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300년을 뛰어넘어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
책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매년 기다리는 <서울국제도서전>! 흥미롭게도 이 도서전의 주제는 해마다 새롭게 선정되는데요, 작년 도서전의 주제는"후이늠(Houynhnm)"이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여행지인 후이늠은 '이성'이 지배하는 완벽한 세상입니다. 거짓말도, 불신도, 전쟁도 모르는 이 이상향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도서전의 주제로 선정되었죠. 국제도서전 주제에 선정될 만큼 여전히 이 책은 300년이 지난 지금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18세기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작 <걸리버 여행기>가 2025년 현재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려 합니다. 이 책은 300년 전 작품이지만, 놀랍게도 신제국주의의 부활부터 AI 시대의 딜레마까지, 우리 시대의 모습을 정확히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걸리버 여행기>, 함께 살펴볼까요?
*이 뉴스레터는 '지금 읽어야 할 고전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 뉴스레터에는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독서모임 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책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영원한 제국의 꿈: 걸리버가 목격한 권력의 민낯
제국주의의 망령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걸리버가 첫 번째 여행에서 방문한 소인국 릴리풋은 키가 15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이곳의 황제는 자신을 "세상의 모든 군주들 중의 군주"라 자칭하며, 이웃 나라를 정복하려 하죠. 이러한 모습은 현대의 지도자들과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를 "중동의 리비에라"로 만들겠다는 발언이나, 그린란드 획득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모두 19세기 식민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책 이야기로 가볼까요? 걸리버의 세 번째 여행지인 라퓨타는 하늘에 떠 있는 섬입니다. 이곳의 지식인들은 수학과 음악에만 몰두한 채 현실의 실용적 문제들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추상적인 이론과 계산에 빠져 일상적인 물건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몰입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래 대륙 발니바비를 지배하려는 권력욕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과학 기술을 이용해 섬을 이동하며 일조량을 차단하거나 돌을 떨어뜨려 아래 주민들을 위협합니다. 이러한 모순된 모습은 학문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그 지식을 권력과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지식인들의 위선을 풍자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과 닮아있죠.
주인공 걸리버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러한 권력의 실체를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군주가 어떤 나라로 병력을 보냈을 때 그곳 백성이 가난하고 무지하면 절반을 죽이고 나머지 절반을 자기 노예로 만들어도 정당합니다. 미개한 삶의 방식을 교화하겠다는 명분만 내세우면 그런 학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적의 침략에서 지켜달라고 다른 군주를 불러들인 군주가, 그렇게 해서 침략자를 물리친 뒤 도움을 주로 온 군주에게 붙잡혀 살해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하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러 온 군주가 제왕답고 명예롭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인한 동맹도 군주들 간에 전쟁의 사유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더 가까운 친척일수록 싸우는 경향은 더 높아집니다. 가난한 나라는 배고프고, 부유한 나라는 오만합니다. 오만과 굶주림은 언제나 불화하기에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p.302”
<걸리버 여행기>
이처럼 저자의 날카로운 풍자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정책이기에 앞서 욕망의 산물입니다. 권력과 탐욕이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시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되는지를 '걸리버 여행기'는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더욱 선명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수: 걸리버가 발견한 인간성의 민낯
권력의 탐욕 뒤에는 언제나 인간 본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걸리버는 마지막 여행에서 이성적인 말인 후이늠과 인간의 모습을 한 야만적 존재 야후를 만납니다. 후이늠은 거짓말, 전쟁, 탐욕을 모르는 고귀한 존재인 반면, 야후는 걸리버가 혐오할 만큼 추악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 마지막 여행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폭력성, 위선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은 쉽게 발견됩니다. 소수자나 취약계층을 '덜 인간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경향은 마치 걸리버가 야후를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있습니다. 반면, 걸리버가 방문한 두 번째 여행지인 거인국 브로브딩낙에서는, 12배나 큰 거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과 편견은 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만나면서 더욱 증폭되고 있습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가짜뉴스의 확산을 부추기며, 극단적 의견의 에코 챔버를 만들어냅니다. AI 기술은 딥페이크를 통해 허위정보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내고, 안면인식 기술은 특정 인종에 대한 편향된 결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걸리버 여행기>의 세 번째 여행지인 라퓨타의 과학 아카데미가 현실의 문제는 외면한 채 무의미한 실험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기술 발전이 오히려 인간의 편견과 악의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코 챔버(Echo Chamber): 비슷한 성향의 의견만 반복해서 접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마치 메아리처럼 같은 생각만 울리는 공간이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죠.
맹목적 진보의 역설: 걸리버가 경고한 이성의 한계
앞서 우리는 제국주의적 욕망과 인간 본성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흔히 제시되는 '이성'과 '진보'는 어떨까요? 저자는 라퓨타에서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섬 라퓨타의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거나 인분을 원래 음식으로 되돌리려는 등 터무니없는 실험이 진행됩니다. 이는 당시 과학계의 맹목적인 이성 숭배를 풍자한 것이었죠.
이러한 저자의 통찰은 2025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기술 문명의 딜레마를 정확히 예견한 듯합니다. 2025년 UNESCO 글로벌 AI 윤리 포럼에서는 AI 기술의 윤리적 거버넌스가 주요 의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AI가 만들어내는 허위정보의 확산은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서도 중요한 위험으로 지적되고 있죠. 이는 마치 라퓨타의 과학자들처럼,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진보로 이어지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기술 발전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을 낳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는 무분별한 기술 발전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며, 첨단 기술의 혜택이 일부 계층에게만 집중되면서 사회적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2025년 세계 사회 보고서가 지적하듯, 전례 없는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오히려 더 큰 소외감을 느끼고 있죠.
