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문서와 전자기록
근현대 공공 행정과 문서관리 문화는 종이문서를 전제로 한 규칙과 양식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문서번호, 결재란, 상신과 결재의 흐름 등 모든 체계는 ‘종이’라는 물질 기반 위에서 작동했죠. 전자정부법 시행 이후 기록관리 환경은 종이에서 비트(bit) 환경으로 전환됐지만, 양식과 형식, 프로세스는 여전히 종이시대의 관습을 전자적으로 ‘변환’했을 뿐 근본적 변화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전자기록관리는 종이문서의 양식과 형태를 그대로 모사하는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 디자인 기법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스큐어모피즘은 디자인에서 실물 대상의 질감, 형태, 작동 방식을 시각적으로 모방하여 디지털 환경에 구현하는 기법입니다. 한때 애플의 디자인 전략으로 각광 받았고, 최근에는 글라스모피즘(glassmorphism)과 같은 새로운 트렌드에 샤라웃 되기도 합니다. 스큐어모피즘은 UX 관점에서 사용자에게 익숙함을 주고, 학습 비용을 줄이며 적응력을 높이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현실의 불필요한 장치와 형태를 디지털 공간에 억지로 구현함으로써 오히려 사용자 경험을 방해하거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저해한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전자기록관리를 살펴보면, 여전히 인쇄 해놓고 보았을 때 90년대 공문서와 다를 바 없이, 종이문서의 양식과 내용을 최대한 재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기록의 생애주기마저도 컴퓨팅 환경에서 관리하고 있을 뿐 기존의 종이기록이 생산되고 보존, 폐기되는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자기록관리 vs 디지털기록관리
우리는 종종 ‘전자’기록관리와 ‘디지털’기록관리를 혼용합니다. 용어가 다르다면 개념에도 당연히 차이가 있어야 할 텐데요. 최근 방문한 명지대학교 제45회 실버랩 세미나에서 제시된 ‘기록관리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종이기록관리(old paradigm)
→ 전자기록관리(intermediate paradigm)
→ 디지털기록관리(new paradigm)명지대학교 제45회 실버랩 세미나, <기록학 진로탐색>, 한능우
1차 전환(종이 → 전자)은 종이를 비트 중심의 환경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물리적으로 흩어져 있던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 집약하고, 공간적 한계를 넘어 열람 가능하도록 ‘전자화(digitizing)’합니다. 이 비트 중심의 사고는 ‘보존’을 목표로, ‘보존 효율 극대화’를 가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2차 전환(전자→디지털)은 ‘데이터 중심’ 사고로의 도약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세상 한 가운데에 데이터가 있습니다. 우리는 불과 2~3년 만에 방대한 데이터를 소화해 스스로 학습하는 소프트웨어를 삶의 필수적인 도구 중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데이터는 기록인들이 습관처럼 부르짖는 ‘활용’에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당연하게도 기록물은 한 건만 존재할 때보다 그 정보의 탄생배경, 인과관계, 생산과 이용 주체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서 가치가 높아집니다. 이런 맥락은 곧 정보들이죠. 개념적으로 데이터가 상호 관계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졌을 때 비로소 정보로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개별 아이템으로 낱낱이 분리된 수십만 건의 기록물에는 적게는 수 개, 많게는 수십 개의 메타데이터가 딸려 있습니다. 한 건의 기록물 당 10개의 메타데이터가 정리되었다고 할 때 원문울 포함해 수백만 건의 데이터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기록관리의 DX(Digital Transformation)
많은 기업이 문서 전자화를 디지털 전환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업 문서 DX사례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기존 문서를 전자화하는 것에 초점을 둔 사례도 많습니다. 그러나 포인트는 문서의 활용성입니다. 비전자문서를 전자화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와 비정형 데이터를 추출하여, 조직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활용 가능한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기록관리의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종이기록의 비트 변환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최근 공공데이터포털은 방대한 데이터 개방과 API 지원을 통해 행정,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 서비스와 창의적 활용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맞춰 국가기록원, 서울기록원 등 주요 영구기록물관리기관들은 메타데이터와 기록물 정보를 Open API, JSON, XML 등 다양한 포맷으로 제공하며, 실시간 데이터 연계와 외부 활용을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기록물은 시스템에서 목록으로 관리되고, 파일 형태의 원문을 단순 제공하고, 메타데이터는 오직 상세검색과 분류트리만을 위해 사용되고, 웹기록물이나 행정정보 데이터세트 등 일부 범위에 한정된 데이터로 개방되며(공공데이터법 시행령 제1조의2), 실질적 창의적 활용 경로의 부족 등 한계가 존재합니다. 법·제도적 개선과 데이터 품질 제고, 개인정보 등 제약 해소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기록관리의 디지털 전환이 진정한 혁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환경과 인프라의 전체적 변화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기록관리의 디지털 전환은 기술적 변화가 아닙니다. 기록 종사자, 개발자, 연구자, 크리에이터, 창업가, 교육자 등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생태계의 기반입니다. 데이터 제공 방식을 다각화하고 개방과 공유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기록관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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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bEaN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럼 현장의 공공아카이브에서 단기간 내에 시작할 수 있는 건 Open API, JSON, XML 등 다양한 포맷으로 제공하는 것이겠죠? 그이후에 어떠한 전략을 가져가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디지털 전환이 진정한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이야기가 심도 있게 오가면 좋겠어요. 문송(?)하기만 한 현장의 수많은 기록인들이 목말라 하지만 그만큼 장벽도 높은 것 같습니다. (...)
tolérence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너무 광범위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었습니다. 유수한 기업들은 관리를 위한 관리가 아니라 효율과 생산성을 위해 문서를 바라보고 고민하고 있고, 이에 문서와 아카이브를 주목하는 시각은 창의적이고 또 유용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현재 자리에 안주하며 이런 주워들은(?) 감각으로 쉽게 쉽게 포괄적인 문제인식을 제시한 건 아닐까... 디지털 전환을 위한 혁신에 대해 지금 생각나는 대로 주제를 던져보면 공공기관의 hwp 포맷(의 갈라파고스화), 기록(또는 기록정보와 데이터 유통)의 새로운 생애주기, 공공기관 조직문화와 관행,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전략적 선택과정에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LLM과 AI를 어떤 단계에 어떤 방식으로 도입할 것인가 등), 나아가 ERP, 데이터의 활용에 대한 시민들의 디지털 리터러시 격차... 너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너무 거대한 담론이라 뭐부터 건드려야 할지 실천할 수 있을지가 큰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할지, 그 목표와 목적도 지금은 불분명하고요. 저 역시도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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