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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평가, 힘이 나지는 않지만 애쓰게 되는

2025.09.30 | 조회 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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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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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이렇게까지 하기 싫을건 또 없지 않나? 

 

일을 하다가 멍해지는 순간이 있다. 미루고 외면하고, 또 미루고, 정말 어쩔 수 없는 날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쉬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싫을 건 또 없지 않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런 방식으로 이 일을 해서는 내 업무의 본질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걸 알아서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구나. 어차피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애쓴들 알아줄 사람도 없어서 그렇구나. 

 

오늘도 그런 상태다. 나는 요즘, 생산부서 의견조회를 준비하는 중이다.   

 


대략 최종보스: “거기에 있는거 다 쓸 데 없는거 아니야? 다 갖다 버려!” (오해 금지. 효율적인 행정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상사다)

나: “네 그런데.. ‘버리려면’ 일단 뭐가 있는지 목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있던 기록물 40,000여 권에 대한 전수조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약 전담부서가 없어서 예산 배정과 사업 승인은 물론 입찰과 계약까지 직접 처리해야 했다. 도움은 없지만 간섭은 많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사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 43,895권에 대한 엑셀 목록이 만들어졌다. 그 기록물 중 84.7%는 현재 기록물분류기준표를 기준으로 보존기간이 경과한 상태였고, '고생 많았고 웬만하면 빨리 다 갖다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그렇게 35,000권이 넘는 기록물에 대해 각각 어느 부서로 생산부서 의견조회를 보낼 지 찾고 있는 오늘에 이르렀다.

 

이 기록에 대해 생산부서 의견을 줄 부서는 어디인가

 

이관을 통해 들어온 문서들이라면 이관 부서로 의견조회를 보내면 그만이지만, 이 문서들은 어쩌다 보니 여기에 모이게 된 기록물이어서 바로 대응을 시키기가 어렵다. 작성연도가 무려 '단기'로 기재되어 있는 1950년대 문서를 포함해서 60-80년대까지의 기록물도 많고 신설되었다가 폐지된 부서(또는 소속기관)의 것들도 다수 있다. 전수조사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보존상자와 기록물철에 있는 정보를 최대한 찾아서 입력해 두긴 했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의견조회 부서(안) 칸을 채워나갔다. 

 

첫 대상은 내가 이관을 받은 기록물. 이 기관에서 4년차인 나에게는 희소한 케이스다. 내가 입사 후 직접 이관을 받아서 배치한 문서인 경우, 그 이관부서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 부서로 의견조회를 보낸다. 끝. 행복. 만약 그 몇 년 사이에 폐지되었거나 타 부서와 통폐합되었거나 이름이 바뀌었다면, 그 업무를 승계한 부서를 찾는다. 내가 입사한 이후라면 그게 언제인지 대충 알고는 있으나, 확인을 위해 그 부서가 폐지된 대략의 시점을 기억해 내어 그 때의 기관 업무분장규정을 찾는다. 개정 주요 내용과 개정 대비표를 보고 확정한다. 

 

그 다음으로는 여러 해에 걸친 기록물평가심의 경험을 통해 생산부서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문서들을 검토한다. 단위업무를 필터링해서 찾기도 하고, 기록물철에 특정 키워드가 포함된 경우를 골라내기도 한다. 동종 대량 기록물이면서 생산부서가 한 곳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록물, 내가 속한 부서의 기록물, 그리고 부서 경비 지급처럼 전부서 공통업무에 속하는 기록물철이 이 단계에서 대부분 해결된다. 목록으로만 보기에 헷갈리는 경우 서고에 직접 갔다 오면 금방 해결할 수 있다.  

 

(하루종일 이 일을 붙잡고 있을 리는 없다. 문서 배부도 하고, 기록관리 담당자를 찾는 회의에도 가고, 상위 기관에서 ‘수기문서’와 관련해서 지시한 일에 대한 처리 방법도 생각하고, 정보공개청구 답변도 쓰는 사이 사이에 한다.)

 

그 다음으로 볼 것은 기록물에 남아 있는 정보를 활용해야 하는, 나를 잠시 탐정으로 만드는 문서들. 일단 심호흡을 하고, 상자나 기록물철 겉면에 쓰여진 (즉, 보유목록에 적혀 있는) 생산부서 정보를 찾는다. 여전히 그 부서가 존재하고 그 업무를 하고 있다면 깔끔하게 끝. 하지만 없는 부서라면, 이제는 내부망에 북마크 해 둔 70년사 책 PDF를 열 때다. 뒷부분에 실려 있는 ‘부서 변동표’를 열어 가늘고 긴 화살표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따라가 본다. 그렇게 현재 담당 부서를 찾는다면 해결. 화살표를 따라가는데 ‘폐지’로 끝났다? 그렇다면 그 폐지연도의 업무분장규정을 찾아 볼 순서다. 그나마 1980년대까지의 규정 개정 내역은 내규관리시스템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간혹 업무 자체가 없어진 경우도 나타난다. 그래도 바로 기록연구사 심사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어서, 그 단위업무의 상위 업무기능을 수행하는 부서 중 핵심 부서를 찾는다. 

