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 내려 마중 나온 나와 출판사 대표님을 보며 활짝 웃는 김초엽 작가를 본 순간 ‘싱그럽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긴 시간 기차를 타고 내려온 사람의 피곤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음을 머금은 미소였다. 덩달아 나도 환하게 웃으며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눌 겨를 도 없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지연되면서 안내되었던 시간보다 10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길어진 기다린 만큼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 탓일까, 시작 시간보다 일찍 와서 기다림을 자처한 독자들은 계단을 오르는 작가를 큰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그녀는 서점을 둘러 볼 겨를도 없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고, 가방에서 사인전용 펜을 빠르게 꺼냈다. 나는 시작 1시간 전부터 기다렸던 첫 번째 독자를 자리로 안내하면서 사인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표님, 김초엽 작가님 사인회 한 번 하시겠어요?”
이번 사인회는 퍼블리온 출판사 박선영 대표님의 제안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지난 6월부터 인제대학교 산학협력단과 함께 <아침에 듣는 경남 CEO 북클럽>을 운영 중인데, 퍼블리온 출판사에서 펴낸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의 『리더의 각성』을 7월 주제도서로 선정했다. 참가자에게 나눠 줄 책 50권을 준비해야 했고 직거래가 가능한지 메일로 문의드렸다. ‘가능하다’라는 회신은 피보다 진하다는 ‘계산서’를 발행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새로 생긴 거래처 대표님과 메일을 통해 ‘책’을 다루는 업자로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조만간 부산에 오실 일이 있으시다며 서점에 들르겠다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긴 시간 출판업계에 함께 몸담고 있으신 여러 대표님과 크레타를 찾아주셨다.
어떻게 서점을 열게 되었는지, 부산의 서점들은 어떤 분위기인지, 곧 개최될 북페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어떤지 등 책으로 연결되는 여러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30년 넘게 출판업계에 몸담으며 일반 사원에서 대표까지 역임한, 누구보다 출판산업에 대한 식견이 높은 이가, 고작 창업 1년 차의 작은 동네서점 책방지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업(業)’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일까, 누군가의 말과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을 오래 해오셨기 때문일까, 자연스러운 질문에 무장해제가 되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신이 나서 마구 쏟아내고 말았다. 하지만 짧은 만남을 마친 뒤 홀로 남게 되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았다.’라는 수치스러운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이런 나의 모습을 좋게 보셨을까, 아니면 크레타가 가진 공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셨을까, 2주 뒤 박선영 대표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대표님 9월에 부산에서 김초엽 작가님 북토크 할 예정인데요, 북토크 전에 크레타에서 사인회 하면 어떨까요? 일정은 아직 안 나왔지만, 크레타 생각이 나서요.”
믿기지 않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1년 된 작은 동네서점이 김영하 작가의 게릴라 사인회, 손웅정 감독의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출간 기념 사인회를 진행한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제안을 받는다는 것이 감사했지만, 이렇게 좋은 일들이 계속 생기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과 작가, 그리고 독자가 만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고자 여러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북토크를 진행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건들은 내가 한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는 과분했기 때문이다.
‘횡재’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연이어 발생한 횡재를 생각하니, 앞으로 써야 할 운을 지금 다 끌어다 쓰는 것 같은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능력과 노력 이상의 것을 탐할 때면 언제나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타 생각이 나서요’라는 선한 마음을 외면할 이유는 없었고, 앞으로 지역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해달라는 응원의 마음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저야 완전 영광이죠!! 감사합니다!! 벌써 설렙니다.” 그렇게 날짜는 10월 17일(목) 오후 5시로 잡혔다. 평일 오후라 몇 명이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출판사 대표님과 작가님이 애써 잡아주신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고, 사인회의 성패는 내 노력에 맡겨졌다.
