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하케(Hans Haacke, 1936-)는 사회 구성원 중 상위 1%가 막대한 부를 점유한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이를 주제로 한 작품 <Shapolsky et al. Manhattan Real Estate Holdings, a Real-Time Social System, as of May 1, 1971, 1971>을 발표했다. 부유한 이들을 향한 맹목적인 비판은 아니었다. 소수가 자본을 독점하면서 생기는 여러 상황, 가령 극빈층에게 오롯이 전가하는 임대료 상승을 비롯해 탈세와 세금 체납, 매춘 등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상상할 수도 없는 재산을 축적하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하케는 베트남전쟁으로 기인한 여러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예술계와 관련된 대기업과 자본, 권력 등을 고발하는 데 전념해 온 작가이다. 자신의 작가적 성향을 숨기지 않았던 하케는 여러 조사를 거쳐 광범위한 부동산 지분을 소유한 이들 중 해리 샤폴스키(Harry Shapolsk)를 중심으로 한 샤폴스키(Shapolsky) 그룹을 작품에서 다룰 대상으로 삼았다.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는 직관적이다. 샤폴스키 그룹이 소유한 부동산 사진과 해당 건물의 가격과 대출 규모, 소유자명, 토지의 금전적 가치 등을 정리한 텍스트, 부동산 위치를 표시한 지도, 복잡한 부동산 거래 내용과 관계를 표기한 차트가 전부이다. 특이하게도 작가는 샤폴스키 그룹이 공동 소유한 회사들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관련된 수십 개의 기업 사이에 일어난 부동산 가격 담합 혐의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하케가 샤폴스키 그룹을 고발하는 데 활용한 부동산 정보는 뉴욕시 등기소(New York City Office of the City Register)에서 검색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하케가 공공기록에서 ‘찾아낸’ 기록정보는 작가가 작품에 활용하기 전부터 열람할 수 있었다. 작품 내용의 일부로 쓰이기 전까지는 부동산 거래 내역이나 소유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단체만이 이를 확인했을 것이다.
한스 하케가 작품 <Shapolsky et al. Manhattan Real Estate Holdings, a Real-Time Social System, as of May 1, 1971, 1971>에서 기록의 정보를 활용한 목적은 명확하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은 절제하고, 공공영역에서 ‘인정’하는 기록정보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 공공기록의 정보를 활용한 것뿐 아니라 작품명에 포함된 ‘실시간 사회 시스템’이란 표현과 ‘1971년 5월 1일’이라는 날짜는 특정 시기를 기준으로 부동산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기록이 지닌 힘과 가치는 실존 인물을 작품명으로 겨냥한 작가의 용기와 결합하며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밝히려 하지 않던 불편한 진실과 적나라한 실체를 기록에서 찾은 부동산 정보로 직시하게 했다.
지난 글에서 사례로 든 산투 모포켕을 비롯해 한스 하케와 같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적 창의성과 자율성’보다 기록의 내용과 정보,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다. ‘아카이브 아트(Archival Art)’로서 이들의 작품은 허구적 사건이나 대상이 아닌, 사실적 현상과 사건에 주목한다.
물론, 작가들이 기록정보와 출처, 가치를 활용하려고 기록에 접근하는 지점은 아키비스트의 태도와는 무척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기록의 특성을 존중하는 작가들은 ‘왜 기록하는가?’, 혹은 ‘왜 기록물을 활용하는가?’, ‘어떤 정보를 말하고자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고민한다. 작가가 기록하겠다는 ‘의지’를 가졌고,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자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면, 자신만의 원칙을 신중히 따져보게 된다.
작가들이 기록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이런 성향의 작품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로서 ‘아카이브’를 활용한 작품을 분석하려면 작가가 기록이 지닌 특성 자체에 주목한 것인지, 반대로 기록의 이미지를 차용해 미적 가치를 강조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두 경우는 ‘기록’을 활용하기에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상반되는 과정과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반(反)아카이브적’인 태도를 보여온 그동안의‘아카이브 아트’연구와 대척되는 지점이고,동시에 이를 기록학적 입장으로 새롭게 보려는 노력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정보와 맥락을 이해하고 활용한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또 다른 기준이 있을 때, 예술가의 창작 영역과 해석의 틀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미술계의 담론과는 별도로, 새로운 시각으로 ‘아카이브 아트’에 관한 기록학적인 접근과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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