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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능동적 사용 : AI 시대를 살아갈 기록연구사의 생존 기술

2025.11.18 | 조회 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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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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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 이 글은 ‘제17회 전국기록인대회’ 2일차(2025.11.1.) 1세션에서 진행된 「경계 위의 아키비스트: 들여다보지 않는 고민」, 「디지털 환경 속 적정 기록관리 수행기」(발표: 김재원)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해당 세션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과도 이 내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어릴적 내가 컴퓨터를 배웠던 방식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컴퓨터 학원을 가게 되었다. 컴퓨터 학원에서 배운 것은 '워드프로세서'와 '엑셀'이었다. '컴퓨터=게임기'라고 인식했던 나에게 '워드프로세서'와 '엑셀'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도 안되는 컴퓨터 용어를 외우고,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엑셀 함수를 배웠다. 알 수 없는 이름의 수많은 컴퓨터 기능이 왜 필요 한지,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외워야만 했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말이다. 자격증을 왜 따야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엄마는 없는 살림에 컴퓨터 학원을 보냈으니, 그 열매를 당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다. 

집에 가면 재O수학이라는 학습지를 풀었다. 당시 재O수학은 '스스로학습법'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교육법을 앞세워서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무조건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원리를 터득하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제 7차 교육과정스러운 이야기가 TV와 신문광고에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재O수학 선생님이 방문하기 직전에 답안지를 배끼는 아이였고, 컴퓨터 학원 대신에 피시방을 가는 그런 아이였다. 방식이야 어찌되었건 숙제는 했고, 나름의 컴퓨터 공부는 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프트웨어의 구조와 네트워크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해외의 희귀 음원을 구하기 위해 밤새 P2P 음원 사이트를 뒤졌고, 어렵게 구한 음원을 자랑하기 위해 또 밤을 새워 윈앰프 개인 음악 방송(Shoutcast)을 하곤 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음원 파일의 포맷(mp3, flac, wma 등)과 코덱의 필요성, IP 주소와 포트의 개념, 그리고 소프트웨어가 확장 플러그인을 통해 작동하는 모듈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나에게 맞는 ‘스스로학습법’을 터득한 순간이었다.  

 알아서 척척척 기술을 능동적으로 다루는 법을 어렴풋이 깨달아가던 그 시기는, 마침 닷컴버블의 시대이기도 했다. 각 가정에 광통신망이 보급되고, 인터넷 기반의 새로운 웹 서비스 플랫폼이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코덱이나 IP 같은 개념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개인 음악방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들이 등장했고, 수많은 웹 서비스들이 앞다투어 ‘더 쉽고, 더 빠르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닷컴버블이 꺼진 뒤에도 이러한 흐름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익숙한 편리함에서 비롯된 기술의 비대칭 구조

편리한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서비스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기술이 쓰였는지 알 필요가 없다. 공급자가 구성해둔 방식대로 잘만 사용하면 된다. ‘편리함’이 당연한 가치로 여겨지는 지금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서비스는 공급자와 사용자 사이가 철저히 분리된 구조 속에 존재한다.

 나는 웹 에이전시에서 PM으로 일하며 UX를 늘 고민한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사용자가 그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순간, 그 서비스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UX, 즉 ‘사용자 경험’이라는 개념은 참 애매하다. 서비스의 기능이 늘어날수록 UX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사용자마다 기술을 이해하는 수준과 ‘편리함’을 느끼는 기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터페이스나 구조에 불만을 표한다. 그들에게 기술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작동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공공기관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용자 입장에 익숙해진 고객은 “편리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그 아카이브를 왜 만드는지, 요구하는 각 기능이 무엇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 그 기능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조직 내부의 기술 인프라와 구성원들의 이해도는 어떤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만족할 만한 UX를 고민하는 일’은 전적으로 공급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UX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공급자는 사용자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이 요구한 기능을 충족시키기 급급한 형태의 서비스를 개발한다. 반면, 사용자는 기술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알아 듣지 못하는 IT 전문용어가 섞인 공급자의 설명에 기대어 막연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서비스의 빈틈은 런칭 이후에야 드러난다. “우리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 속에서도 프로젝트는 이미 종료되어 있다.

 

기술의 능동적 사용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디지털 환경 속 적정 기록관리 수행기’를 발표한 김재원은 기술의 능동적 사용자이다. 그는 “자신은 개발자가 아니며, 디지털 도구를 깊이 다룰 만큼 숙련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조직이 직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를 스스로 탐색하고 학습하며 적용했다. 발표자 김재원은 기술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수행했다. 

① 문제인식 :  지금 내가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한다. ② 원인분석 : 그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구조적으로 파악한다. ③ 인프라 이해 : 내가 속한 조직이나 환경의 기술적 구조를 이해한다. ④ 자원 평가 :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적·시간적 자원을 점검한다. ⑤ 기술 선택 :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정한’ 기술을 선택한다. ⑥ 학습 및 실행 : 선택한 기술을 학습하고,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한다.

