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아시아 미술 기록화의 시작
2000년에 설립된 홍콩에 설립된 비영리 독립기관인 Asia Art Archive(亞洲藝術文獻庫, 이하 AAA)는 아시아 현대미술 관련 자료(서적, 도록, 잡지, 초대장, 시청각 자료 등)를 수집하는 비영리 독립 연구센터로, 홍콩을 비롯하여 아시아에서도 최초의 기관이다. 설립자인 클레어 수(Claire Hsu)는 런던에서 중국미술을 공부하다가 아시아 현대미술 자료의 부재를 경험하고 2000년에 홍콩으로 돌아와 AAA를 설립하였다. 아시아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부재가 극심했던 문제를 해소하고, 아시아 현대 및 근현대 미술 기록에 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적인 목표였다. 더욱이 홍콩은 여러 아시아 국가 및 도시들과 인접해 있어 지리적, 문화적으로 동시대 아시아 미술의 기록과 네트워킹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2005년, 국제 워크숍: Archiving the Contemporary
AAA는 설립 초창기인 2005년에 “Archiving the Contemporary: Documenting Asian Art Today, Yesterday, and Tomorrow”라는 주제로 국제 워크숍을 개최하여 ‘동시대’를 기록하는 아카이브의 필요성과 미래 지향적 시각을 널리 알렸다. 또한 지난 20년을 되돌아 보며 동시대 미술조차도 망각될 위험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기록 보존이 언젠가는 역사적 자료가 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를 위해 디지털 유형, 분류 체계, 소장 정책, 보존, 언어, 접근성, 그리고 기술 등의 문제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초창기부터 AAA는 자료의 디지털화와 검색 포털, 메타검색엔진 구축을 추진했다고 밝히며, 전통적 도서관이 아니라 ‘네트워크’이자 ‘플랫폼’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2005년 당시만 해도 AAA는 아직까지 15,000여 건의 기록을 소장하는 등 아시아 미술을 포괄할 만한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중국 본토나 홍콩 관련 자료가 대다수였고 다른 아시아 국가의 자료는 상대적으로 부족했기에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편, 이 워크숍에서는 수집 기록의 질적인 관리에 대한 필요성이 함께 지적되기도 하였으며, 단순한 자료 수집뿐만 아니라 주요 작가 인터뷰, 학술대회 개최, 번역 등 적극적인 기록화와 연구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AAA가 아시아 미술의 리더로서 적합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보다 투명하고 비판적인 방식의 운영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초창기부터 이렇게 AAA의 역할이 강조된 이유는 아시아 최초의 미술 전문 아카이브이자, 비영리단체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AAA는 기본적으로 개인, 재단, 기관, 기업, 정부 등의 후원과 기부에 의해서 운영된다. 개인 후원자는 일반 기부를 하거나 정기후원을 통해 패트론 프로그램(후원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또한 예술가와 갤러리 등으로부터 기증 받은 미술품을 활용해 연간 자선 경매를 개최하기도 하고, 기업이나 기관과는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하여 특정 프로젝트, 연구, 전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에 따라 투명한 운영과 공공의 의무를 요구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기관으로서 선구적인 방식들을 시도하며 일찍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후 개선사항들을 반영하면서 현재 AAA는 아시아 미술의 지역적,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 COLLECTIONS: 디지털 기록의 공개
2012년에 AAA는 웹사이트를 새롭게 공개하며 디지털화된 기록들을 온라인 상에 공개하였다. 설립 초기부터 기록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강조해온만큼 주요한 1차 수집 자료들을 디지털로 저장해 왔고, 이러한 기록에는 디지털 이미지, 서신, 작가 개인 자료, 영성, 음성 등의 다양한 자료들이 포함되었다. 현재의 웹사이트 메뉴 ‘COLLECTIONS’에서도 지금까지 수집한 기록을 검색, 확인할 수 있다. AAA의 주요 컬렉션(Special Collection)은 특별한 주제에 맞추어 수집한 프로젝트 기록과 개인이 기증한 개인(작가, 연구자, 큐레이터 등) 컬렉션 기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웹페이지도 그에 따라 각 컬렉션마다 분류 및 정리된 계층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AAA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록은 디지털화 작업 및 기술(description)을 마친 이후, 원본은 원래 소유자에게 반납한다. 특별히 기증하기로 지정된 기록물만 별도의 절차를 밟아 소장하게 된다(소장되는 기록은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별도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직원에게 요청하면 일반 방문객도 열람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AAA는 물리적인 소유의 개념보다는 정보의 공유에 중점을 두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AAA는 자신들의 웹사이트 내부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라인 학술 저널 제공 서비스 사이트인 JSTOR에 9,800건의 동시대 아시아 미술 이미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 이미지들은 중국, 홍콩, 대만, 일본, 한국,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인도, 파키스탄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의 작가들과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작가들, 그리고 아시아에 거주하는 비아시아계 작가들과 관련된 아카이브에서 선정되었다. 또한 Roberto Chabet, Lu Peng, Wu Shanzhuan, and Zhang Xiaogang 등의 작가, 미술사학자, 비평가들이 기증한 개인 아카이브와 아시아 전역의 현대미술 설치물, 미술 행사(전시,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등)에 대한 기록도 제공하고 있다.
