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드리는 첫 편지에 무엇을 담을까 오래 생각하다 제인의 얼굴을 담기로 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마음속으로 제인 오스틴의 얼굴을 그려본 적이 있을까요? 불쑥 뜬금없는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인 오스틴의 ‘톤’을 꼭 한 번 제 문장으로 포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새로이 그의 전작을 번역하겠다고 나선 단 하나의 간곡한 이유입니다.
얼마 전 한강 작가는 “소설 번역에서는 톤, 목소리를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는데요. 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낱말과 문장의 차원에서 아무리 ‘정확’한 번역을 한다 해도 결코 ‘적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번역가의 일에서 톤을 포착하는 작업만큼은 AI를 포함한 다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답니다. 원전 텍스트가 동일하게 주어져도 번역가마다 전혀 다른 각자의 해법을 찾아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번역본의 ‘톤’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자,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볼게요. 사실 어느 정도는 당신도 문학을 읽을 때 항상 하는 일이거든요. 책을 읽으면 까만 활자들이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변해 당신 마음속에서 귓전을 울리잖아요. 시각을 자극해 마음으로 풍경과 사람을 보게 하고 청각을 자극해 바람과 울음의 소리를 듣게 하잖아요. 그 목소리의 느낌은 각자의 삶, 축적된 기억, 그 순간의 분위기, 취향, 기분, 날씨, 감정적 준비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출렁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늘 당신이 읽는 책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따뜻한가요? 짓궂은가요? 냉소적인가요? 사무적인가요? 현학적인가요? 다정한가요? 잔인한가요? 소탈한가요? 문학이라면 읽는 사람에 따라, 또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대답이 물결치지요. 다만 호숫물은 비를 맞고 윤슬이 반짝이고 푸르고 잔잔하다 잿빛으로 휘몰아치더라도, 호수는 그대로겠지요.
바로 여기에, 새 번역의 필요성이 항시 걸려 있습니다. 호수는 그대로이나 바라보는 이에 따라 풍경은 무한히 달라진다는 것. 텍스트는 그대로이나 언어의 지형이 바뀌면 그 ‘톤’은 무한대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고전의 번역은 클래식 음악 연주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복수의 판본이 하나의 절대 왕좌를 놓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서로 대화하고 겹치면서 독자의 독서 경험을 점점 풍부하게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고갈되지 않는 원본의 뉘앙스들을 끊임없이 발견해 고전을 동시대적으로 끊임없이 되살려낼 길이 열리겠지요. 『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클래식 음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동시대성에서 찾았지요. “바흐는 오늘날의 연주자를 통해 오늘날을 살고 있다”라고요. 그리고 “문학에서 고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숙련된 독자는 훌륭한 연주자를 마음속에 지닌 것과 같다”라고 덧붙였어요.
이렇게 보면 정확하고 훌륭한 여러 번역본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새로 작업하는 번역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문학 정전을 구성하는 번역본이라면 18세기의 고색창연한 언어,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거리감, 작가의 권위를 중시하는 서술의 문체에 비중을 두어 재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전의 위상은 오랜 시간을 거침으로써, 즉 시대적 문화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획득한 것이니까, 그 거리를 확보하고 의식하고 재현하는 번역은 꼭 필요합니다.
