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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서른일곱 번째 뉴스레터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8년 9월 1일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권리선언문을 말하는 여권통문은 *김 소사와 이 소사라는 이름 두 여성을 필두로 300명의 여성이 발표하였으며, 그 안에는 여성의 권리인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19년, 여성가족부는 여권통문이 선언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했고, 「양성평등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2019년 10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한국 여성운동의 시작점이 된 여권통문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름 없이 살았습니다. 소사(召史) 또한 기혼여성들을 지칭하는 말로 실제 이름이 아닙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해당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1989년 9월 8일 자 횡성신문은 이례적으로 별도로 내는 특별한 보도인 ‘별보’를 실었습니다.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는 설명과 함께 ‘여권통문'을 소개하고 글의 전문을 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신문, 독립신문에도 전문이 발표되었고, 독립신문 영자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신체 수족 이목이 남녀 간에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여자는 병신 모양으로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남자의 절제를 받는가? 여학교를 세워 남녀평등을 이룩하자.”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교육권과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직업권, 개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여권통문의 원래 명칭은 ‘여학교 설시통문(여학교통문)’ 이었습니다. 명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여성들이 경제활동과 사회 진출을 위해서는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에게 큰 호응을 받은 여권통문은 발표 후 300명에서 400~5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 부인들이 중심 세력이었으나 일반 서민층 부인들과 기생들도 참여하였고 자연스럽게 여성 인권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모여 같은 해 9월 12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찬양회(贊襄會)'를 설립하였습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 운동과 여성 계몽사업을 펼쳐나갔습니다. 매주 일요일 정기집회를 열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가졌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는 관립 여학교 설립 운동이었습니다. 여자도 국민의 일원이었기에 국가가 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찬양회는 고종에게 여학교 설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실제 고종의 찬성을 끌어냈으나 유생층의 반대와 재정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설립이 미뤄지게 되자 찬양회 회원들의 회비로 여학교의 설립을 전담한 부서인 양성원(養成院)은 1899년 2월 26일, 약 5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순성 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손으로 직접 설립한 최초의 민간인 사립 여학교인 순성 여학교는 7, 8세에서 12, 13세 연령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한문교육과 서양의 역사, 가정생활에 필요한 육아와 요리, 바느질법도 가르쳤습니다. 당시 여성이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인들의 사비를 들여 가르친 순성 여학교는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정부와 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여권통문에서 이어져 온 여권운동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여성들은 해방 후에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을 주장했으며 현재까지도 무수히 많은 여권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여성사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여권통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정부에서는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날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보며 당연한 권리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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