AAA 방문기: 유연과 협력
지난 3월 말, 직접 홍콩 AAA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AAA는 홍콩 셩완 지구에 위치한 할리우드센터 빌딩 11층에 자리잡고 있다. 아카이브라고 해서 하나의 건물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외부에서는 간판도 보이지 않아 처음 찾아가려면 조금 헤맬 수 정도로 비교적 아담한 규모의 공간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서고와 같은 자료실이 보이는데, 안쪽에는 테이블이 놓여있는 자료실 형태의 방들이 여러개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2022년 리뉴얼을 통해 자료 열람뿐 아니라, 전시, 교육, 퍼포먼스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AAA는 월요일부터 토요일(10시에서 18시)까지 일반 방문객에게 열려 있으나, 전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방문한다면 사전에 일정을 알아본 후에 투어나 교육에 맞추어 신청하고 가는 것이 좋다.
AAA는 약 12만 점의 기록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70%는 기증된 기록이다(2023년 기준). 아카이브에는 도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검색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관한 도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동아시아권 특히 한국미술에 관한 연구보다는 중화권이나 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프로젝트가 활발한 것 같아 아쉬웠다. 모든 도서자료들을 살펴 보지는 못했지만,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한국미술 1900-2020』(2021) 번역본을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방문 당시에는 남아시아권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예술가인 여성 작가 Sheba Chhachhi와 Lala Rukh의 전시가 개최되고 있었는데, 투어 프로그램은 전시에 관한 설명으로 구성되었다. AAA 개관 25주년 기념전이기도 한 전시 《In Our Own Backyard》를 위한 공간은 독립된 장소에 마련된 것이 아니라, 서고, 교육실과 모두 통합되어 있었다. 책장의 선반, 기둥, 테이블이 전시를 위한 공간이 되어주었고 공간과 전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 외에 다른 활동이나 퍼포먼스 등도 동일한 공간에서 진행한다고 했다.
AAA의 유연성은 장소를 구획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 보였다. AAA에는 아키비스트뿐만 아니라, 연구자, 사서, 큐레이터, 교육자, 에디터가 하나의 팀으로 협력하고 있다. 전시 구성과 기획 과정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아키비스트와 큐레이터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한다기보다는 아카이빙과 전시를 동시 진행하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여러 전문가가 작품과 기록의 연관성을 함께 찾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업무 환경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AAA는 비영리기관으로서 미술관의 관점과 독립예술센터의 운영방식을 결합한 독특한 기관이다. 따라서 특정하게 소속된 국가나 기관의 정책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연구 및 확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일찍이 한국 현대미술 온라인 자료 보급에 도움이 되었으며, 국내 미술 디지털 아카이빙의 개발 측면에서도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홍콩을 거점으로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중화권과 남아시아 중심으로 연구 및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한국미술 연구 및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도가 낮다는 것이다.
동시대 기록의 수집, 디지털화, 아시아 미술 중심이라는 키워드로 대안적인 미술 아카이브로서 국제적 입지를 다지고 있는 AAA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니 국내의 실정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에 비추어보면 우리나라에 이미 설치되었거나 설립된 미술 아카이브들의 보다 적극적인 국제 활동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진다. 더불어 향후 국내에서 미술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유연하고 창조적 시도가 가능한 대안 아카이브들의 설립 활성화도 기대해 보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상위 기관의 정책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AAA와 같은 독립기관 운영 모델이 하나의 답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Antoinette, M. (2019). Collaging Asia: Asia Art Archive as Shaper of Knowledge.
Choy, L. W. (2005). Tomorrow’s Local Library: The Asia Art Archive in Context. Yishu: Journal of Contemporary Art,4.
[기획연재 ‘아카이브의 과거-현재-미래’ Ⅲ] -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AA) 사례를 중심으로, 더아트로, 2014.08.21. 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1072&b_code=10e
Asia Art Archive, JSTOR, https://www.jstor.org/site/artstor/AsiaArtArchive-100144827/?so=item_title_str_asc&searchkey=1745234793118&pagemark=eyJwYWdlIjoyLCJzdGFydCI6MjUsInRvdGFsIjo5ODAwfQ%253D%253D
Asia Art Archive, https://aaa.org.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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