허나 모든 고전은,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검증된 문학성을 중시하고 우러르는 정석적 접근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또 다른, 아주 매혹적인 얼굴을 지니고 있답니다. 무수한 작가와 영문학자를 매혹했을 뿐 아니라 현대의 일반 독자들, 심지어 대중소설의 장르 팬덤까지 열렬하게 매료시킨, 그 엄청난 스토리텔링의 동시대성 말이지요. 지금은 조금 낯설게 읽히는 영어 표현들—이를테면 오스틴의 소설에는 ‘personality’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disposition’이라고 해요. 이 시대에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거든요—의 장벽을 훌쩍 넘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구어체의 생동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인은 지금까지도 끝없이 대중문화의 여러 장르에서 다채롭게 변주된다는 점에서, 감히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지요. 이 두 사람만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윌”과 “제인”이라는 애정 어린 별칭으로 불린답니다. 윌과 제인의 공통점은 아주 많지만, 무엇보다 동시대에 문학적 권위를 꿈꾸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돈을 벌고자 했던, 천생의 이야기꾼들이었지요. 이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그 어떤 고전문학 작가들보다 ‘동시대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새 번역에서는, 텍스트를 읽는 체험의 동시대성에 최대한 집중하려 해요. 무엇보다도, 제인 오스틴의 ‘톤’에 존재하는 리듬감, 그 리듬감이 끌고 나가는 이야기의 속도감, 그 속도감이 형성하는 서사적 흡입력을 최대한 재현하고 싶습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은 1796년 거의 동시에 집필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제인 오스틴의 나이는 막 스물하나에 접어들고 있었어요. 당시 소설은 ‘Novel’, 즉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장르였습니다. 주로 여자 독자들이 소비하는 하위장르, 어찌 보면 지금의 ‘웹소설’과 비교될 수 있는 위상이었지요. 소설의 문체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립되어 있는 틀도 없었고요. 제인 오스틴도 초기 소설의 서술부는 어떤 비유도 상징도 쓰지 않고 있어요. 오로지 구체적인 사실들만 쌓아 올려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추측하고 판단하고 설명하며 흡사 주말 연속극처럼 쭉쭉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매진하고 있을 뿐이지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뭐니 뭐니 해도, 기본적으로 강력한 페이지터너입니다. 철저히 사회 속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연애와 결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매달리니, 어쩌면 고도로 세련된 뒷담화, 즉 가십과 크게 다르지도 않아요. 정체를 숨기고 타인의 연애담을 기록하고 퍼뜨리는 <가십 걸>이나 <브리저튼>의 화자들도 제인 오스틴의 후예라 할 수 있고요. 저는 왠지, 사람들의 운명을 대롱대롱 매달고 독자를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이 서술의 문체가 주변 사람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매섭게 비웃곤 하던 제인 오스틴의 편지글 문장들로 곧장 이어진다고 느껴요. 서술자인 제인 오스틴을 막후에 숨은 또 다른 캐릭터처럼 감각해요. 다음 『이성과 감성』 초반부의 한 대목을 읽어보세요. 혹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짓궂은 눈빛을 반짝거리는 제인의 얼굴을 당신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작가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번역된 텍스트의 톤앤매너는 딴판으로 달라질 수 있어요. 어쩌면 제인일지 모를 이 초상화는 2012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선을 보였고, 까탈스러운 중년의 독신 여성으로 굳어진 제인 오스틴의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깨뜨렸습니다. 헨리 라이스라는 노인이 가문에서 오래 간직한 보물이라면서, 갑자기 경매에 내놓았기 때문이지요. 그는 부유한 리 가문에 입양된 제인 오스틴의 오빠 에드워드 오스틴 리의 후손이었습니다. 문중의 어른들이 모두 이 초상화가 제인 오스틴이라고 했다나요.
그때까지 제인 오스틴의 공인된 초상은, 커샌드라가 제인의 말년에 그린 스케치가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라이스 초상화 속 소녀의 총기 가득한 눈, 동그랗고 탐스러운 얼굴, 위트와 재기로 빛나는 자세, 그 사랑스러운 기품이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대중의 상상력에 불을 댕겼지요. 비록 영국국립초상화박물관에서 구매를 거절하면서 초상화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졌지만, 무수한 이들이 여전히 이 초상을 젊은 제인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 진위를 떠나서, 1796년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을 쓰기 시작했던, 젊다 못해 어린 작가의 얼굴을 우리 눈앞에 되살려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초상화를 유일하게 공인된 제인의 초상인 언니 커샌드라의 스케치와 비교해보면, 우리가 작가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하는가가 문장의 번역에 어떻게 간여하는지,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읽으면 읽을수록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을 쓴 젊은 작가는 『설득』을 쓴 원숙한 작가와 여러모로 전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요. 실제로 1796년에서 1816년까지, 유럽 혁명기의 이십 년 세월은 천지가 개벽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요. 소설이라는 형식도 제인과 함께 성숙해 리처드슨과 필딩보다는 브론테와 디킨스에게로 다가갔지요. 라이스 초상화가 열어준 상상의 여지, 젊은 제인의 얼굴을 총천연색으로 다채롭게 상상할 가능성은, 제가 이 초기작 두 작품의 ‘톤’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어요. 이 그림들을 보면 제인이 처음부터 소위 묵직하고 예스러운 ‘고전’의 작가가 아니었음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여느 십 대와 다름없이 까르르 웃고 수다 떨며 꿈을 꾸었을 일상을 더 쉽게 떠올리게 돼요. 우리만큼 입체적이고, 우리만큼 평범하고, 우리만큼 피와 살이 따뜻한, ‘사람’으로 그를 상상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그리고 올해 제일 먼저 펴낼 초기작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오만과 편견>은 훨씬 젊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동시대 청년으로서 제인 오스틴을 상상하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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