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없는 쾌락"
"인간이 느끼는 3대 욕구 중 무엇이 제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식욕, 성욕, 수면욕 중 말이야."라고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인간의 3대 욕구를 누가 정하지?'라고 반문할까 하다가, 몇 안 남은 친구마저 잃게 될까 봐 그냥 친구의 물음에 답해주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수면욕 다음 식욕, 성욕 순이라고 생각해. 의지로 참을 수 없는 것이 기준이라면 말이야". 친구는 원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조금 실망한 눈빛으로 "나는 성욕, 수면욕, 식욕이야."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매슬로가 정의한 것에 따르면 성욕, 식욕, 수면욕은 생리적 욕구에 포함된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은 총 다섯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그는 욕구에도 순서가 있다고 보았다. 아래 단계가 모두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를 욕망한다. 생리, 안전, 애정과 소속, 존중, 자아실현 순으로 상위 단계가 된다. 심리학자가 이야기한 것이지만, 심리학 외에서도 많이 인용된다.
나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사회복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학문이므로 당연히 매슬로의 욕구단계론도 수업에서 배웠다. 직관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기에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립 청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은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보다도 우선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로 '책임 없는 쾌락'이다.
매슬로가 제시한 다섯 가지 욕구 분류는 모두 책임을 동반하는 듯하다. 생리적 욕구에는 책임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도, 안전하게 잠들 수 있는 공간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책임이 따른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사회 동물인 인간은 안전한 사회 구성을 법이나 문화, 관습으로 의무화한다. 이 역시 내가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나도 그 규칙에 따라야 하는 책임이 있다.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도 그렇다. 특히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상호 호혜가 원칙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받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의 매력을 어필하던, 내가 상대를 사랑하던, 상대의 사랑에 책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존중이나 자아실현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무수하게 많은 도전과 성취, 실패의 경험이 필요하다. 외부 존중도 관계에 기반하는데, 이는 명백히 노력에 의한 결과다.
이렇게 보면 '책임 없는 쾌락'이 현실에서 가능한지 고민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임 없는 쾌락'은 명확한 욕망이라기보다는 경향성에 가깝다. 욕망을 적극적으로 포기해야만 오히려 추구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의 호혜를 포기하면 나의 호혜도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글의 맨 처음 친구가 나에게 물었던 인간의 3대 욕구도 마찬가지다. 고립 청년은 먹고 자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생리 활동이 무너진 경우가 많다. 즉 적극적으로 '책임 없는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나도 고립 청년으로서 '책임 없는 쾌락'이라는 경향성이 매혹적이게 느껴진다. 사람과 관계하면서 얻는 사랑이 나에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연결에 실패하는 경험 반복으로 지쳤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테면 사람보다 강아지와 살며 느끼는 사랑은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하다. 나는 강아지랑 단 둘이 산다. 그와 살기 위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꾸준히 건강을 살피고, 매일을 아침저녁으로 N번 산책을 다니고, 쓰다듬거나 하는 소통에서도 최소한의 상호 간 예의를 지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사람과 관계에서 드는 노력보다는 확실히 적다.
꽃이나 식물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저 바라만 보고, 물을 주는 것, 통풍과 일조량을 신경 써주는 것 이상의 노력과 책임이 따른다. 세밀하게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읽어야 한다. 공감은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나 주변 상황과 맥락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상호 호혜를 포기하면 책임이 덜하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아침마다 창가에 올려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도 책임이 필요하지만, 관계함으로써 노력해야 하는 것보다는 책임이 덜하다. 고립 청년은 이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고, 대체하면서 살아간다.
현직 사회복지사가 주장하는 고립 예방하는 방법
"진짜, 이런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고립'이라는 특성 탓에 정확하게 조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각종 연구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66만 명의 청년이 고립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평소에 가족과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라는 질문에 고립이나 은둔 상황의 청년은 40.5%가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서울시 청년은 14.8%만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언제나 나의 편일 것 같은 가족 관계에서도 책임을 포기한 셈이다.
'집에서 주로 하는 활동'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고립/은둔 청년이 집에서 주로 하는 활동은 '인터넷 사용(59.1%)'이었으며, 다음으로 '게임(11.1%)', '잠(10.5%)', 'TV 시청(10.1%)' 등의 순이었다. 반면에 서울시 청년이 고립/은둔 청년에 비해 높은 것은 음악 듣기, 책 읽기, 실내 운동 등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고립 청년은 '책임 없는 쾌락'을 적극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고립 청년이자 사회복지사로서 고립의 정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립'에 나처럼 관계를 포기하고 있는 청년까지 그 정의를 확대한다면 그 수는 더 클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의미가 있냐 생각할 수 있다. 그보다 고립되어 있는 청년을 찾고,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을 수 있다.
현재 기준에서의 관계나 가족 구성으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친한 사람과 대면교류가 거의 없고, 업무 상 교류를 제외하면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를 고립 청년으로 보지 않는다. 직장이 있어서 매일 집 밖에 나오기 때문이다. '고립'의 정의를 확대해야만 하는 이유다. 사회복지 서비스들도 똑같다.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와도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있고,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받았을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람을 찾는다. 이러한 청년은 모든 연결이 끊어져 있어 찾기도 힘들고, 마음의 벽을 친 지 오래라 지원하기는 더 힘들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사회복지사가 고립된 사람을 찾지 못한다.
이렇게까지 고립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의 정의를 확대해야 한다. 나처럼 직장이 있지만 사람과는 단절을 선택한 청년, 가족과 함께 살지만 마음 털어놓을 곳이 없는 정서 고립을 선택한 청년, 실패 경험의 반복으로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청년 등을 고립되기 전에 찾아야 한다. 복합적인 고립 상황에 빠질수록 찾기 어렵고, 심각한 고립에 놓인다. 이는 고립 정의를 확대함으로써 예방하고, 연결하고, 관계할 수 있다.
나는 고립 청년으로서 '책임 없는 쾌락'을 적극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점차 더 고립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다. '고립'이나 '은둔'과 관련한 많은 연구에서도 드러났듯이, 청년의 고립에는 사회적 책임이 항상 함께다. 또한 고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오죽했으면은 인간이 느끼는 3대 욕구를 포기하게 되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생리적 욕구보다 '책임 없는 쾌락'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렇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면, 고립의 정의를 확대해야 할 때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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