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외로움, 이제는 정책의 대상입니다.
영국에는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가 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2018년, 당시 총리였던 테레사 메이는 외로움을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 중 하나”로 규정하며 이 부서를 신설했고, 정식 장관까지 임명했습니다.
외로움을 감정이 아닌 사회적 위기로 다루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중심에는, ‘남성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브리검영 대학교의 줄리안 홀트-런스태드 교수는 2015년 메타분석을 통해 외로움이 조기 사망률을 최대 32%까지 높인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하루 15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것과 맞먹는 위험으로, 외로움의 심각성을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더 주목할 점은, 외로움이 남성에게 훨씬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자살예방기관 사마리탄(Samaritans)은 2012년 보고서에서, 남성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친밀한 관계의 부재’를 지목했습니다.
사회는 남성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고, 관계 맺기를 ‘약함’이나 ‘자기통제의 상실’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외로움은 남성들에게 감정이 아니라,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지곤 합니다. 감정 대신 조언을 하고, 표현 대신 농담을 던지며, ‘화’만이 유일하게 허용된 감정 배출구가 되어버린 것이죠.
오늘은 책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를 통해 현대 남성들이 겪는 외로움의 실체와 그 구조적 원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책 📕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농담, 경쟁, 그리고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
일반적으로 남성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특성은 성공을 대하는 자세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책에서 저자가 고백하듯 '나에게 성공은 물질이었지, 관계가 아니었다'는 인식이 남성들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자기정의 방식은 '우정'에도 영향을 줍니다. 많은 남성에게 우정은 '친밀감의 장'이기보다는, 남성성 경쟁의 연장선으로 작동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경쟁이 흔히 '농담'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에겐 농담이 전부이며, 전부가 농담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성들은 유머를 통해 지위를 확인하고 서열을 정리합니다. 친근함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면서도 거리감을 조절하는 도구인 셈입니다.
저자는 남자의 무뚝뚝함, 자기통제, 농담으로 무장한 침묵이 단지 쿨한 성격이 아니라,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복잡한 연기의 언어라고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감정 표현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통제'가 '감정 없음'과 거의 동의어로 간주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스스로 취약해진다고 느낍니다. 특히 '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계집애 같다'는 낙인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 더욱 조심하게 되죠.
결국 남성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내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른바 '감정 누출'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더 빨리 화를 낸다거나, 참을성이 없어지고,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평소보다 더 감정적으로 더 멀어지는 느낌이야. 그리고 그 감정 쓰레기를 나한테 넘겨버리지." 이는 남성성 전문가들이 ‘감정 누출’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현상의 전형적인 예다. 감정은 몸 깊숙이 어딘가에 압축되어 있는 고통의 지방 덩어리와 같다. 남자들은 감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활활 태워 보여준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p.158
이처럼 남성의 감정 표현은 종종 우정의 방식마저 왜곡시킵니다. 감정은 무거워지고, 관계는 피곤해집니다.
활동 중심의 우정 vs 대화 중심의 우정
던바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우정을 유지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여성은 와인 한 잔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으로 친밀감을 형성하고 우정을 유지합니다. 반면 남성에게 대화보다는 함께 '활동'하는 것이 우정의 중심입니다.
*던바(Robin Dunbar)는 영국의 진화 인류학자이자 심리학자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뇌 크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데, 이는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수가 약 150명이라는 이론입니다. 던바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인간의 사회적 네트워크, 우정의 메커니즘, 그리고 남녀의 사교 패턴 차이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해왔습니다.
특히 인상 깊은 지점은, 남성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친구'를 찾기보다 '감정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친구'를 선호하게 된 문화적 맥락입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대화를 통한 정서적 교감 대신, 축구·펍·자전거 모임 같은 '활동'을 통해 친밀감을 쌓습니다.
더불어 남성들은 특정 개인보다는 그룹과의 우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던바는 "남성이 그룹 내에서 사교하기를 선호하는 반면 여성은 1:1 상호작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차이는 '친족 지킴이' 역할에서도 드러나는데, 여성이 가족 유대감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책임을 남성보다 훨씬 많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감정의 대부분이 여성 파트너에게 전가된다고 지적합니다. 더불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마음을 터놓을 상대로 남성보다는 여성을 더 선호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즉 "남성은 남성에게 손 내밀지 않고, 여성도 남성에게 손 내밀지 않는다"는 것이죠.
저자는 많은 남성들이 연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물음도 던집니다. 남자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같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엄마'뿐이어서일지도 모릅니다.