위의 과정을 김재원이 실제 조직에서 겪은 문제와 연결하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① 문제 인식 - 수백만 단위 전자파일을 목록화·DB화 필요성 확인  - CSV 파일의 행 수가 엑셀 한도 초과 → 파일 열람 불가 ② 원인 분석 - 기록관리 시스템 부재, 실무자가 직접 전자파일 관리 - 대량 데이터 처리 도구 부재, 엑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 보안·DRM·암호화 등 접근 제약 존재 0 클라우드·자동화 툴 사용 제한 ③ 인프라 이해 - 기본 환경: 윈도우 PC + 로컬/외장하드/NAS/공유드라이브 - 데이터가 여러 저장소에 분산되어 있음 - 버전관리·경로 구조 비일관 → 파일 추적 어려움 발생  ④ 사용 가능한 자원 평가 - 외부 도구 제약 → 내부 사용 가능한 도구 중심으로 접근 - 엑셀의 편의성 유지 + 대용량 데이터 처리 필요 ⑤ 기술 선택 - Filelist Creator → 파일 목록 자동 생성 (엑셀 내보내기) - Everything → 즉시 검색 가능한 파일명 색인 도구 - PDF-XChange Editor → 폴더 내 PDF 본문 일괄 검색 - Beyond Compare → 파일 무결성 검증, 백업 확인 - 7-Zip + CMD → 대량 압축파일 자동 해제 - Python pandas → 대용량 CSV 분할·결합, 전처리 ⑥ 학습 및 실행 - 온라인 학습으로 Python 습득 (기초 문법, 데이터 처리) - CSV 파일 자동 분할·병합 스크립트 작성 - Beyond Compare로 무결성 검증 - 명령 프롬프트 자동화로 대량 작업 처리 - 결과: 엑셀 한계 극복 + 데이터 처리 효율화

김재원이 발표에서 강조했듯, 그가 사용한 기술과 도구가 다른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 조직은 고유한 인프라, 보안 정책, 인적 자원, 업무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김재원이 어떤 기술과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기술과 도구를 스스로 선택하고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순히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의 수동적 사용자가 아니라, 문제를 분석하고 기술을 목적에 맞게 재구성할 줄 아는 능동적 사용자다.

만약 그가 우리와 같은 웹 에이전시에 프로젝트를 의뢰했다면, 어떤 목표로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UX 구조가 적합한지를 스스로 충분히 고민하고 명확하게 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사용자들에게도 만족을 주었다면, 그 공은 단지 공급자의 기술력이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방향을 제시한 사업 담당자의 통찰과 주도성에 있을 것이다.

  

 

AI 시대의 적정기술과 기록연구사가 갖춰야 능력

‘적정기술’이란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고비용·고성능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자원 안에서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급자와 사용자가 분리된 현실에서 어느 수준의 기술이 ‘적정한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적정기술’은 공급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함께 맥락을 공유하고 경험을 쌓으며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사용자가 기술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 조직에 맞는 ‘적정기술’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다행히도 AI 기술의 대표격인 LLM(Large Language Model) 서비스는 사용자의 맥락과 목표를 설명하기만 해도, 적용 가능한 기술과 방법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제안해준다. 그러나 어떤 도구를 선택하고, 어떤 기술을 실제로 도입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다. 기술의 선택에는 맥락이 필요하며, 그 맥락을 해석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바로 AI가 전문가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이유다.

기록관리 영역에서도 AI가 문서를 자동으로 분류하고 기술하며, 보존까지 담당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데이터의 구조, 파일의 위치, 맥락 정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AI의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조직에 맞는 적정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환경, 자원, 보안 수준, 업무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기술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과 기획 능력이 필요하다. AI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록연구사가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기술의 주체로 나서야 할 시점이다.

AI 시대의 기록연구사는 단순히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기술을 자신의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은 다음과 같다.

- 기술 이해력 : 단순히 AI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웹 구조와 데이터 처리 등 기술의 작동 원리를 기본 수준에서 이해하고, 그것이 기록의 생산·보존·활용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 맥락 판단력 : 기술이 제공하는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기록의 생성 배경과 활용 목적을 고려하여 ‘이 기술을 지금, 여기에 적용해도 되는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 문제 해결력 : 주어진 기술을 그대로 쓰기보다, 필요에 따라 재구성·조합·대체하며 자신의 환경에 맞는 ‘적정한 기술’을 스스로 선택하고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핵심 역량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 기록연구사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물론 탁월한 개인의 경우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직 차원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조직이 기술적 주체성을 키울 수 있는 환경과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조직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 교육 인프라 : 조직은 기술의 능동적 사용자를 길러낼 의지와 여력이 있는가?  - 인사·조직문화 : 조직은 그러한 인재에게 합당한 대우와 지속 가능한 업무 구조를 보장할 수 있는가?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더 떠넘기는 구조는 아닌가?) - 기술 투자 : 조직은 기록관리의 질적 성장을 위해 기술 인프라와 자원을 적극적으로 투자할 의지가 있는가?

AI 시대의 ‘적정기술’은 더 이상 특정 전문가나 기술자만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우리 현실 속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기록연구사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기술의 도입자이자 해석자, 그리고 실천자로서 역할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통해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다. AI가 제시하는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우리에게 적정한 기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천할 때, 기록연구사는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기술을 주도하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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