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관리 전문직으로서 나의 직업 영역은 '민간'에 해당한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이 기록학 사회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민간영역’이라는 말을 생각보다 더, 꽤나, 의외로 별 고민 없이 쉽게 써왔다는 것이다. 나는 기록연구사도 아니고 공공기관과 협업을 하는 일도 적기 때문에 "저 기록연구사 아니예요." 대신 "민간에서 일해요."로 소개하는 게 긍정적 화법으로 잘 통했던 것 같다.
아카이브 분야에서 공공과 민간을 나누는 이 이분법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어느 순간 '민간영역'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두뇌 한 쪽 구석에서 '야 뭔가 이상하지 않냐'는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요즘엔 대부분의 학회나 세미나를 가면 꼭 한 마디씩 나오는 이 문제의식.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민간영역’이라는 단어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민간영역, 쉽게 쓰이는 말
‘민간영역’이라는 단어는 의외로 만능 카드처럼 쓰인다. 공공기관이 공공이 아닌 모든 것을 통칭해 부를 때 유용한 표현이다. "다채로운 민간 소식을 알려드릴게요." 같은 문장을 보면, 세분화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묶어버리기엔 부족한 개념들을 정리하는 데 편리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민간’이라는 단어는 공공기관 시선에서 기관의 외부 나 타 분야를 바라볼 때 일종의 반대급부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런데 아카이브・기록관리 분야에서는 마치 공공기관이 기본값이고, 공공기관이 아닌 모든 기록 관련 단위는 그냥 ‘민간영역’으로 퉁쳐지는 것 같다. (아니라고 하신다면...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제가 느낀 바에 불과하니 chill 부탁 드립니다.)
그럼 민간영역에는 공공성이 없나?
민간영역에 공공성이 없어서 민간인 것도 아니다. 영리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조직이 있다. 공공성을 실현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본질적 사명이다. 그런데 때로는 적극적인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시민단체 등이 위탁 받거나 자발적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영역’과 ‘민간영역’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과연 적확할까?
한편 기록이 갖는 사회적 가치도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및 ESG 활동, 비영리 조직의 아카이브, 지역 공동체에서 생성된 기록 등은 공공기관 기록과 다르지만 결코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공기관이 관리하지 않는 기록이야말로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며, 장기적인 의미에서 공공성과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치는 일찍이 2007년 공동체의 공감과 함께 기록법 전부개정에서 제도화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무심코 민간을 공공의 대척점 격으로 보는 시각을 저도 모르게 고수해 온 것은 아닌지.
민간영역이라 통칭해 온 사회 전체는 이러한 공공성과 영리 추구, 자아 실현 등 다양한 목적이 있다. 그러기에 서로 겹쳐 있는 밴다이어그램처럼 공공성도 공공기관과 민간의 교집합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혹자는 공공/민간을 칼같이 가르는 게 더 부자연스럽다고도 한다.)
용어는 누가 만들고 유지하는가?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한다. 그렇다면 (아카이브 분야에서의) ‘민간영역’이라는 개념은 과연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민간영역’이라는 용어가, 정작 이 분야 바깥에서는 다르게 쓰이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누는 공공과 민간의 경계는 명확하다기보다 정책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설정된다고 본다. 공공과 민간을 나누는 기준은 법적·제도적 맥락, 사업의 성격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어쩌면 이미 많은 사람들과 기관, 조직, 단체들이 아카이브를 공공/민간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 실행하고 있는데, 우리만 그 용어의 적합성 여부를 끝없이 들이대며 스스로 늪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닐까?
