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친구가 사라졌다.
고립된 청년이 집에서 주로 하는 활동은 주로 인터넷 사용(59.1%)이다. 반면에 서울시 청년의 평균은 TV 시청, 음악 듣기, 책 읽기, 실내 운동 등 고립 청년에 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고립과 은둔 청년이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로 하는 일에는 동영상 보기가 많지만, 서울시 청년 평균은 SNS로 누군가와 대화 나누는 것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단지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곱씹어 보면 내가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침착맨이라는 유튜버의 라이브 방송을 켜는 것이다.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적막함이 싫어서 음악을 틀었다. 하지만 빌라라는 협소한 공간에서는 소음 문제로 인해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없고, 따라 부르는 것도 옆 집에 민폐가 된다. 청년 1인 가구 주거형태 중 원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대안은 라이브 방송이었다. 편집된 영상은 말의 속도도 빠르고, 텐션 높은 부분만을 모아놓은 장면이 많고, 자극적이다.
하지만 라이브 방송은 달랐다. 침착맨은 말이 느린 데다, 낮은 텐션으로 방송을 하고, 친구가 옆에서 재잘거리는 느낌이 난다. 심지어 라이브 방송은 실제 친구보다 좋은 점이 있다. 라이브 방송은 내가 원할 때마다 볼 수 있고, 듣고 싶은 내용만 골라 들을 수 있고,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꼭 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 실재하는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반해, 온라인 친구의 이야기에는 잠깐만 손가락을 움직이면 된다. 그저 '좋아요.' 단추를 누르는 것으로 끝이다. 그렇게 실재하는 친구보다 온라인 친구가 편해지고, 고립되어 간다.
이것은 단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유행의 시작과 방송시장 규모로도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영 방송의 시청률 하락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반면에 인터넷 방송이나 다른 스트리밍 시장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네이버에서 새롭게 시작한 '치지직'이라는 스트리밍 방송에 소위 연예인이 채널을 만들고 개인 방송하는 것이 흔해졌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고립 청년으로 산다는 건
내가 연말이나 연초에 꼭 하는 것이 있다. 핸드폰에 등록되어 있는 연락처를 삭제하거나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상대와 카톡이나 연락을 주고받았는 가?'이다. 업무 때문에 연락처를 지울 수 없는 사람은 꼭 카톡에서라도 숨김 처리를 한다. 그 결과로 단 13명이 남았다. 만약에 가족을 제외하면 11명이다. 그럴 일 없지만, 축구를 한다고 가정해 보면 후반전에 교체 조차 할 수 없는 숫자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2022년 진행된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실태조사'의 물리적 고립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친한 친구나 친한 사람과 대면 교류나 이외 직장, 학교,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과의 대면교류가 1년에 두 번 이하 또는 전혀 없음'이다. 단 업무 상의 교류는 제외한다. 내가 앞서 말했던 11명에는 업무 상 잦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포함인 데다, 대면 교류하지 않은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고립된 청년이 맞는 듯하다.
만약 일본 사회정신보건학과 교수 사이토 다마키에 따른다면 나는 은둔형 외톨이까지도 의심해야 한다. 은둔형 외톨이라고 반드시 자택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아니고, 편의점이나 영화관 등 외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도 가족 외 누구와 관계하지 않는 점에서 사회적 은둔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혼자 하는 취미나 가족 모임을 할 때만 최소한으로 외출하는 경우 등을 은둔형 외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립 청년이나 은둔 청년보다는 그 대상과 범위가 넓다. 은둔 청년은 스스로의 사회적인 관계 단절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많지만, 고립 청년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탓에 고립을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여긴다. 고립 청년이 자신의 고립을 부정하는 이유다. 이제껏 사회적 고립은 주로 1인 가구 고독사와 연관되어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마저도 연령대가 특정되지 않거나 노인 인구를 가리키는 경우가 다수였다.
고립과 은둔의 확장이 필요한 때가 됐다.
국내를 기준으로 진행된 선행 연구에서는 사회적인 연결망과 지지 수준을 통해 청년의 사회적 고립을 측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에서는 '1년 이상 장기 미취업' 등의 조건을 내건다. 청년 고립과 관련한 글을 이어 쓰는 이유는 내가 지원받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고립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으면, 고립은 큰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너는 직장 다니면서 무슨 고립 청년이야?"라고 주위에서 나에게 말한다. 물론 직장 여부도 고립에 대한 지원을 판단함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다. 사회복지 예산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고립된 청년을 찾지 못해서, 고립 청년은 스스로 드러나길 거부해서, 지원은 조건이 안 맞아서 고립은 방치된다. 물론 모든 법과 사회 시스템은 완벽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별주의만을 고집한다면 고립은 더욱 드러나기 어렵다. 고립이 드러나도 괜찮은 것이 되려면, 인식이 바뀌고 고립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야 한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복지사로서 노동하며 직장은 있지만, 고립과 은둔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줄타기하고 있다. 내가 고립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고립 청년'을 지원하기 위해 알아가는 과정에서였다. 스스로가 고립되거나 은둔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청년도 다수 있을 것이다. 고립과 은둔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단지 예산의 낭비라거나 행정의 과도한 개입이라거나, 복지병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다. 누구나 혼자 사는 외로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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