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태양이 완벽히 사라진 날_마음 가드닝_이설아

그 어떤 노력에도 인생의 태양이 완벽히 사라진 것 같은 날을 맞이할 때가 있다

2022.02.23 | 조회 1.0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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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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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조카가 오전엔 첫사랑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오후엔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는 아르바이트 사장님의 전화를 받았단다. 대학 입학을 앞둔,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에게 인생의 첫 싸다구가 날아온 것이다.

3-4년 전 이맘때, 인생의 모든 어려움이 담합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몰려오던 시절이 있었다. 한 팀이라 믿었던 이들에게서 난데없는 이별 통보를 받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공들여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협력기관의 변심에 원점으로 되돌아갈 상황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적 상황까지 나빠져 사무실을 빼야 하는데 옮겨갈 곳이 없었다. 사랑도 명예도 다 잃고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쌓아온 관계가 결국 이렇게 무너지다니, 함께 논의하며 진행해온 그 많은 것들을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을 수 있다니,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사무실 공간을 얻었다며 행복해했는데 여기마저 떠나야 하다니.... 내가 뭘 그토록 잘못한 걸까. 갑작스레 몰려드는 인생의 강 펀지 앞에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랑과 일, 재정 모두에서 실패했다고 느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일에 진심이고, 돈에 욕심부리지 않은 사람에게 인생이 건네는 중간 성적표가 고작 이런 것인가. 지난 몇 년간 아슬아슬한 파도에 맞설 때도 남을 탓하기보다 나를 돌아보며 걸어왔는데 세상은 그런 모습조차 미련하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다 부질없는 순간이구나. 나는 그냥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실패감만 남은, 인생에서 태양이 완벽히 사라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가족 외에는 마음 둘 곳이 없던 나는 큰 언니와 함께 영주 부모님 댁으로 차를 몰고 내려가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로 최근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전하는데 조수석에 앉아 듣던 언니가 안쓰러웠는지 한마디 내뱉었다. “아주 나쁜 것들이네!” 동생을 아프게 한 이들에게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독한 말이었다. 나의 총체적 실패 앞에서 다른 누구를 원망하는 건 못난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해 차마 억누르고 있던 내게, 언니의 한마디가 총알처럼 시원히 날아와 박혔다. 부드럽게 달리던 자동차가 총알을 맞고 부터 서서히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출구를 찾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맞아 정말, 아주 나쁜 것들이야!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하면 안 되지!”

억누르던 원망이 터져 나오면서 마음을 지키던 둑도 무너졌다. .. 정말 개떡 같은 내 인생. 무얼 얼마나 더 잘해야 이런 상황을 반복하지 않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되지 않던 관계들, 오해를 풀려 할수록 더 깊어지던 불신들, 이별에 따른 비용을 정산하고 나니 남아있는 통장 속 한자리 숫자까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이 상황을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로 풀어내는 게 맞을까.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겸비하면 인생의 파도 같은 건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정말 오는 걸까. 차라리 입을 열어 이런 나쁜 것들!’이라고 뇌까려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될 대로 되라지! 라며 힘을 빼야 하는 건 아닐까.

장대비 같은 눈물이 흘렀다. 나는 정말 바보구나,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문득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 하나가 떠내려 왔다. ‘인생이 너무 견디기 힘들 땐, 자신을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회 차를 기다리라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읽을 땐 뭔가 좀 오그라든다고 느꼈는데 지금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조언처럼 느껴졌다. 눈앞에 놓인 사건 너머를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1인칭 시점에서 빠져나와 인생의 총체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이 되어 나를 바라볼 것, 그리고 다음 회 차를 기대할 것. 다른 선택지가 없던 나는 그 구절을 꽉 붙잡았다.

인상 깊었던 시리즈물을 떠올려보니 정말 시즌 2로 넘어가면서 전혀 새로운 빛깔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게 생각이 났다. 희미한 빛을 따라 시즌 2를 떠올리려니 시즌 1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특별한 반전을 꿈꾸기보다 이번 시즌에 허락된 만큼 울고 웃으며 후련하게 떠나보내면 되지 않을까. 밀도 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일수록 주인공에게 모든 씬을 맡기기보다 다양한 등장인물과 플롯이 유기적으로 펼쳐졌던 것을 생각하니, 지금 상황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참 복잡하고 알 수 없구나, 내가 누린 좋은 삶이 100% 나의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닌 것처럼, 내가 통과하는 힘든 시절도 모두 나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 지금은 그저 엇갈리고, 갈등하고, 깨어지는 시절을 통과할 뿐, 이 모두가 어떤 그림으로 퍼즐을 맞출지는 이후에 알게 될 것이라 믿기로 했다.

그 어떤 노력에도 인생의 태양이 완벽히 사라진 것 같은 날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런 날엔 무엇을 더 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다음 날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안아주면 좋을 것 같다. 실수 없이 잘 해내는 사람이든,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며 울고 있는 사람이든 인생의 새로운 시즌은 예외 없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 매달 13, 23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를 썼고 얼마 전 <모두의 입양>을 출간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가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에 잡히는 디자인으로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213142804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www.guncen4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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