미묘한 위계감
솔직히 말하자면 때로는 기록관리 관련 공공기관과 ‘민간영역’ 사이에서 미묘한 위계감을 느낀 적이 있다. 단순한 역할 구분이라기보다는, 기관은 지도, 관리, 감독하는 입장이고 민간은 수혜자이자 그 대상이 되는 듯한 기류랄까. 역량과 지식자산이 있는 독립적 주체들이 공동의 목표를 함께 추구해 나간다는 뉘앙스는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지정기록물제도의 탄생, '공공기관 기록물'에서 '공공기록물'로의 명칭 변경 등 국내 기록관리 제도가 정착되던 시기를 기해서, 공공 대 민간 구도로 기록 활동을 구분하는 시각이 레코드 매니지먼트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제도적 필요성이나 관리대상의 구분을 위해서 이용된 사고방식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례대로 그저 계속 쓰는 것은 과연 괜찮을까?
2022년 기록관리 정책포럼에서는 ‘민간영역’ 대신 ‘비(非)공공영역’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 용어에 대한 평가는 여러분에게 맡기겠지만, 적어도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음은 분명하다. 단 이런 의식이 공론화 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단어를 바꾼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민간영역’의 다양한 스펙트럼
세분화해보면 '민간영역'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차원이 있다. 조직의 성격에 따라 아래와 같이 나눌 수도 있다.
아래 리스트는 Chat GPT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
1. 공공기관 및 준공공기관
- 중앙정부기관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정부 부처 등)
- 지방자치단체 (시, 도, 군, 광역시, 자치도청 등)
- 공기업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 준정부기관 (국민건강보험공단, 한국연구재단 등)
- 지방공기업 (서울교통공사, 부산도시공사 등)
- 출자·출연기관 (문화재단, 연구기관 등)
2. 비영리 및 시민사회 단체
- NGO (국제적십자사, 환경운동연합 등)
- 협동조합 (생협, 금융협동조합 등)
- 사단법인 및 재단법인 (사회복지법인, 장학재단 등)
- 종교단체 (교회, 사찰, 성당, 수녀원, 종단 등)
- 노동조합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기업, 장애인 고용 기업 등)
- 자선단체 및 봉사단체 (푸드뱅크, 세이브더칠드런 등)
3. 학술 및 교육기관
- 대학 및 연구소 (국립대, 사립대, 과학기술연구소 등)
- 초·중·고등학교 및 사립학교 (국제학교, 대안학교 등)
- 직업훈련기관 (폴리텍대학, 기술교육센터 등)
- 학술단체 및 학회 (역사학회, 기록관리학회 등)
4. 경제 및 상업단체
- 대기업 및 중소기업 (삼성, 현대, 지역 중소기업 등)
- 벤처기업 및 스타트업 (IT 스타트업, 바이오기업 등)
-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 금융기관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 상공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 지역상공회의소 등)
5. 예술, 문화 및 미디어 단체
- 박물관 및 미술관
- 공연예술단체 (국립극단, 오케스트라 등)
- 출판사 및 방송사 (KBS, JTBC, 독립출판사 등)
- 영화제 및 문화축제 조직 (부산국제영화제, 문학제 등)
아카이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위 항목별로 최소한 하나쯤 아카이브가 있음을 알고 있을 테다. 몇몇 아카이브는 전 국민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고, 몇몇은 비용을 지불하고 콘텐츠를 구매해야 하며, 몇몇은 비공개가 원칙이다. 개인 단위에서 소셜 미디어, 블로그, 온라인 카페, 웹사이트로 만드는 아카이브는 셀 수도 없이 무진장 많을 것이다.
기록의 내용적 성격 등으로도 분류해 볼 수 있다.
- 개인이 소비를 하면서 생산한 기록
- 개인의 일정관리, 일기, 마음챙김 기록
- 개인이나 소모임의 컬렉션 또는 콜렉팅 행위 결과물
- 조직의 사적 업무에 의해 생산한 기록(회계자료, 기업의 프로젝트 문서 등)
- 공공 업무와 관련이 있지만 민간인이 생산한 기록
- 공공기관 외부에서 획득(수집, 구매 등)한 기록
- 특정 공공기관 출자 및 위탁사업 활동, 가령 문화도시 기록
- 문화예술가의 작업 관련 개인 기록
-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개인 아카이브
- 시민 저널리즘을 통해 생산된 기록 모음
- 천재지변, 사회재난 등 재난 기록
- 기타 등등...(지면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여기서 자제를)
단순히 '공공 기록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과 가치를 반영하는 인간활동의 흔적이다. 이처럼 ‘민간영역’이라고 단순하게 묶어버리기엔 너무 다양한 요소들이 섞여 있다. 오히려 ‘공공기관이 아닌 모든 것’이라는 식의 정의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봤다.
