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셔터 너머의 딜레마
'수단의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 사진을 기억하시나요? 1993년 케빈 카터가 촬용한 이 사진은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기근의 현실을 전 세계에 알렸지만, 동시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 사진작가는 소녀를 도와주지 않고 사진을 찍기만 했는가?" 많은 이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터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후에 발견된 그의 노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며 얻은 괴로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통을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것 이상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타인의 고통을 쉽게 구경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참상이나 끔찍한 사고의 현장이 담긴 사진은 순간적으로 스크롤을 멈추게 만들고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무 많은 고통의 이미지에 노출됨으로써 점차 무감각해지곤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담은 사진을 보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책 한 권과 전시 한 개를 소개합니다.
📙 오늘의 책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 수지 린필드
타인의 고통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와 사진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책으로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을 소개합니다. 저자인 수지 린필드는 뉴욕대학교에서 저널리즘과 문화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사진을 찍는 윤리 그리고 보는 윤리
포토저널리스트는 보여주는 윤리를 지켜야 하지만 우리는 보는 윤리를 지켜야 한다.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 p.103)
린필드는 수전 손택이나 브레히트 등 사진 소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에 일부 동의를 표합니다. 사진은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대해 이유나 원인 등을 제시하지는 못하며 이러한 이유로 때때로 정치적·역사적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타인의 고통이 누군가의 눈요깃감이나 ‘포르노그래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사진이라는 수단 자체를 외면하는 게 맞는 걸까요? 저자는 사진 속 장면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능동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윤리라고 말합니다. 사진을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 사진 이면의 현실을 탐구할 수 있는 계기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린필드가 '개입하는 사진작가'와 '관찰하는 사진작가'의 윤리적 입장 차이를 상세하게 풀어낸 점입니다. 이를 위해 린필드는 3인의 포토 저널리스트들의 작업 방식을 분석하며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합니다.
- 로버트 카파: 무조건적인 고통과 잔악행위보다 공포와 슬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 정치폭력을 알린 낙관주의자
- 제임스 낙트웨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기이한 모양으로 표현하며 혼돈 속 통일성을 찾은 파국주의자
- 질 페레스: 감상자가 통찰을 부여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도록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진을 찍은 회의주의자
사진의 위험성과 폭력을 고발하는 수단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사진을 고정된 대상으로만 여겨서 경멸하거나 부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진을 사진 그 자체로 보기보다 사진에 반응하고 사진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을 책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타인의 고통』, p.41)
수지 린필드는 포스트모더니즘 회의론자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수전 손택의 사례를 다수 인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은 어떤 주장을 했을까요?
손택은 우연 혹은 운이 사진 촬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사진은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점에서 잔악한 행위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과 그런 이미지들이 소비되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인데 이는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명인들의 사진에는 이름이 붙지만 피사체의 고통이 담긴 사진에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화하며 다양한 원인을 한데 뭉뚱그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전 손택은 사진을 통해 기억하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사진’만’ 기억하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사진만을 통해 기억하게 되면 결국 이면의 상황에 대한 이해는 퇴색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수전 손택과 수지 린필드 모두 피사체의 존엄성을 우려했다는 것입니다. 수지 린필드는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윤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수전 손택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윤리에 초점을 둔다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 오늘의 전시 <퓰리처상 사진전>: ‘불행은 되풀이되는 것인가?’
퓰리처상은 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특히 보도사진 부문은 세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착해왔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작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어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40년대 2차 세계대전부터 흑인 인종차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내전과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난민 문제,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담은 이미지들까지 전시하고 있습니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진들이 세상에 던진 윤리적 질문과 사회적 변화 과정을 함께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던지는 물음은 ‘불행은 되풀이되는 것인가?’입니다. 전시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퓰리처상 사진전> 전시 정보
⌛ 전시 기간: ~25.03.30.
🕰️ 관람 시간: 10:00~19:00(매주 월요일 휴관)
🏠 전시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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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고통의 이미지, 어떤 자세로 바라볼 것인가
마크 트웨인의 『레오폴드 왕의 독백』은 레오폴드 왕이 콩고 자유국을 통치하는 동안 자행한 잔혹한 행위를 비판하는 풍자 소설입니다. 여기서 레오폴드 왕은 코닥 카메라의 등장으로 자신의 행위가 고발되자 격분을 하며 카메라를 ‘짜증나는 재앙’이라고 표현합니다.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현실의 폭력들을 직접적으로 고발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 그저 구경거리로 전락할 위험성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고통을 담은 사진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요? 단순한 관람자인가요, 아니면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할 윤리적 주체인가요? 사진의 힘은 그것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린필드와 손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사진 그 자체는 사진의 이면에 대해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의 이미지에 무감각해지고 피로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저 외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연민과 공감보다 높은 층위에 연대를 놓았듯이, 수지 린필드 역시 고통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자세에 있어서 ‘연대’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불완전하며 뚜렷한 실체가 없는 연대는 단순히 사진을 들여다보는 행위만으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 연대는 사진과 사진 바깥의 실제 세상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연결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을 누구에게도 불쾌하지 않게 기록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 p.82)
고통의 이미지를 마주한 후의 행동은 우리의 몫입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것인지 질문하고, 그 이면의 역사적·정치적 배경을 직접 알아보며 잊지 않는 것. 아마도 이러한 행동이 타인의 고통을 가장 윤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일시적인 감정을 넘어,진정한 이해와 기억으로 이어지는 응시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 작성자: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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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댓글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 오늘의 질문
- 수지 린필드와 수전 손택의 의견 중 어느 쪽에 좀 더 동의하시나요?
- 사실상 피사체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보도의 공익성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 폭력과 고통에 대해 기록하고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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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파수꾼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피사체의 동의 없이는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기록보다 직접 소통하고 도와주는 것이 먼저가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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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김희성 캐릭터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민초'들을 담기 위해 시골 마을까지 찾아왔던 외국인 기자 캐릭터도 생각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작 본인들은 그런 사명감 없이 말이죠.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쉽게 의견을 표현하는 것보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큰 사명감과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지, 이번 뉴스레터를 통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퓰리처상 사진전 하는지 몰랐어요! 덕분에 주말에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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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잉
저널리스트들이 수많은 비극들에 대한 “사실“을 사진이란 매개체로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부조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찍은 사진을 그저 소비만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저널리스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진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실“들을 보고 사유하고 직접 행동으로 연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좋은 책과 사진전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전은 꼭 방문해야겠어요!
크리스탈
오.. 엄청 공감합니다. "그들이 찍은 사진을 그저 소비만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저널리스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특히 문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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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케빈 카터는 사진을 찍은 후 바로 소녀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숱한 비난을 받았고, 퓰리처상 수상 두 달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한다며 손가락질 했지만, 이 사진 한 장은 전 세계로 퍼저 아프리카 구호 사업을 이끌어 냈습니다. 사진 속 소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아이들을 구한 것이나 다름 없었죠. 사진은 찍는 사람의 관점이 많이 투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석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죠. 세상에 완벽히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고, 극단적인 입장에 서서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담론을 나누는 태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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