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감정을 지닙니다.
전시에서 비롯된 사유
2025년 10월 16일, 필자는 한국기록전문가협회 전시분과 모임에 참석해 K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괴짜전 2025」를 관람했습니다. 이 전시는 신진 미술작가들의 실험적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유달리 기억, 경험, 기록에 대한 키워드가 많았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관람 후 우리는 기록전문가로서의 직업적 시선으로 전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기록의 평가란 무엇인가', '무엇이 중요한 기록으로 남는가', 그리고 '감정은 기록 판단에 얼마나 개입되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괴짜전 대화’에 함께한 6인의 집단적 사유로 출발해 기록 평가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과 감정 기반 평가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여기에 필자 개인의 생각과 관심사를 덧붙여 발전시킨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
기록 평가*는 오랫동안 합리적 판단과 체계적 절차의 주요한 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및 하위 규정은 기록의 중요도에 따라 보존기간을 영구·준영구·10년·5년·3년·1년 등으로 구분하며, 행정적·법적·역사적 가치를 근거로 책정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적 장치가 실제로 ‘중요한 것’을 정의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보존기간이 곧 중요성의 지표라면, 인간의 기억과 행위는 그보다 훨씬 불규칙하고 감정적입니다. 무엇을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며, 따라서 기록 평가의 객관성은 근본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일러두기: 본 글에서 언급하는 ‘기록 평가’는 평가심의제도나 그 절차적 운영방식보다는, 기록이 사회 제도 속에서 가치와 중요성을 부여받는 개념적 구조와 상징적 성격을 중심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행정적 판단 절차보다는 기록의 의미를 형성하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둔 개념적 사용임을 미리 알립니다.
제도와 객관성의 한계, 규범적 체계의 불가능성
현행 법령은 평가의 기준을 ‘행정업무 수행의 참고’와 ‘사실의 증명 필요성’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 언어는 감정, 문화, 기억의 층위를 배제한 채 효율과 증빙을 우선시합니다. 현장에서는 그 기준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우리는 이미 체감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개발사업의 기록은 10년 보존’ 같은 문구는 행정 절차의 편의와 행정 행위에 대한 증거적 가치를 보장할 뿐 그 공간이 개인의 삶과 감정에 미친 영향, 공동체의 기억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괴짜전 2025 답사 이후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다보면,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결국은 법적 의무라기보다 사람들의 기억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돼요.”
이 발언은 어쩌면 제도적 객관성의 허상을 드러내는 걸지도 모릅니다. 기록은 법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이 담아내지 못한 ‘감정의 증거’가 기록을 존속시키는 이유가 됩니다. 결국 기록의 객관성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감정적 합의의 산물이 됩니다.
감정의 작동, 인간 중심의 판단 구조
기록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에 인간의 감정이 작동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역사철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역사를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의미 부여의 서사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이때 우리가 사건을 '중요하다'라고 느끼는 감정적 반응은 그 의미 부여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는 사실의 저장이 아니라 감정의 해석인 것이지요.
사실 심리학·뇌과학적으로 기억과 감정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대뇌 변연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아미그달라(amygdala)는 감정적으로 유의미한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강화합니다. 감정이 강한 경험일수록 더 오래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인지적 경향은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평가하는 데서도 유사하게 작동합니다. 괴짜전 대화에서 한 참가자는 “감정이 많이 얽힌 기록일수록 더 중요하게 남기고 싶어진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참가자는 “쾌·불쾌의 감정 정도가 곧 평가의 기준이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감정적 판단과 결과를 찾아보기는 쉽습니다. 괴짜전 대화에서 모두가 공감한 사례는 문민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사건이었죠. 건물 철거를 두고 한 쪽은 문화유산의 파괴라 비판했고, 다른 쪽은 식민 역사 상징의 청산이라 환호했습니다. '국민적 정서'에 따라 조선총독부 청사는 폭파되었죠. 같은 기록 대상이라도 감정의 스펙트럼에 따라 남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록의 평가는 언제나 인간 중심적이며, 절대적이고 보편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AI와 기록평가- 예측 가능한 감정, 불가능한 객관성
그렇다면 감정이라는 소위 비합리적 요소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수 있을까요? 최근 인공지능 분야의 감정 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은 인간의 감정 패턴을 인식·예측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AI는 특정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반응(댓글 감정 분석, SNS 언급량, 시기별 공감도 등)을 수집하여 감정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어떤 사건에 정서적으로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인 셈입니다.