작년 4월, 필자는 민간영역에 대한 아카이브 관련 종사자들의 생각이 궁금해 별 고민 없이 설문조사 비스무리한 것을 한 적이 있다.
재미로 한 설문조사에 질문도 단순하고 응답자 수도 적으니 참고로만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 설문조사는 비록 소수의 응답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민간 아카이브’를 정의하고 있었다. 공통적으로는 공공기관이 아닌 주체들이 운영하는 기록 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운영 주체, 기록의 대상, 목적, 활용 방식 등에 있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응답자들은 민간 아카이브가 다루는 기록을 개인과 조직의 서사, 자발적으로 수집한 기록, 기억, 행동, 목소리 등의 키워드로 설명했다. 단체 기록, 시민 기록, 공동체 기록, 기업 기록 등 매우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인상 깊다. 이러한 기록들은 특정한 제도적 틀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목적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수집된다는 점에서 공공기관의 기록과 차별화된다.
누가 운영하는가?
민간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곳에 대한 질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세금으로 운영되지 않은 모든 곳", "누구나", "시민단체,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개인, 기업" 등 특정한 한정적 개념이 아니라 광범위한 주체들이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즉, 공공과 민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목적과 방식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 만드는가?
아카이브를 만드는 이유 역시 개인의 정체성 확립, 기록의 전승, 기억을 남기기 위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기 위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재미로", "관광지처럼 활용하기 위해" 등의 답변도 나왔다는 점이다. 기록의 공공성과 보존의 가치 외에도, 흥미와 오락적인 요소도 민간 아카이브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누가 관리하는가?
민간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에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기록관리 전문가", "아카이브에 관심 있는 누구나", "전공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필수는 아니다" 등의 답변을 통해 민간 아카이브 관리자의 자격이 반드시 특정 직업군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누구나 기록을 보존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타인을 음해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의견은 아카이브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누가 기록을 활용하는가?
기록을 열람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역주민", "인용과 참조를 위해", "흥미 위주", "호기심이나 공감대를 위해", "콘텐츠 제작을 위해" 등의 답변이 나왔다. 연구자나 공공기관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기록을 활용하는 중요한 사용자층이며,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스토리텔링과 문화적 경험의 요소로 아카이브가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민간’이라는 말이 주는 모호함
마지막으로 ‘민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에서는 "공공영역 외의 모든 영역", "공공기관이 아닌 것은 모두 민간"이라는 응답이 있었지만, 대다수 응답자는 이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리기 어려워했다. 이는 ‘민간 아카이브’라는 용어가 너무 포괄적이고 불분명하여 사람들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단순히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민간’으로 묶어버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
앞으로 ‘민간영역’ 퉁치기 금지
쓰고 보니 출구 없는 문제를 제시한 것만도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이 많은 이의 마음 속에 자리 잡는다면 이 글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좋은 타이밍을 만나 변화를 제안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 이 글을 계기로 각자 숙성한 의견과 나름의 방법론이 제 가치를 발휘해 좋은 해결책과 실행방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카이브의 종류와 성격이 다채로운 줄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각각의 색깔에 표딱지를 붙여주는 것도 좋겠다. 이미 다양한 아카이브 트렌드가 넘쳐나기에 그 흐름을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내일을 바꾸려면 오늘을 바꾸어야 한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민간영역'보다 입체적인 이름표를 매일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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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입사 면접에서 "우리(민간단체) 기록물도 공공성을 띄고 있는데 왜 공공기록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일하다보니 자연스러운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tolérence
많은 분이 두 영역 간극에 대한 크고 작은 경험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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