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피식'_그림책을 보다가_우선영

2022.09.25 | 조회 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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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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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다르다. 해가 꼭대기에 있는 시간에도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 쌀쌀함이 느껴진다. 아, 가을이구나. 농부가 작물을 수확하고, 수험생들은 다가올 시험에 박차를 가하는 그런 계절.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이 가을이 초조하다. 

올 해 초부터 지역아동센터에서 그림책으로 아이들을 만나오고 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봄의 기운이 어느새 많이 사그라졌다. 생각했던 것만큼 수업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림책이라는 매체의 힘을 믿고 자신만만했는데, 나이도 상황도 제각각인 아이들을 살피는 일이 쉽지 않다.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만 같다. 모두를 만족 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단 한 명의 관객만 있어도 노래를 부르겠다는 가수처럼 눈을 반짝이는 학생을 보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대다수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참 어렵다. 나를 위로하던 그림책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다음 수업을 준비하기 바쁜 어느 날, 멍하고 앉아있는데 내 시야에 한 권의 그림책이 들어왔다. ‘뭐로 하지?’ 라는 나의 생각을 놀리는 것처럼 제목이 눈앞에 둥둥 떠서 다가온다. 이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었다. ‘모모모모모’ 조그맣게 소리 내어 보다가 홀린 듯이 책을 꺼내 한 장 한 장 따라 읽었다. 제목처럼 짧은 단어의 반복이 익살스러운 그림과 함께 이어진다.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피식’

 마음 속 어딘가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피시식 같이 쓸려 나갔다. '모모모모모'라는 그림책에는 ‘모내기’로 시작하는 농부의 계절이 담겨 있다. 모를 심고, ‘피뽑피뽑피’ 피뽑기를 한다. ‘벼벼벼벼벼’라는 글자가 ‘뚀뚀뚀뚀뚀’로 보이고 ‘뼈뼈뼈뼈뼈’가 되어 가는 과정이 농부의 표정과 함께 기발하게 표현되어 있다.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서 탈곡을 마치면 드디어 한 그릇의 하얀 쌀밥을 만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과정들이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가장 힘들어 보이는 순간에 보이는 유머러스한 그림과 재미있게 형상화한 단어들 덕분일 것이다. 마음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무언가를 더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수많은 동기를 찾고 목표를 세워보기도 한다. 자꾸 채우려는 마음과 달리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는데 살짝 삐져나온 웃음이 내 마음 속 빗장을 풀게 했다.

 한 번 들어앉은 긍정의 기운이 또 다른 책으로도 이어졌다. ‘괜찮아 아저씨’를 읽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고양이 피터 난 좋아 내 하얀 운동화’를 읽으며 아예 노래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줄어드는 일은 무척 슬프지만, ‘괜찮아 아저씨’는 어느 순간에도 우울해 하는 법이 없다. 열 개의 머리카락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괜찮은 이유를 발견하는 아저씨의 시선이 재미있다. 책을 덮고 나면 입에 붙은 ‘괜찮아’라는 말이 나를 든든하게 해준다. ‘고양이 피터 난 좋아 내 하얀 운동화’라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운동화를 좋아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하얀 운동화가 뜻하지 않은 상황에 여러 색으로 변해가지만 고양이는 낙심하는 법이 없다. 도도하고 매력적인 고양이를 따라 걷다 보면 내 발걸음도 한껏 당당해지는 듯하다.

 그림책을 조금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면 조금 과하게 감정을 넣어 읽는 것이다. 읽어줄 대상이 없어도 괜찮다. 나를 위해 읽는 시간이 색다른 재미를 안겨줄 테니 말이다. 과장된 소리에 추임새를 더하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반복되는 단어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웃음 가득한 아저씨의 표정을 따라해 보기도 하고, 고양이의 걸음을 흉내 내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재현해 보자. 현타가 밀려올 수 있지만, 세게 밀려온 만큼 신선한 웃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음만 달리하면 똑같은 것도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지긋지긋했던 건 그림책이 아니라 먹구름 가득했던 내 마음이었다. 작은 웃음 덕분에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농부가 농사를 짓듯 나를 살피고, 어떤 순간에도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고양이처럼 당당하게 걸어가고 싶어졌다. 나아진 마음만큼 나아질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가득한 햇살을 기다리느라 많은 시간을 암흑 속에서 보내지 말자. 살며시 내려앉는 햇살로도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먹구름도 서서히 자리를 비켜줄 것이다.

글 속에 등장한 그림책
글 속에 등장한 그림책

< 모모모모모 /  밤코, 향 >

< 괜찮아 아저씨 / 김경희 글.그림, 비룡소 >

< 고양이 피터 난 좋아 내 하얀 운동화 / 에릭 리트윈 글, 제임스 딘 그림, 이진경 옮김, 상상의힘 >

 

* 매달 25일 '그림책을 보다가'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림책으로 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나 일상의 깨달음을 적어보려 합니다. 제 글과 만나는 시간이 여러분의 삶에 작은 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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