이 변화는 기억의 구조 자체가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과거의 기록 체계는 국가, 제도, 공동체가 중심이 된 거대한 레거시 메모리얼(legacy memorial)이었습니다. 기억은 기념비와 제도적 시설을 통해 ‘한 목소리의 역사’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AI는 수많은 개인들의 디지털 흔적을 감정의 단위로 수집·분석함으로써 마이크로 메모리얼(micro memorial), 즉 개인 단위의 감정적 기억들을 축적할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이크로 메모리얼들은 점처럼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감정의 패턴으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의 감정적 모자이크를 형성합니다. 이제 기록의 가치는 공적 기념의 무게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교차하며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기록 평가의 과제는 더 이상 무엇을 영구보존할 것인가가 아닌 그 미시적 감정의 집합 안에서 공명(共鳴)의 구조를 찾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AI는 이러한 감정의 패턴을 가시화하는 거울이자, 개별적인 기억들이 만나 집단적 정서의 지층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됩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거대한 기념비를 대신해 객관성의 도구에서 감정의 거울로 전환되는 새로운 평가 장치로 작동합니다. 그것이 인간 중심의 기록평가 체계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방향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AI와 감정의 반사성- 기술은 감정을 비춘다
인공지능은 감정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비춥니다(reflect). 감정 컴퓨팅은 기계가 인간의 정서를 탐지·표현하도록 설계된 기술입니다. 이때 생성되는 감정 데이터는 사회 전체가 어떤 사건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정서적 지도(emotional cartography)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Picard, 1997).
그러나 이제 그 지도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지도가 아닙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지도는 각 개인의 마이크로 메모리얼로서, 짧은 문장, 표정, 클릭, 해시태그와 같은 감정의 미시적 단위들이 서로 겹쳐 생성되는 모자이크입니다. 기억은 중앙집중적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분산된 네트워크 속에서 감정 레이블로 묶여 계속 갱신되고 재해석되는 동적 데이터로 변모합니다.

한편 루치아노 플로리디(Floridi, 2013)는 AI를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닌 지식 생산의 행위자(epistemic agent)로 규정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스테믹 윤리(epistemic ethics)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AI가 정보를 수집, 분석해 지식을 구성할 때 그 결과에 내재된 의미 왜곡과 가치 판단의 책임은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활용하는 인간에게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감정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닌 서사적 맥락과 관계적 의미가 제거될 위험이 큽니다. AI가 감정을 수치화하는 순간 감정의 다층적 현실은 단일 지표로 단순화되고 인간의 경험은 통계적 사실로 축소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AI는 감정의 복잡성을 비추어 드러내는 반사체(reflective surface)로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적 AI는 감정을 대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을 책임 있게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다시금 성찰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AI는 수많은 마이크로 메모리얼이 남긴 흔적을 기록합니다. 이 작은 감정의 단위들이 모여 사회적 감정의 집합적 초상(collective portrait)을 형성합니다. 이때 AI의 역할은 기록 행위의 주체라기보다는 감정의 잔향을 반사적으로 재현하는 감정의 메타기록자(meta-recorder)에 가깝습니다. 즉, AI는 감정의 인식론적 주체가 아닌 감정의 반사적 매개체로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며 기록했는가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I의 감정윤리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대체할 수 있는가?', 나아가 'AI가 감정 기반의 기록 평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AI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책임 있게 반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AI 시대의 기록학은 거시적 메모리얼의 질서가 해체된 이후, 각 개인의 마이크로 메모리얼이 얽혀 만들어내는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운 기억의 윤리와 사회적 감정의 조화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나가며
괴짜전 대화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기록이 더 이상 행정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록은 기억으로 생성되고, 감정으로 유지되며, 사회적 공감으로 살아남습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활동의 고정적 재현물로서의 개념 탐구」(설문원, 2019)에서는 기록을 '활동의 고정적 재현물'로 정의하며, 그 재현 과정 속에서는 행위자의 인식과 정서, 상황적 맥락이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정의는 기록을 단순한 사물(object)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감정적 흔적을 고정한 사회적 행위물(social act)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AI는 이러한 활동의 재현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새로운 차원에서 비추는 매개체로서 작동할 수 있습니다. AI는 인간의 감정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그 감정이 남긴 패턴과 흔적을 반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기록 행위의 의미를 확장합니다.
따라서 기록의 평가는 감정의 윤리를 포함해야 합니다. 여기서 AI는 객관성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닌 인간의 감정이 투영된 활동의 고정적 재현을 다시 비추는 거울임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기록을 왜곡시키는 변수가 아니라 인간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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