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곳 캘리포니아 도헤니 주립 해변의 라인업은 이른 아침부터 서퍼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요 몇 주째 좋은 파도가 예고되어 있거든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도헤니에서 파도를 타고 온 참입니다. 이렇게 파도가 좋은 날 바다에 가면 라인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바다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오늘은 높이가 1m 쯤 되는 초보에게 이상적인 파도가 많이 왔는데, 오늘따라 저의 체력이 모자라 많이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저께 서핑을 갔을 때 쓴 체력이 아직도 덜 회복된 탓인지, 패들링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고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더라고요. 좋은 파도를 눈앞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그 심정은 서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어쩌다가 간신히 좋은 타이밍에 파도를 잡아도, 파도가 클로즈아웃 되거나 균형을 잃어 넘어지게 되면 적잖이 속이 쓰립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정말 간절할 때는 천지신명부터 하나님, 부처님까지 다 찾는다는 말이 있죠? 파도가 정말 간절할 때도 그럴 지 모릅니다. 저도 오늘 떨어져가는 저의 체력을 느끼며 초조하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습니다. "신이시여, 좋은 파도 딱 하나만 잡게 해주세요!"
참, 파도를 잡는 데도 규칙이 있다는 사실이 아시나요? 저의 글을 보고 서핑을 시작하셨다면 이제 슬슬 라인업에 나가서 그린웨이브 잡기를 시도할 때가 되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파도를 잡는 규칙에 대해 이야기할 좋은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
교차로에서 직진하는 차가 우선권을 가지는 것처럼, 서핑에도 지켜야 할 기본 수칙이 있습니다. 파도의 깨지지 않은 면을 따라가며 타는 사이드라이딩을 하게 되면, 같은 파도를 잡은 서퍼는 서로 만나 부딪히게 될 확률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핑에는 일반적으로 한 파도에는 한 명만이 탈 수 있다는 수칙이 있습니다 (양쪽으로 길이 나는 에이프레임A-Frame 파도의 경우에는 두 명까지 가능합니다).
위 사진과 같은 상황에서, 2번 서퍼가 파도를 잡게 되면 먼저 파도를 잡아 나아가던 1번 서퍼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핑에서는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인 피크 가까이에서 먼저 파도를 잡은 서퍼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위 상황에서는 2번 서퍼가 1번 서퍼를 발견하면 즉시 패들링을 멈추고 1번 서퍼를 지나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파도를 잡아 우선권을 가진 서퍼의 진로를 막는 행위를 드랍drop 이라고 합니다.
드랍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입니다. 파도가 얌전해서 초보가 많은 도헤니 같은 해변에서는 드랍이 발생해도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중급 이상의 서퍼들이 찾는 해변의 경우 드랍 같은 행위가 싸움으로 번질 때도 많습니다. 드랍은 비매너 행위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로컬 서퍼들의 텃세가 심한 해변에서는 드랍을 한 외지인의 보드를 부숴 버린다는 괴담도 종종 들립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던 파도를 잡았는데 누군가 앞에서 드랍하여 내 길을 막는다면, 충분히 화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위험하지 않고, 상대가 초보라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도를 잡기에도 벅찬 초보가 급박한 상황에서 주변까지 살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거든요. 서핑이 좋은 만큼 파도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할 수 있습니다만, 누구나 처음엔 초보이고, 좋은 파도는 기다리면 다시 올 테니까요. 😊
이렇게 규칙이 필요할 만큼, 무한정 주어지는 것 같은 파도도 귀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서핑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겨울에 한국을 방문했었는데요, 겨울 서핑이 궁금해 12월에 양양 물치해변에서 서핑을 시도해봤습니다. 우리나라 동해안은 겨울에 더 좋은 파도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후드가 달린 두꺼운 웻수트를 입고, 서핑 신발과 장갑을 끼고 물에 들어가니 의외로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고스란히 노출된 얼굴이었는데요, 파도가 얼굴을 때린 후 바람을 맞으니 얼굴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 그럼에도 라인업에는 서핑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파도는 서퍼들로 하여금 영하의 추위를 견디게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는 말 그대로 파도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100피트 파도 서핑>은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00피트는 미터로 환산하면 33미터인데요, 고층 빌딩에 맞먹는 높이입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서퍼들은 100피트짜리 파도를 타기 위해 전세계에서 팀을 모으고, 훈련하고, 죽음을 무릅씁니다. 수십 미터의 파도 위에서 점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려오는 광경은 TV화면으로 봐도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듭니다.
대체 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파도를 타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걸까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거대 파도 서핑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100피트 파도 서핑>의 주인공 개럿 맥나마라는, 치명적인 부상과 수술 뒤에도 재활과 훈련을 거듭하여 100피트 파도에 도전합니다. 거대 파도를 타기에 충분한 속력을 내기 위한 제트스키와, 상황을 무전으로 관제하는 관제사가 필요한 이 활동을 과연 서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뜻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서핑은 자연에 순응하는 영적인 활동이자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핑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으면, 거대 파도 서핑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서 에베레스트 등반가같은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등산가 조지 말로리의 말처럼, 거대 파도가 있기에 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명일까요, 집착일까요? 가족을 뒤로 한 채 집채만한 파도에 맞서기 위해 바다로 나서는 진짜 이유는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럿 맥나마라를 선두로 거대 파도 서핑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 또한 '빅 웨이브 서핑'이라는 대회 스포츠가 되었습니다. 스포츠로서의 서핑에서는, 남들보다 더 큰 파도를 더 많이, 더 잘 타야 합니다. 영적인 운동인 서핑조차도 여느 운동처럼 경쟁 스포츠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스포츠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나 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즐기는 마음과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아직 초보일 뿐이지만, 언젠가 파도를 더 잘 타게 되더라도, 처음 화이트워터를 탔을 때 느꼈던 기적과도 같은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확률을 뚫고 세상에 나와 내가 탄 파도만이 존재하는,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기분, 그 순수한 순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나보다 늦게 서핑을 시작한 사람이 나보다 파도를 잘 타게 되더라도 조급해지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느낀 이와 같은 마음을, 번잡한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간직하며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서핑은 어떤 활동인가요? 🌊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게임회사에 다니며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서핑을 시작한 지는 2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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