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아서 플렉은 퇴근길에 항상 우편함을 확인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퇴근하면 편지 온 것 없었는 지를 묻기 때문인데, 언제나 그렇듯 텅텅 비어있다. 의도치 않게 매일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확인하는 셈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누구에게도 연락 올 일이 없지만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켜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타인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나와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립을 확인하며 느낄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을 테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여 있다. 사회적 고립은 개인과 사회가 전혀 접촉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거동조차 불편한 그의 어머니는 이미 사회와 단절되어 있으니 함께 살아도 사회적 관계로 볼 수 없다. 심지어 그녀는 망상장애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졌고, 아서 플렉 또한 정신과 병력이 있다. 다시 말해 돌봄을 받아도 모자랄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있다. 그들은 돌봄이 필요하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광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것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불안정한 일이다. 그곳에서도 직장 동료들은 정신 장애가 있는 그를 불편하게 여겨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일을 해도 고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서 해고당한다. 사회적 고립에 더해 경제적 고립도 그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하나의 고립은 다른 고립을 쉬이 부추긴다. 그렇다면 아서 플렉에게 정서적인 형태의 고립도 있을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여자가 있다. 그들은 방음이 안 되고,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추고, 벽에 낙서가 되어 있는 아파트에 산다. 그녀와는 현재의 처지를 비관하며 친해졌다. 그녀와 연인 관계로 거듭나면서는 그가 힘들 때마다 지지와 위로를 건넨다. 다만 그녀와 나눈 대화, 마음, 관계는 아서 플렉의 망상이었다. 유일한 혈육이라 믿었던 어머니와의 관계부터 자신의 출생, 과거 기억 등 모든 것이 부정당했을 때, 즉 자신의 세상이 완전하게 무너졌을 때 그는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아서를 보고 말한다. "이름이 아서 맞죠? 복도 반대편에 살고." 그나마 그를 지켰던 망상도 깨어지는 순간이며, 앞으로는 그를 지켜줄 망상조차 없음을 뜻한다.
아서 플렉은 무료 상담을 주기적으로 받는다. 하지만 상담 과정을 보면 정서적인 지지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상담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회복지사는 아서 플렉에게 일기를 써오라고 했고, 그의 일기장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한다. 일반적인 사회복지사라면 내담자 생명을 우선하여 정신과 치료 지시나, 심경 변화가 있는 이유를 찾거나, 사회적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는 형식적으로 상담 행위만 할 뿐, 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서 플렉은 말한다. "내 말 안 듣지? 단 한 번도 귀담아서 들은 적이 없어. 내 머릿속엔 부정적인 생각뿐인데, 당신은 듣질 않아."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를 지탱해 오던 최소한의 연결고리인 상담마저 정부 지원이 끊기며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료된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공적인 지지체계에서도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고립감을 느끼며 살아온 그에게 더 이상 떨어질 곳은 없다.
바닥을 쳐야 올라갈 수 있다. 모든 형태로부터의 완전한 고립에 놓인 그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지하철에서 남자 셋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다가 우발적으로 총을 쏴 그들을 죽인다. 사건은 여지없이 이슈가 되었고, 하루아침에 아서 플렉은 영웅이 된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나날을 보상이라도 받듯, 모든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존재감 없이 주변인으로만 살던 그가, 관계의 중심 그 자체가 된다. 살인으로 고립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는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왜곡된 방법을 알게 되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다. 공개적인 방송에서도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그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던 도중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그는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순간을 만끽한다. 나는 그의 살인을 옹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아서 플렉의 살인이 오로지 그의 단독 책임인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가 아서 플렉을 '조커'라는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클라이맥스에서 도시는 이미 방화와 약탈,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어쩌면 모두의 억눌린 고립이 아서 플렉으로 시발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시민들의 대규모 폭동으로 추정컨대 아서 플렉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미 고립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 고담 시는 현재의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간병 살인, 가족 돌봄의 방치, 이상동기 범죄, 다양한 형태의 고립 등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와중 돌봄은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까지 진행되고 있다. 고립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 1980년 고담 시와 2024년 대한민국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도 매일 '조커'를 양산하고 있을 테고, 폭동까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고립이 터져 나올 기폭제가 없을 뿐이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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