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을 열며
말은 어렵고, 글은 두렵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첫 문장을 쓴다. 첫 글의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그저 지금의 생각을 나누는게 계속 써나갈 수 있는 동력같아, 최근 본 영화에 대한 몇가지 상념들을 옮겨본다.
아카이브라는 일이 나의 삶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줄곧 이 세계, 우리가 속한 세상을 표상하는 하나의 아카이브를 그려보곤 했다. 나를 둘러싼 소중한 인풋들과 인사이트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을 그곳의 어디에 꽂아두면 좋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충분히 오래도록 꽂아두어도 좋을 이야기 일까 하는 상상도. 다분히 N(직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공상에 다름아니다
극영화의 언어가 기록이 된다면
지난 주말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아노라>를 보았다. 영화는 뉴욕에서 스트리퍼이자 성노동자로 일하는 애니가 그가 일하는 바에서 러시아 부호 2세인 반야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즉흥적으로 결혼에 이른 뒤, 이를 알게 된 그들 부모가 그들의 고용인을 통해 이들의 결혼을 무효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 고용인 중에 워어리어(대충 두들겨부수고 겁주는 역할) 이고르가 있다. 애니는 밤새 도망간 반야를 찾아헤매며 이고르의 따뜻한 시선을 받는다.
이 영화는 엔딩 씬이 닫히자 마자(연출 자체가 그렇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이 세계 아카이브(이름을 붙여본적이 없어서, 일단 이리 부르기로 한다, 이하 <이 세계 아카이브>)에 반드시 꽂혀야 할 작품인 걸 알았다. 큰 정보없이 보게 된 영화는 첫 장면부터 상당한 노출장면에 깜짝 놀라 꽤나 심각한 마음으로 보기 시작해서는, 어느새 성노동의 고단함과 돈의 매커니즘의 치열함이 특수한 일이기보다 노동의 보편성으로 읽혀졌다. 그녀를 따라가며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말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을 했으면 하고 바라다가, 결국은 그렇지 못할 거라 자조하다가, 장면 장면들에서 마주치는 우수꽝스러운 순간에 웃음이 새어나오며, 이 영화가 실은 코메디 영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엔딩 씬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삶의 고단함과 고단함을 내려놓고 싶은, 어딘가 기대고픈 마음과 어떤 수치심과 계속 살아가야하는 남은 삶의 무게와 그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에 같이 눈물이 터지고 만다. 그리나 감독은 그 연민이 지속되지 못하게 닫힌 화면을 통해 감정을 차단한다. 감독의 이런 연출은 그녀의 삶에 대한, 그리고 이입된 나의 감정에 이성을 부여하는 듯, 이 감정의 정체에 대해서 묻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아키비스트로서의' 감독의 개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며 다른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들과 다르덴형제 감독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 아카이브>에 같은 카테고리에 꽂혀있는 영화들인 셈이다. 이들 작가와 감독들은 <이 세계 아카이브>의 아키비스트 같다. 때때로 다큐멘터리와 논픽션 보다 극영화와 소설이 좀 더 안전하게 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 같다. 허구의 탈을 썼기 때문에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는 것. 아니 에르노의 글 속에는, 이토록 솔직하고 스스로 끔찍하게 여길 그런 감정들마저 적나라하게 기술된다. 이토록 솔직하고 통증이 느껴지는 텍스트들은 어느새 위로가 되고, 인간다움에 대해서,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들 영화와 소설이 모인 카테고리를 명명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도가 적절할 것 같다. 그 속에서 영화는, 글들은 인간의 지향과 삶 자체를 기록한다. 늘상 아름답기만 하지 않고, 슬프고, 아프고, 웃기고, 가끔은 아름답고, 또 두려운 인간의 이야기들이 담긴다. <아무르>, <세상의 모든 계절>, <로제타>, <내일을 위한 시간>,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영화들의 이름을 열거해 본다.
<아노라>의 이고르는 그저 애니를 따뜻한 눈으로 쫓는다. 그녀 스스로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분투하고 더 나은삶을 살려는 그녀의 고단함에 연민을 가지고, 그는 그의 방식으로 위로를, 마음을 전한다. 그 지켜봄의 시선은 마치 세상을 대하는 감독의 시선같기도 하고, 내가 믿는 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마치며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면서, 우리 아카이브가 가져야 하는 핵심기록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내내 한다. 그런 기록이 발견되기를 바라면서 아카이브 만드는 일을 조금씩 조금씩 해나간다. 아주 아주 멀겠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조금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이야기와 조금은 닿은 그런 아카이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기록을 읽다보면 인간들이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 어디에 닿으려 했는지, 그래서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지 같은 것들이 남았으면 좋겠다.
모처럼 영화를 보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서 너무 감상적인 글이 되고 말았지만, 부끄러움을 딛고 첫 글을 닫는다. <이 세계 아카이브>에 담은 영화<아노라>에 대한 짧은(?) 기술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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