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편이다. 시간을 들여, 꾸준히, 묵묵하게 해야 하는 일에서 거의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일정 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에는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다. 특히나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면 얼마나 공들여 세웠던 계획이라 해도 ‘누군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 다음으로 미뤄버린다. 그렇다고 내가 게으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가족, 동료, 심지어 SNS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나는 늘 ‘바쁜 사람’이다.
하루 24시간을,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 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씻으러 가는 순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는 순간, 집을 나서서 사무실에 도착하는 시간, 사무실에서 앉아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순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 어느 하나라도 그냥 흘려보내면 안될 것처럼 살아본 적이 있었다. 외근을 나가면서 서류 더미를 들고 가기도 했고, 출장용 가방을 싸며 한켠에 운동복과 운동화를 꼭 챙기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사회적 의무를 다했다. 스케줄러를 열어 빈 공간을 발견하면 그 자리를 무엇으로라도 채웠다.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어딘가에 가 본다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사러 간다거나. 그렇게 며칠 전의 나, 어제의 나, 오늘 아침의 나에게 부여받은 업무들을 하나하나 완수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 나 오늘 하루도 참 잘 살았구나.” 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곤 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시간 계획을 아무리 촘촘하게 짜도, 24시간을 ‘꽉 채우는 ‘투두 리스트’를 작성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 이후로도 한참동안 할 수 없는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방법을 찾지 못한 것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조금 더 좋은 시간관리 스케줄러를 쓰면, 더 많은 리마인더를 마련하면, 짜투리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꺼리’를 챙겨서 집 밖으로 나가면,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틀렸다. 어떤 업무를 완수할 때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데 드는 나의 ‘에너지’도 중요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완벽히 준비된 타인의 도움을 ‘즉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아 들어가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깔끔한 하루를 매일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건, 분명 나의 착각이었다. 그럼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완벽한 하루의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를 미워했다.
나의 분노는 시도때도 없이 아무에게나 향했다. 알람이 울렸을 때 벌떡 일어나지 못한 나 자신일 때도 있었고, 사전 예고없이 불쑥 찾아와 사무실에 자리 잡고 앉아 ‘라떼 타령’과 ‘호구 조사’를 시전하는 ‘윗사람의 윗사람의 예전 동료’ 일 때도 있었다. 아침에 보낼 땐 멀쩡했는데 열이 펄펄난다고, 일찍 와서 데려가 줄 수 있냐는 어린이집이나 학교의 전화를 받을 때면 ‘내가 어떤 사인을 놓쳤던 걸까’ 하고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에서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경로를 검색하고,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병원이 어디였더라, 중얼거렸다. 내일까지 안하면 안될 것 같은 일들을 누군가에게 읍소하듯 신신당부하며 부탁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살고 있었다.
빡빡히 준비한 하루에 구멍이 나버리면, 더 꼼꼼하게 계산하고 대비하지 못한 나의 부주의함을 탓해야 하는것일까, 아니면 불쑥 내 하루에 던져진, ‘초대받지 않은’ 일들을 맞이하고 처리하느라 야속하게 가버린 시간 탓을 해야 하는것일까, 아니면, 깜냥도 안되면서 이것 저것 하고 싶어하는 나의 욕심을 탓해야 하는걸까, 그렇게 고민에 빠져들다가 이런 생산성 없는 생각 따위를 하는 나의 뇌가 문제라며, 즉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하곤 했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내가 놀지는 않았잖아?’ 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시간을 촘촘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항복 선언을 하고 나서는 정량적인 목표를 세우고, Done list를 채워나가는 데 빠져들었다. 쌓여가는 ‘완료 목록’을 보니 뿌듯해졌다. 언제건 좋으니 ‘하기만 하면 되지’ 라는 마음을 갖고 살게 되니, 핑계가 줄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처리해야 할 때도 이전만큼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엄두도 못냈던 일들을 잘게 잘라 시작하게 되었다. 의지박약을 탓하지 않기 위해 뜻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보였다. 챌린지 모임에 ‘가입 신청’ 버튼을 누르고, 서로를 격려하며, ‘부족한 오늘의 나’를 미워하지 말자고, 나를, 우리를 다독였다.
예전보다는 부담이 확실히 줄었는데,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성과는 늘었다. 무언가 해내는 일이 늘어간다는 것은, ‘낭비 하지 않음’과는 또 다른 차원의 뿌듯함을 가져다 주었다. 작게 해낸 일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고, 포기하지 않고 매달려서 어떻게든 완수해내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기로 했다. “뭐 하느라 그리 바쁜건데?” 라 묻는 사람들에게 구차하게 들릴 수 있는, TMI 설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결과물을 슬쩍 내놓으며 “어쩌다 보니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네.” 라며 겸손함으로 한껏 포장한 자랑을 하곤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내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꽉 차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껏 차올랐던 자신감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마음이 ‘지금 ,여기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도 얼른 다 읽고 인증해야지, 기껏 산책을 나가서도 ‘빨리 목적지를 찍고 집에 와서 밀린 빨래를 해야지.’ 하루를 마무리 하며 ‘빨리 자고 내일은 상쾌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등등 수많은 ‘해야지’ 목록을 ‘해치우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무언가 중요한 걸 빠뜨리고 있는 것만 같다.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How to do nothing)>에서 제니 오델은 미국의 소설가 David Foster Wallace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내 앞에 주어진 상황과 내게 기대되는 행동보다, 어쩌면 ‘내 앞에 펼쳐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주의를 기울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과거의 나에게 화를 내고,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 하는 대신, ‘지금 여기’의 나에게 조금 더 많은 선택권을 쥐어주는 것은, 나의 하루에 한 시간을 더해주지는 않지만, 내 체력에 호랑이 기운을 더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으로, 빚진 기분으로 사는 것에서 벗어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이 달의 마감’을 마쳤으니, 잠깐의 뿌듯함을 느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것들, 건조를 마친 빨래, 얼마 남지 않은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 새로 시작한 드라마 시리즈 중 “무엇”을 선택해야, 이 주말이 꽉 찬 시간으로 기억될 것인지, 주의와 의지를 기울여 심오한 결정을 내려봐야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황진영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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