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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짜리 바나나는 썩어도, 아카이브는 남는다

기록을 통해 언제든 다시 살아나는 미술

2025.12.11 | 조회 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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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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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5천만 원짜리 간식

미술관 벽에 회색 덕트 테이프로 떡하니 붙어 있던 바나나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1965- )의 작품 <코미디언(Comedian)> 이야기다. 2019년 무려 1억 5천만 원에 팔린 이 작품을 전시 기간 중 한 관람객(실은 행위예술가)이 "배가 고프다"며 떼어 먹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1억짜리 작품이 뱃속으로 사라졌다고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술관 큐레이터는 침착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근처 시장에서 사 온 새 바나나를 다시 벽에 붙였다.

이 작품은 이렇게 2019년 처음 전시에 공개될 때부터 관람객들로부터 떼어 먹히기 일쑤였는데,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마우리치오의 개인전 기간에 국내 모 대학 학생이 먹어버리곤 자랑스레 인증샷을 남긴 적이 있다. 최근 2024년 경매에서 <코미디언>은 무려 620만 달러(약 91억 원)에 낙찰되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도대체 컬렉터는 무엇을 산 걸까? 고작 동네 슈퍼에서 3천 원이면 사는 과일을, 게다가 말 그대로 떼어 먹히기 일쑤인 작품을 억대에 산 호구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아카이브'를 구매한 것이다.

 

설치안내서와 진품인증서

현대미술에서 우리가 알던 미술의 상식이 깨졌다. 과거에는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 대리석에 새겨진 3차원의 형상이 곧 예술이었다. 그게 불타거나 깨지면 예술도 끝이었다. 하지만 현대미술, 특히 개념미술의 세계에서는 물질(바나나)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작품은 작가가 발급한 '진품인증서(Certificate of Authenticity)'라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이 보증서에는 보통 작품의 설치 방법이 담긴 지시사항(Instruction)이 포함된다. <코미디언>을 구매할 경우, 기본적으로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롤 한 개씩을 받는다. 그리고 바나나가 썩을 때마다 교체 방법을 알려주는 설치안내서와 진품인증서가 함께 제공된다. 14장짜리 설치 안내서에는 “땅에서 175㎝ 높이에 바나나를 설치하고 7~10일에 한 번씩 교체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땅에서 175㎝ 높이에 바나나를 설치하라.
7~10일에 한 번씩 교체하라.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 설치안내서 중에서

 

이 기록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 바나나를 계속 먹어 치우든 간에 작품은 존속한다. 즉, 1억 원의 가치는 썩어 문드러지거나 뱃속으로 사라질 바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술로 정의하고 증명하는 기록에 있는 셈이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LA 로스의 초상)>, 1991.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LA 로스의 초상)>, 1991.

달콤함 대신 남은 사랑

여기 진짜로 관람객이 먹어서 없애버려야 완성되는 작품이 있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무제(LA의 로스 초상)>이다. 전시장 구석이나 바닥에는 사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관람객들은 이 사탕을 자유롭게 집어 먹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탕 더미는 무너지고 빈 공간, 바닥을 드러낸다. 물리적으로 작품이 '소멸'해가는 것이다. 작가는 소멸을 의도했지만, 동시에 다음 내용이 담긴 '지시문'을 남겨서 전시 기간 동안 작품을 유지할 수 있는 규칙을 세웠다. 

 

사탕의 총무게는 175파운드(약 79kg)를 유지할 것.
사탕이 줄어들면 다시 그만큼 채워 넣을 것.

 

여기에서 쌓여있는 사탕의 총 무게 175파운드는 작가가 사랑했던, 에이즈로 서서히 야위어 죽어가던 연인 로스(Ross)가 건강할 때의 몸무게다. 관객이 사탕이 사라지는 모습을 체험하며 서서히 건강을 잃어가던 연인의 부재를 함께 경험한다면, 기록에 의해서 다시 사탕이 다시 채워 넣어지며 작품의 존재는 끊임없이 부활한다. 기록은 여기서도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죽은 사랑을 되살려내는 달콤한 부활의 레시피로 작용하는 것이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로스모어II)>, 1991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로스모어II)>, 1991


이 작품들을 2012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직접 마주한 적이 있다. 당시 전시장 바닥에는 각각 녹색과 은색의 사탕들이 깔려 있었다. <연인 로스가 작고하기 직전인 몸무게 34kg에 무게를 맞춘 <무제(로스모어II)>와 에이즈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의미를 담은 <무제(플라시보)>(1991)가 그것이다. 사탕을 가져가도 된다는 안내원의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집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입안에서 녹는 사탕의 단맛을 느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건 일반적인 사탕 하나가 아니라, 기록의 지시문을 통해 끊임없이 남기고자 했던 누군가의 '생명'이자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작품과 기록의 경계 허물기

미술아카이브는 완결된 행위의 증거를 보존하는 것보다  창작의 과정과 맥락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과거에는 기록이 작품을 설명하는 보조자료의 역할에 위치했다면, 앞서 언급한 바나나나 사탕 더미의 사례처럼, 오늘날의 기록은 작품의 존재 자체를 규명하는 원천 자료이자 작품 그 자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기록이 없으면 작품도 성립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사례의 작품처럼  '작품'과 '기록'의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완전히 허물어지는 현상, 이것이 오늘날 미술아카이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재현의 무한한 가능성

아카이브는 작품의 물리적 수명을 연장하는 곳이 아니라, 재현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보존하는 기록은 작품을 다시 실행하기 위한 일종의 '소스 코드'와 같다. 100년 뒤 시점이든,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도시든 장소와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기록된 지시사항이 존재하고 그것이 수행되는 순간, 작품은 물리적 실체와 상관없이 언제든 다시 성립될 수 있다.

결국 현대미술에서 아카이빙이란, 사라지는 물질을 애써 붙잡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실행 가능한' 상태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화려한 전시 뒤편에서 수행되는 미술기록 관리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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