지난 두 번의 사인회를 경험하면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몇 명이 올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사인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지만,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애써 마련한 자리가 무색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사전결제를 할 수 있게 준비했고, 시간이 맞지 않아 직접 올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배송 서비스도 마련했다. 온라인 홍보도 중요하지만, 오프라인 홍보 역시 놓칠 수 없었다. 관계 맺고 있는 거점 공간과 카페를 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센텀시티, 시청, 부산대, 남포동 등을 돌아다니며 포스터도 직접 붙이러 다녔다. 포스터를 붙이면서도 ‘이걸 보고 몇 명이나 오실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농부가 씨 뿌리는 마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내면의 불안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움츠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인회는 5시 시작이었지만 4시부터 한 분씩 도착하며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반차를 쓰고 오신 분도 있었고, 아끼는 친구를 대신해서 온 사람도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중학생도 있었으며, 김해, 울산에서 소식을 듣고 온 사람도 있었다. 사인을 받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처음 보는 관계였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같다는 공통점 덕분에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었고,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고자 벽에 붙여 둔 김초엽 작가의 책 속 대표문장들을 유심히 읽어보는 이들도 있었으며, 계단에 걸터앉아 열심히 밑줄 쳐가며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골목 모퉁이에 있는 건물의 계단은 책과 작가에 대한 애정이 어린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긴 시간 기다림을 견뎌내고 사인을 받기 위해 작가 옆에 앉은 이의 얼굴엔 설렘과 긴장, 기쁨과 환희가 동시에 묻어난다. 사인을 받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그녀의 책이 본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공감이 되었는지 감사를 전하거나, 말로 전하기 힘든 이야기를 직접 손편지로 적어 와 건네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사인하는 모습만 빤히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창작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핸드폰 케이스를 건네며 ‘혹시 여기도 가능한가요?’ 묻는 사람도 있었다. 김초엽 작가는 그 어떤 질문과 요구에도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응했다. 특히 그녀의 모든 책을 챙겨와 사인받은 50대 남성 독자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어떻게 그녀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어떤 이유로 그녀의 글을 계속해서 읽게 되었는지 조곤조곤 전하는 그의 모습은, 경계를 허물고 세대를 아우르는 문학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 바삐 서두른 탓일까, 사진을 찍은 뒤 떠나는 그의 셔츠는 땀에 가득 젖어있었다.
1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사인을 해주신 덕분에 찾아주신 모든 독자와 배송 요청한 분들의 책까지 모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떠나야 했던 그녀는 “서점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바로 가야 해요.”라며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출판사 대표님도 “독자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책을 계속 내야 할 이유와 힘이 나는 것 같다.”라며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준 나와 스태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번 사인회를 통해 93권의 책을 판매했으며, 135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약 30만원 정도의 수익이 남겠지만, 참가자에게 기념선물로 찍어드린 즉석 사진 필름 값과, 부끄럽지만 스태프에게 일당 대신 지급한 책, 포스터 인쇄비와 직접 붙이러 다녔던 하루를 계산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채 10만원도 되지 않는다. 이는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는 교통비와 숙박비를 생각하면 수익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 이익만 생각한다면 사인회와 북토크 같은 행사는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전국의 다양한 동네서점에서는 작가와의 만남, 사인회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독서율은 바닥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추락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검은색 글자를 한자씩 따라 읽어나가는 이가 존재한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치거나, 책 끝을 조심스레 접거나, 색색 띠지를 붙이면서 그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해 애쓰면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노동 중 하나가 글쓰기일지도 모른다. 이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7시간 동안 헤매고 있으며, 지금도 결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발행을 하더라도 특별한 이익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글을 쓰는 작가 모두가 별다른 보수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 번의 사인회를 진행하면서 ‘돈이 되지 않는 것을 열심히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가도, 출판사도, 서점도 이런 행사 한 번 하는 것이 들인 수고에 비해 큰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을 뻔히 아는 데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을 만나러 전국을 다닌다. 깊은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을 찾아가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그 길을 따라가면 조심스레, 고심하여 내보인 나의 한 시절을 누구보다 귀하게 생각해주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이 나와 내 글의 존재 이유이자,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야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말보다 더 무거운 글의 책임감을 아는 사람들이 세상에 더욱 늘어날 때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서점의 역할은 글의 책임감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매력적인 작가들이 애써 크레타를 찾아주는 이유도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서점이 되어 달라는 응원과 당부의 메시지라 생각한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크레타와 함께해준 작가들이 보내 준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키워 가려 한다. 서점이 힘든 이유는 책과 닮아서인 것 같다.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 구조처럼, 빠른 성과와 결말을 기대하면 안 되는 장기 레이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는 시간이다. 수많은 작가와 독자의 응원에 힘입어 쓰고 있는 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 결코 쉽진 않지만,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꼭 읽어보고 싶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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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842
대표님~~ 여기서 또 만나니 너무 반갑습니다. 김성희 입니다 몇 달 전 우연히 구독하고 있는데, 매일 읽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오늘 우연히 제목에서 이름을 보고 혹시,, 역시였네요. 크레타와 함께 삶이 성숙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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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U
인연이라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인분이 크레타에서 1일책방지기를 하셔서 크레타라는 공간을 알게되었고, 최근 세상의 모든 문화를 구독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글로 다시 만나게 되니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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