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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8월 15일은 78주년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의 광복과 독립을 신념으로 살아간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리는 의미가 큰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잊혀진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입니다. 김구, 안창호, 윤봉길 의사와 같은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기억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유관순 열사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잊혀진 여성들 76번째 뉴스레터에서는 지금 이 시대를 살게 해주신 광복의 주역들이지만, 잊혀진 영웅들, 여성 항일독립운동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독립을 향한 비행 권기옥
1901년 평양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권 선생의 이름은 쓸모 없으니 어서 가라는 뜻의 '갈례'였습니다. 그가 열일곱이 되던 해, 미국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본 후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아픈 모친을 대신해 밥,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도맡아하며 막둥이 동생을 업은 채 학교에 갈 정도로 학구열이 남다르던 그는, 여자라는 이유로, 식민지의 백성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비행사가 되어 조국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다잡았습니다.
권기옥은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교사 박현숙의 영향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3·1 운동을 준비하였고, 직접 거리에 나가 만세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3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도 했죠.
권기옥은 독립운동을 위해 1920년 동료들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중국에 도착한 권기옥은 두 군데의 항공학교에 입학을 신청하였지만, 두 번 다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비행사를 위한 학교는 운남항공학교 뿐인 상황에서, 직접 운남으로 가서 당계요 장군을 직접 만나 입학을 부탁하여 결국 스물셋의 나이로 입학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 학교는 당시 조선인을 포함한 여성들도 입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행 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체력 훈련, 낙하 훈련, 회전 훈련 등 남학생들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마치고 비행기 조종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권기옥은 훈련비행 9시간 여만에 단독 비행도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가 됐죠. 이후 권기옥은 중화민국 공군에서 소위를 거쳐 중위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대령이 되었습니다.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2년 상하이 전투를 일으키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합니다. 그는 이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죠. 또한 권기옥은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연감'을 발행했습니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한없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북받쳐 오르던 감격의 도가니 속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고 전했습니다.
첫 여장 무장 독립 운동가 남자현 의사
남중근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단지동맹으로 자른 약지일 것입니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서는 안중근의 약지 이야기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을 위한 안중근의 투지를 강조하고는 하죠.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손가락을 세 개나 자른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것을 아셨나요? 바로 영화 암살의 안옥윤 역할에 모티브가 된 남자현 선생입니다.
물론 남자현이 영화의 실제 모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남자현 선생의 삶은 어땠을까요? 그는 1872년 12월 7일 경북의 영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1 운동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로,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일본의 총독과 장교를 암살하기 위해서 직접 계획도 세우는 등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서 권총을 들고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여성 장군'이라는 뜻의 여비장(女飛將)’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32년 9월, 남자현은 국제연맹 조사단이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원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합니다.
1933년 초 남자현은 동지 이춘기 등과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제거하기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 가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 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고 14년간의 독립운동의 소원인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록에 없는 여성들
2013년 정부에서 인정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구한말 의병활동을 한 윤희순, 양방매를 포함, 총 226명. 한국여성독립연구소(대표 심옥주)는 이들을 출생지별로 평안도 46명/서울·경기 36명/경상도 27명/전라도 26명/황해도 23명/함경도 17명/충청도 16명/제주도 5명/강원도 1명/중국 1명/러시아 1명이라고 분류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어려움과 제한된 사회적 지위 속에서도 끈질기게 독립을 향해 투쟁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정과 사회의 압박 속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불꽃으로 삼아 독립의 길을 걸었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제주에서는 부춘화(1908~1995)를 비롯한 해녀들은 1932년 일본 경찰에 맞서 항일투쟁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우도 해녀들은 세화와 종달, 하도리 해녀들과 함께 1932년 1월 12일 세화 오일장날 집단 봉기를 일으켰죠. 1932년 1월 극렬하게 불타오른 해녀항쟁은 3개월 동안 제주 동부 지역에서 연인원 17000명의 해녀가 참가한 국내 최대의 여성집단의 항일투쟁이면서 최대의 어민봉기였습니다. 우도에서만 약 300여 명의 해녀가 참여했고, 1월 26일에는 우도면 해녀 800여 명이 벌떼처럼 일어 나서 피의자 검거 차 우도에 건너온 경관들에게 격렬히 항의하기도 했죠. 지금도 천진항에 내리면 항일해녀기념비가 찾아온 이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3.1운동을 비롯한 대일항쟁, 그리고 광복에 역사에는 여성 선열의 족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저 기록에서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혀졌을 뿐이죠. 돌아오는 광복절에는 고통에 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 여성독립운동가들과 그 자유를 향한 치열하고 간절했던 삶의 현장을 기억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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