저자는 마지막 여행지인 후이늠 국가를 통해 '이성'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후이늠은 거짓말도 모르고, '순수한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말들의 사회입니다. 이들의 완벽한 이성적 세계는 현대의 AI 기술이 추구하는 이상과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AI 시스템 역시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결정을 내리며, 인간의 감정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운 판단을 목표로 하죠.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이성'은 현실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낳고 있습니다. AI 시스템이 편향된 데이터로 인해 특정 그룹을 차별하거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죠. 더구나 AI의 결정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 소재를 가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마치 후이늠의 사회가 보여주듯, 순수한 ‘이성’만으로는 인간 사회의 복잡성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가며: <걸리버 여행기>는 묻습니다. "당신의 ‘이성’은 어디에 있나요?"
과학기술이 급발전하는 18세기, 조나단 스위프트는 여행기라는 형식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소인국과 거인국을 통해 인간의 오만함을, 특히 영토 확장과 권력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꼬집었죠. 허영심에 사로잡힌 라퓨타를 통해서는 과학만능주의의 맹점을 드러냈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에 맹목적인 기대를 거는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말의 나라 후이늠을 통해서는 이성적 존재라 자부하는 인간들의 위선과 폭력성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풍자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가자지구를 "중동의 리비에라"로 만들겠다는 발언이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제국주의적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AI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윤리적 딜레마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욕망이 되살아나고 기술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이 시대에, <걸리버 여행기>는 반드시 다시 읽어야 할 고전입니다. 권력과 이성,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스위프트의 날카로운 통찰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강렬한 권력 의지와 맹목적 이성이 뒤섞인 우리 시대, 그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작은 성찰의 시작. 이 의미 있는 대화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독서모임 안내
- 일시: 3월 15일(토) 오전 10:00
- 장소: 투썸플레이스 석촌역점
- 신청: 아래 '소모임 신청' 버튼을 눌러주세요
✍️ 작성자: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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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질문
- 오늘날의 새로 등장한 신제국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더불어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제국주의'의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요?
-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인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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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파수꾼
소인국 거인국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많은 풍자가 있었네요. 말의 나라를 보면서 다시 한번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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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와아! 안 그래도 지금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있는데,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걸리버가 소인국으로 가서 거인이 되었다! 이 정도가 끝인 줄 알았는데,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더라구요? 나라마다 굉장히 특색이 깊었는데, 특히 라퓨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라퓨타에는 학술원이 있는데요. 그곳에서는 계획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계획만 하고 제대로 실행된 것이 없어 계획자라 불리는 듯해요.ㅋㅋㅋㅋ 그들이 계획이란 이런 겁니다. 영원히 수리하지 않아도 되는 튼튼한 재료로 일주일 만에 대저택을 짓는 것. 심지어 인간 똥을 원래 음식으로 되돌리는 연구에 몰두하는 계획자도 있죠. 이런 현실성 없는 터무니 없는 계획들 때문에 실제 라퓨타는 초토화가 되어 갑니다. 너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데, 한 편으로는 기시감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도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한국에서는 수질 오염 예방책으로 로봇 물고기가 개발된 적이 있습니다. 1초당 1.8m를 헤엄치며 실시간 수중 통신으로 수질 조사를 하는 용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환경에서 로봇 물고기가 헤엄친 거리는 23cm였다고 하죠. 게다가 실험 도중 고장 나 실제 테스트조차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기술 발전에는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현실에 닥친 '진짜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를 간과하고 이론에만 기대는 것은 라퓨타 계획자들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현실 세계는 이론 세계와 달리 복잡합니다. 계획한 것들이 전부 실현되지도 않고, 현실에 적용했을 때 터무니없는 것도 많습니다. 좋은 기술이라 해도 실제 상용화되기까지는 많은 단계가 필요하죠. 이 현실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이론과 계획만 가지고 돌진했을 때 우리는 부작용을 겪는 것 같습니다. 또한 발전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예전 것이 좋다면, 남기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 예로 종이책이 있죠. 전자책이 개발되었지만, 결국 종이책은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교과서를 모두 전자책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는데요.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본인의 자식들에게 먼저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아무쪼록, 우리 사회는 300전부터 풍자되어 온 어리석음을 답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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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채
어릴 때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는 그저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풍자가 담겨 있었다니 어릴 때 본 이야기는 아주 일부였네요.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점을 담고 있는 게 놀랍습니다. 특히 야후를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이 현대사회에서 소수자나 취약계층을 대하는 시선을 그대로 비추고 았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씁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책이 쓰인 지 30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300년 안에서 수많은 제국주의가 반복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걸 보니 과연 우리는 제국주의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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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잉
무려 300년 전에 나온 풍자 소설이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인간이 정말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게 맞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야기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삶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우리의 이성은 그 시절보다 과연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오히려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해 스스로가 더 나은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역사가 반복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2차 세계대전같은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야 다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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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ho+
이스라엘 정보조직 8200 부대는 CCTV와 인터넷 데이터를 무차별 수집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소속'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찾아내는 라벤더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낸 공격 대상 인간 중 점수가 높은 사람을 제거하는 프로세스입니다. AI 기술로 정확도 90%라는 숫자 속에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까지 무차별 공격하는 근거가 됩니다. 걸리버 여행기가 주는 교훈과 관련있는것 같아요. https://youtu.be/0rkQHQwRI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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