있는 대화나 행동’으로 소통하고 확인하기 어려운 관계 같다고요.
아이는 분명 사랑을 받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작가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오랜 시간 내가 보고 배워 다른 사람과 나눠왔던 소통의 방식은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기보다는 항상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건 마치 홀로 외국 생활을 하는 것처럼 -설령 외국에서 주변 사람이 다 잘해준다고 해도- 외롭고 낯선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뤄져야 할 관계가 반드시 '아이-양육자'로 국한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무인도가 아닌 이상, 관계가 어떻게 두 사람만의 몫인가요. '아이에게 주는 사랑과 관심만큼 나도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결코 과하거나 부당한 요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한 관계와 소통의 기본적인 방식이니까요.
우리 사회는 때때로 양육자의 이런 마음에 대해 '아이의 성장'이나 '가정의 행복'이 보상이 된다는 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다소 폭력적인 거짓말이라고. 우리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친구와 풀기도 하고, 부모님과 나누지 못했던 애정을 애인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유독 '육아'에서는 아이와 양육자 외에 관계가 모두 닫혀 있는 것처럼 말하며 그들을 고립시키려 해요. 부당한 건 작가님의 마음이 아니라, 육아라는 관계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작가님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에게 주는 감정이 있다면, 꼭 아이로부터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로부터 채워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나 역시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건 결코 과하거나 부당한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껏 누려왔던 당연한 감정입니다.
작가님께 필요했던 건 어쩌면 '휴식'이나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그렇게 표현된 관심과 사랑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누군가에게는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누군가에게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주는 게 사랑의 방식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여행의 성공 여부’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다양한 경로의 감정이 소통하고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일이고, 그것을 더 당당히 요구하는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여전히 그런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아이와의 관계에서 생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풀어내는 게 못할 짓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가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앞선 말한 육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육아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한 -완벽하고 멋진 엄마가 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최책감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왜 느끼게 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며 느끼는 감정은 나쁜 것도 아니고, 못할 짓도 아니라는 걸요. 그 감정이 죄가 아니라고 말해야 해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들을 죄인 취급하는 사회가 부당하다는 걸요.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시간이나 돈이 아니라 '지금껏 우리가 살면서 주고받았던, 배워왔던 방식의 애정' 그뿐이라는 걸요.
그런 당연함의 회복은, 감정을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억압되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는 파동이 되리라 믿습니다. 한 번 시작된 진동이 어딘가로 이어지고, 공유하여 넓어지고, 마침내 거대한 흐름이 되어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더 많은 편지를 던져주세요.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이라도, 어둠이 미처 가리지 못한 떨림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서로의 다정한 답장이 되어줄 겁니다.
까만 밤의 편지를 기꺼이 기다리며, 허태준 씀
* 편지쓴이 - 보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하다가 23년 12월 출산 후부터 <육아에 바나나>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sele
* 답장쓴이 -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한 경험을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라는 책으로 썼습니다. 스스로 소개하는 것조차 버거운 삶이 있음을 알고 그런 이야기를 찾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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