 

네 번째 단계는 동종 대량 기록물이지만 키워드 별로 다시 확인을 해보아야 하는 문서. 동일한 단위업무를 수행하지만 그 대상은 다른 부서들이 있다. 주로 부서명이 ‘OO1실’, ‘OO2실’ - 인 곳들의 기록물이다. 문제는 이 부서의 수가 시기마다 달라진다는 것. 같은 ‘1실’이어도 그 때의 1실과 지금의 1실이 하는 업무 범위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일단은 표면에 쓰여있는 부서명을 찾아서 써 놓은 후, 부서별 업무분장표와 내부 시스템을 통해 그 기록물과 관련된 업무를 현재 하는 부서가 어디인지 재차 확인해 본다. 

 

그러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 들면 차라리 목록 출력물 - 다 뽑은게 아닌데도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 을 가지고 서고에 가보기도 한다. 상자와 기록물철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어도, 기록물 실물을 열어보면 의외로 금방 답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는, 한 기록물철에는 정말 정보가 없더라도 그 기록물철이 들어 있는 상자 단위로 살펴보면 알 수 있게 되기도 한다. 파일 제목만 보면 폐기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라도, 직접 문서를 펴 보면 깔끔하게 결론을 낼 수 있을 때도 많다. 하나 하나 다 그렇게 볼 수는 없고, 봐도 알 수 없는 문서도 많은게 문제이지만.

어느 날 점심시간, 스타벅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파란 하늘.내 일의 과정과 결과도 이렇게 선명했으면.
어느 날 점심시간, 스타벅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파란 하늘.
내 일의 과정과 결과도 이렇게 선명했으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다른 사람 의견대로, 전 부서에 전체 목록을 뿌리고 ‘폐기하면 안되는게 있다면 회신하라’ 는 방식으로 의견조회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기존 절차에 추가를 한다면 유용한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직원들은 순환 보직을 하는 만큼, 피드백 경로를 다양하게 열어주면 자신이 했던 일과 관련된 문서를 보고 유용한 의견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 2년에 한 번은 부서 이동을 해야 하는 기관에서, 현 담당자는 보존기간이 경과한 그 기록의 생산자와 일치하기도 어렵고, 어쩌면 아직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다른 의견을 주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생산부서 의견조회는 고유업무에 더해지는 부가 업무. 솔직히 나도, 다른 부서의 협조 요청에 일단 ‘흥,’ 하는 마음이 앞설 때가 많은걸.  

 

그래도 별 수 없다. 지금 평가 체계에서 그나마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게 생산부서의 의견이다. 법령이나 규정상 있어야 하는 기록이 없으면 제일 난감해지는 주체도 그들이다. 생산부서에서 폐기 의견을 냈다면? 기록연구사는 그간 축적된 기록물 이용 통계나 정보공개청구 내역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딱히 다른 판단을 하기도, 느낌만으로 ‘보류’나 ‘보존기간 재책정’이라는 심사의견을 쓰기도 어렵다. 전문적인 고유업무에서 나오는 문서라면, 제목을 보고 중요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 업무 안에서 어느 정도로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까지 아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한 기관에 오래 있더라도 연차에 따라 평가의견이 달라질 수 있는 이유다.

 

기록연구사로서는 기록물 평가심의를 진행하는 담당자로서 단위업무 매핑에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 그 단위업무 보존기간의 책정 근거가 되는 법령이 개정되지는 않았는지, 보존기간이 경과된 것이 맞는지 등을 한 번 다시 확인해볼 따름이다. 혹시 폐기하기 조심스러운 키워드들이 보인다면, 그 문서가 담고 있는 일이 이 기관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줄 자료들 - 기관에서 정리한 핵심 연혁과 성과를 담고 있는 - 을 살펴보고 정리하며, 이걸 생산부서 의견조회시 참고자료로 제공하거나 기록연구사 심사의견의 근거자료로 써볼만할 지 가늠해볼 뿐이다. 차라리 평가심의 대상에서 빼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 보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공기관의 기록관리란 있어야 하는 기록이 필요한 기간만큼 존재하도록 하고, 그 기록을 내외부 이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는 종종 알아채 버린다. 진짜 관리해야 하는 기록은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지 않다는 걸. 내가 관할하는 기록의 대부분은 기록연구사가 공공기록물법을 기반으로 관리하기 전부터도 알아서 관리가 잘 되어 온 기록이라는 걸. 그래서 내가 기록연구사가 되고 싶었던 그 이유라고 생각했던 평가 업무의 핵심은, 기록연구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었어야 건드릴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르며, 그래서 지금 내 앞에 놓인 일은 정말로 형식적인 일일 뿐이라는 것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목록을 다시 연다.  이미 보았던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여러 기준으로 문서를 분류해보며 비교하고, 보존기간 책정 근거가 되는 법령을 다시 찾아본다. 그저 삽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상태로 평가 절차를 진행하고 싶어서다. 100% 확신할 수 있는 평가라는건 없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회의와 불안을 어떻게 껴안고 갈 것인지까지가 이 일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는 기록 평가 체계 자체가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거지만 어쩌겠어, 오늘 나를 기다리는 37,162권의 목록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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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 조회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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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T, 김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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