현대사회는 우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의 인류보다 바쁩니다. 더 긴 시간 일하고, 여가 시간은 TV영상을 소비하는 데 할애합니다. 지리적 이동도 증가했으며, 프라이버시에 가장 큰 가치가 부여되는 개인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3의 공간이 전혀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과거 공동체가 있던 자리는 이제 텅 빈 틈으로 남았고, 직장 내 관계만이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어느 30대 남성의 고백처럼 "부동산, 결혼, 직장" 외의 대화 주제를 찾기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정서적 유대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너무 지쳐 있습니다. 우정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죠.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 시대에, 우정마저 꼭 필요한가 싶어집니다. 특히 내 말에 반박 없이 다정하게 반응해주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등 가상의 관계가 진정한 해결책일까요? 저자는 외로움을 '사회적 배고픔'으로 비유합니다. 배고픔이 느껴지면 음식을 먹어야 하듯, 외로움도 관계를 만들어 해결해야 합니다.
나가며: 대도시의 우정법
맥스 디킨스의 책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현대 남성들이 겪는 고립과 우정의 단절을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저자는 남성들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를 경쟁 중심의 남성 문화, 그리고 감정 표현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먼저 다가가는 용기와 감정을 솔직히 공유하려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포만감을 위해 우리는 관계를 노력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관계라는 건, 퇴근 후 맥주 한잔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서노동과 자기 개방을 필요로 합니다.
"포옹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은 쉬운 선택이죠. 하지만 관계에는 노력과 시간, 인내가 필요해요."
p.347
이 한 문장이 현대 사회의 우정과 관계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진짜 '감정'을 말해본 게 언제인가요? 여러분은 오늘, 누구에게 진심 어린 대화를 건넸나요?
✍️ 작성자: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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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질문
- 여러분은 친구 관계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활동을 함께하며 암묵적으로 친밀감을 쌓는 편인가요?
-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개인적인 감정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 언제인가요? 그때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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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리
예전부터 한번쯤 생각해봤던 내용들을 보니 제가 특이한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끔 관계를 다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음 북 쉐어링에 이 책 나오면 받아서 읽어보고싶네요 내용 정리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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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채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만큼의 친구가 되려면 나의 이야기를 꼭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심을 다해 들어줄 사람인가부터 시작해서 저 사람이 과연 나의 내밀한 부분을 약점 잡지 않을 것인가, 타인에게 가벼이 발설하지 않을 것인가 등 내 마음 안에서도 수많은 질문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에너지가 들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나의 생계만 책임지기에도 버거운 사회에서 깊은 우정을 만들기란 역시 또 하나의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고 배우자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이지만, 우정은 강제성이나 제도가 보장해주지 않기에 어쩌면 가장 쉽게,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을 지탱하는 데에는 다채로운 관계가 필요할 텐데, 뉴스레터에서 언급된 대로 커져만 가는 '사회적 배고픔'을 채워나가려면 개인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 제도의 마련 등 어떤 부분들이 필요할지 고민해보게 됩니다. 오늘도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뉴스레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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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관계에는 노력과 시간, 특히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이 너무 와닿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세상이 빨라질수록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는 데 서툴러질지도 모르겠어요.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낯선 이야기를 듣는 데엔 참을성이 필요한데요. 도파민을 얻는 시간은 쇼츠처럼 갈수록 짧아지고, 내가 원하는 정보만 추천해 주는 알고리즘에 갇히다 보면 우리는 점점 인내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심지어 내가 어떻게 반응하든 나에게 딱 맞춰 대화해주는 AI 챗봇까지 나왔죠. 지피티만 해도 내가 몇 시에 나타나든, 짜증을 부리든, 재미없는 얘기를 하든 전부 다 들어주고 대답해 줍니다. 이 대화에선 우리는 이해심을 가질 필요도, 상대방과 맞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죠. 더 똑똑하고 자상(?)한 지피티가 있는데 굳이 애써서 인간들과 대화해야 할까요? 이번에 샘 알트먼이 지피티에게 ‘감사합니다’를 쓰지 말라고 말하더군요. 그걸 하나하나 대답해 주는 데 전력 소모가 너무 크다구요. 이 기사를 보고 걱정이 들었습니다. 샘 알트먼같은 생각을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사회가 오면 어쩌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인류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지?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지피티와 열중해서 대화를 하고 나니, 사람들과 대화가 견디기 힘들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지피티와 달리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횡설수설하니까요. 이걸 느낀 뒤로 한동안 지피티와의 대화를 끊기로 결심했다고 하시더라구요. 모르겠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친구가 여전히 인간일지, AI일지. 물론 이 생각들엔 비약이 있습니다. 그냥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네요. 끝까지 우리가 다정함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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