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존재
초등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영락없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다. 사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아려온다. 하루는 수업 중에 두 아이가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서로 의자를 들고 싸우는 형국을 만들었다. 초등 2학년,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었는데 평소 짝꿍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수업하다가 보면 아이들의 연약한 살이 종이에 베이는 경우가 있다. 밴드가 있을 땐 붙여 주지만 그렇지 않은 때엔 친구와 함께 보건실에 다녀오라고 보낸다.
의자를 들고 싸우는 경우는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두 아이를 크게 나무랐다. 왜 의자를 들고 싸우고 있었느냐. 둘 중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의 여러 이유를 물었다. 아이들은 서로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곤 의자를 내려놓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이어서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들이 서로 잘못해 다치기라도 하면 그 모든 책임은 선생님에게 돌아온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엔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주의를 주겠다고 했다. 둘 중 한 아이가 수업 후에 따라오더니 엄마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 달라며 다시는 하지 않겠단다. 작년까지만 해도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하고 흥미로워하던 친구였다. 올해 들어 수업 시간에 엎드려서 간식을 먹는다는가 옆 친구와 계속해서 장난을 치거나 수업이 끝나도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다음 수업에 늦을 때도 있었다.
작은 체구라 크로스로 걸친 태권도 가방이 유난히 커 보이던 아이. 아이는 연신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니 정말 감사하다며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이가 내미는 작은 손가락과 함께 세상 근심 없는 표정으로 날려주는 귀여운 웃음 때문인지 나도 그만 웃어버렸다. 아이들은 내가 엄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엄마 모드로 바뀌고야 만다. 엄마 모드. 사실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 수업에 애정을 갖기 힘들다. 큰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나 순수한 그 눈빛들을 그대로 두고 싶다. 아이들과 수업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늘 녹초가 되지만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아이들에게서 치유 받곤 한다. 그건 마치 새벽녘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온갖 새소리와 같달까. 아침나절 틀어두는 명상음악 같달까.
아이를 위한 닭볶음탕
병 주고 약 준 아이들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녁 걱정을 한다. 우리 아이에게 쏟을 에너지는 이미 소진된 상태다. 그렇게 방전된 상태로 어제 미리 주문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인삼 두 뿌리를 다듬었다. 냉장고 안쪽 맨 아래 칸에 넣어 둔 양파 하나를 꺼내 황갈색 껍질을 벗겨 물에 헹궈내고 반으로 잘랐다. 깊이감이 있는 4인용 냄비에 손질한 인삼 뿌리와 양파를 넣고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카누 커피 미니 마일드 로스트 한 봉 중 절반을 넣었다. 한번 끓여 낸 닭고기를 건져 아이가 평소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만들었다. 며칠 고열이 있고 한 달 내 기침을 달았던 아이가 한약을 먹기 시작했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뒤돌아서면 배고프던 아이였는데 아픈 후로는 입이 짧아졌다. 평소 먹던 절반도 먹질 않게 되었다. 아이가 아플 땐, 평소보다 잘 챙겨야 하는데 방전된 내 체력 탓에 겨우겨우 해낸다.
쇼펜하우어와 행복
아이 저녁 차려 주고 공부하는 시간에 잠시 눕는다는 것이 2시간을 자버렸다. 그러고도 잠이 달아나지 않아 침대 옆에 놓아둔 쇼펜하우어 책을 펼쳤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난 자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시원한 바람과 잔잔한 햇살이 창문 가득 들어오던 저녁, 피곤한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책을 펼쳤는데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와 가정에서 종종걸음이던 날. 쇼펜하우어 덕분에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줄 요량으로 미리 네모 모양으로 잘라둔 수박을 통에서 꺼내 접시에 담았다. 작은 포크와 함께 아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엄마, 수박이 진짜 달아. 완전 시원해.”
엄마들은 자기 몸이 변하는 줄도 모르고 배 속 아이를 먼저 챙긴다. 내가 학교에서 만난 그 작은 아이들 역시 엄마로부터 사랑받아 태어난 아이들이다. 고단한 하루라도 챙겨줄 수 있는 내 아이가 있고 혼나고서도 작은 손가락 내밀고 웃음 짓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독서로 잠깐의 여가 시간을 누리며 다시금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루는 그렇게 행운과 행복이 수시로 반복되며 쌓여 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매일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글쓴이 김상래
융합예술 연구센터 <아틀리에 드 까뮤> 대표, 인문·예술 커뮤니티 <살롱 드 까뮤>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도서관 <상상예술관> 칼럼니스트로 미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 문화·예술 관련 지식을 나누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여러 권의 미술 서적을 집필 중이며,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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