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색, 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지난 호에 발간한 글에 이은 '2편'입니다. 1편 글의 링크는 글 하단에 있습니다.
왕치아즈(탕웨이)는 광위민(왕리홍)을 따라 저항군 간부인 우 영감(탁종화)을 찾아간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것은, 발각될 경우 편하게 자살하기 위해 먹는 독약. 그녀는 말없이 받아든다.
나는 이 순간, 주저 않고 다시 임무를 맡겠다 말하는 왕치아즈의 마음이 궁금하다. 애국심인지, 이(양조위)에 대한 끌림인지, 마치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인지. 그녀의 진심은 무엇일까? 좋은 영화들은 작품 한켠에 남겨진 공백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왕치아즈가 임무에 돌입하기 전 아빠에게 쓴 편지를 붙여달라고 우 영감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우 영감은 편지를 몰래 태워버린다. 그는 입으로는 거대한 대의를 말하지만, 눈 앞의 한 인간을 수단 이상으로 보지 못한다. 진동하는 파국의 냄새. 왕치아즈는 아마 이 집단에서도 마음을 뿌리내리지 못할 것 같다.
이의 집. 예전처럼 마작을 두는 테이블 앞에서, 왕치아즈와 이가 다시 재회한다. 이는 왕치아즈의 기척을 눈치채고, 2층으로 가려던 걸음을 돌려 거실로 들어가, 다시 만난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한다. 이 일련의 동선이 참 낭만적이다. 마치 헤어진 연인이 재회한 듯한 분위기. 이는 그녀를 보고 작게 웃음지으며 "남편은 어때요?", "사업은 잘되나요?" 사무적인 질문을 던진다. 늘 경직된 환경에서 살아 온 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인사다.
왕치아즈가 묵는 방에 이가 잠시 들어간다. "장관님을 위한 선물을 못가져왔다"는 그녀에게 이는 "당신이 와준 게 선물이오"라며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다정한 말을 덤덤하게 눌러 말하는 양조위의 연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어느 비오는 날, 왕치아즈는 이의 초대를 받아 호텔에 도착한다. 밀회가 시작되는 순간. 곧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호텔 방에서 비오는 창을 바라보고 있던 왕치아즈. 문득 뒤를 돌았보니 어느새 이가 방에 도착해 있다. 이때 나무 의자에 고고하게 앉아 아무말 없이 왕치아즈를 바라보는 이.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심, 치밀어오르는 욕망과 절제가 뒤섞여 있다. 복합적인 정서를 내뿜으며 한 치의 움직임 없이 긴장감을 주조하는 양조위의 연기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이 순간 왕치아즈가 다가와, 이의 담배를 끄고 그를 진정시키며 상황을 주도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난폭하게 관계(라기보다 폭행)를 합니다. 이는 관계 중에 눈을 마주치려는 왕치아즈를 보고, 그녀의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는 얼굴을 마주보는 애정어린 관계에 익숙하지 않다.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왕차이즈가 자신의 임무를 성공하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지옥을 견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이후 자신의 저택에서 다시 마주친 왕치아즈를 흘긋거리는 이의 모습이 재밌다.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왕치아즈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짐짓 화난 연기를 한다. 동요하는 이. 왕치아즈는 말한다. 3년 전에 말도 없이 출장을 간 이를 증오한다고. 그하지만 사실 이것은 절절한 애정고백이고,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이는 그녀를 끌어안습니다. 육체적 부딪힘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가 정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이후의 관계에서 이는 왕차이즈를 똑바로 대면한다. 그녀의 고개를 폭력적으로 돌려버리던 예전과 다른 모습.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길을 능숙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끌림과 의심, 두려움과 안도. 마침내 들끓는 사랑까지 그 모든 감정을 담아내는 이 장면은 놀랍다. 노출한 와중에 이런 감정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열연은 눈물겹다. 양조위도 그렇거니와, 어린 나이에 이런 파격을 감행한 탕웨이는 그녀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열연에 대해 찬사받아 마땅하다.
왕치아즈의 동료들은 급습을 당해 잡혀가고, 그녀 역시 자신의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선배 광위민은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장담하지만, 과연 이 약속이 이뤄질 수 있을까.
다시 이를 만난 왕치아즈는 '며칠 내내 당신만 기다렸다, 당신이 다른 여자를 만날까 봐 밤에 잠도 안 온다'며 울먹인다. 이제 그녀의 말은 연기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단계다.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이는 자신이 저항군 멤버를 어떻게 고문하고 죽였는지 설명하며 왕차이즈를 애무합니다. 그녀는 괴로워하며, 마치 압도되듯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병적인 관계에 빠져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슬아슬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잔혹한 운명 앞에 놓인 유일한 동지다. 이제 이는 왕차이즈와 관계하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본다. 울먹이는 왕차이즈의 표정에서, 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는 것이 느껴진다.
중요한 장면이 있다. 우 영감은 왕치아즈에게 '요원에게 필요한 건 충성심'이라며 계속 이를 사로잡으라고 말합니다. 그 무책임한 말 앞에서, 왕치아즈는 "사로잡히는 것은 나"라며 그가 뱀처럼 자신을 파고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고싶어하지 않는 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우 영감은 닥치라며 소리지른다. 슬픈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광위민도 자리를 뜬다. 지금 이 자리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는 이는 없다. 정치적으로 가까운 것은 저항군이지만, 그녀가 느끼는 고통에 가까운 것은 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 영화에서 가장 서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왕치아즈는 이와 만나기 위해 요정에 간다. 그곳에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외로워 보이는 이가 있다. 요정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노래가 듣기 싫다는 이. 왕치아즈는 그를 위해 자신만의 노래를 부른다. 소년과 소녀가 등장하는 순수한 가사의 노래. 거기에는 이와 왕치아즈로부터 가장 먼 세계, 그러나 함께 도착하고 싶어하는 세계가 있다. 처음에는 재밌어 하며 노래를 듣던 이는 점점 그녀의 노래에 빠져든다.
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
이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지더니, 어느새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의 감정선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노래 한 곡조에 이렇게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지만, 두 배우는 그것을 기어코 가능하게 만든다. 탕웨이의 또렷한 눈빛과, 그녀의 목소리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모두 내려 놓는 양조위의 표정이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다.
# 다음 호에 <색, 계>에 대한 마지막 글이 게재됩니다.
# 이전 글 링크 https://maily.so/allculture/posts/f8918e92
[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 홍수정 영화평론가와 함께 하는 '영화 모임' ※
나는 너를 왜 사랑했을까 - 영화와 함께 예전 연애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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