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오스틴의삶과소설

어느 봄날의 제인 오스틴

꽃과 숲과 정원과 희망과 고독과 혁명

2025.04.09 | 조회 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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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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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봄이네요. 정말로 봄이 왔어요. 지난 주말에는 통영과 남해로 짧은 여행을 떠났었는데 산천에 만발한 봄꽃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답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산불과 꽃샘추위와 3월의 폭설과 혼란한 뉴스의 잡음에 휩싸여 있었는데, 꽃과 봄이 이리도 급작스레 밀어닥쳐 희망의 호외를 온 세상에 흩뿌릴 줄은 차마 몰랐지요. 탐스러운 붉은 동백과 노란 유채와 홍매화와 하얀 벚꽃과 보랏빛 로즈메리가 한꺼번에 피어난 장관을 보고 있자니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가 제라늄 향기를 “한 줄기 산들바람 같은 정신적 힘(a breeze of mental strength)”이라고 표현한 것이 생각났어요. 꽃이 만발한 봄날의 자연은 쉽게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말라고 늘 말해주는데, 왜 겨울밤이 오면 이 단단한 약속을 잊고 또 잊는지 모르겠어요.

제인 오스틴은 왠지 봄날의 작가 같아요. 야외로 나가 자연의 품에 포옥 안기는 체험은 그의 소설에서 행복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요. 이야기는 겨울을 통과해 반드시 봄여름의 행복한 결말을 옹골차게 피워내고요. 여백은 하늘과 땅, 풀밭과 바위산, 강과 바다로 가득하고 행간에서는 투명한 녹음과 상큼한 꽃내음이 느껴져요. 주인공들은 성가신 가족이나 무례한 친지들과 응접실에서 후텁지근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이내 꽃이 만발한 정원과 숲속 오솔길로 도망쳐 맑은 공기를 허파 가득 불어넣고는, 걷고 또 걸으면서 홀로 마음을 가다듬거나 친구들과 속내를 터놓는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 내밀한 만남을 갖지요.

만발한 꽃을 보고 제인 오스틴을 떠올린 게 저만은 아닌가 봐요.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은 「어톤먼트」의 원작 소설 『속죄』를 공공연히 “나의 제인 오스틴 소설”이라고 불렀는데요. 고딕소설에 빠져 커다란 오해를 한 젊은 여자를 다룬 오스틴의 『노생거 애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표시로 『노생거 애비』의 한 구절을 소설 첫머리에 적어두기도 했고요, 이 작품 『속죄』를 두고 현대의 소설가도 『오만과 편견』처럼 강력한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실험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특히, 꽃 한 다발을 들고 정원을 가로질러 컨트리 하우스, 즉 영지 저택으로 달려가는 젊은 여자의 이미지 하나로부터 이 소설 전체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속죄』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세실리아는 정원에서 꺾은 야생화들을 심혈을 기울여 배치하고 정성껏 화병에 꽂으면서 “오빠의 친구인 폴 마셜이 보면 흡사 꽃을 꺾을 때만큼이나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꽂은 줄”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순된 심정을 자각하고 내심 쓴웃음을 지어요.

그런데 이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꽃의 배치는 알고 보면 제인 오스틴의 시대부터 정립된 영국 정원의 유구한 추구미(!)랍니다. “디자인된 혼돈(designed chaos)”이라고 일컫는 이상이었는데요. 이전의 스튜어트 왕조 시절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조경에 영향을 받아, 외래 구근식물과 토피어리, 반듯한 가로수 길 등 “자연을 정복해 마음대로 부리는 것(mastery over nature)”을 목표로 정원을 꾸몄다고 해요. 하지만 18세기 들어 영국의 정원과 조경에 큰 변화의 붐을 몰고 온 조경사가 있었으니 바로 랜슬럿 브라운(Lancelot Brown)이었습니다. 별명이자 미들네임이 “능력”을 뜻하는 케이퍼빌리티(Capability)여서 케이퍼빌리티 브라운으로 더 유명했어요. 그는 유럽 본토의 인위적이고 권위주의적 미학을 싫어해서 경직된 대칭적 구도를 버리고 자연 본연의 모습이 건축이나 구조물과 어우러지는 “목가적(pastoral)” 느낌을 구현하고자 했는데요. 이를테면 2005년 조 라이트가 감독한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펨벌리로 등장한 채츠워스의 조경이 케이퍼빌리티 브라운의 대표작이랍니다. 브라운의 조경이 추구한 목가적 이상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비춰보아도 의미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여전히 과시하는 베르사유궁의 화려한 정원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프랑스가 혁명의 피바람에 휩쓸릴 때 영국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는데(물론 100년 먼저 국왕을 참수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조경의 경향에서도 당시 영국 지배계급의 조심스러움과 타협적 성향을 읽을 수 있지요. 목가적 정원은 향후 "영국적" 조경의 국가적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오스틴의 소설에서 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주의 품격과 자질을 표상하는 중요한 기호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이 펨벌리를 보고 반한 건 멋지고 화려하고 근사해서가 아니랍니다. 펨벌리에 가기 전에 "거대한 저택이라면 이미 너무 많이 봐서 지겹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부와 권력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가 축적한 취향과 심미안, 깊은 지성, 영주의 책임감, 생태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구석구석 드러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그만 깜짝 놀라 매료된 것이예요. 

이 펨벌리 장원의 묘사는 벤 존슨이 필립 시드니 경의 가문 영지에 바친 시 『펜셔스트에 바친다 (To Penshurst)』 의 오마주예요. 표현이나 묘사가 한두 군데 겹치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의도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고요. 벤 존슨의 시는 귀족의 대저택에 아첨어린 찬사를 바치는 게 아니라 16세기에서 시작되어 18세기까지 꾸준히 계속되던 공공토지의 사유화(Enclosure)와 무자비한 지배계급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회적 논평으로 읽어야 해요. 공지를 사유화해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는데, 지주들은 그들에게서 갈취한 이윤으로 갑자기 엄청나게 화려한 저택과 영지를 건축했거든요. 폭군처럼 군림하며 영지 주민을 착취하는 졸부의 과시용 호화저택을 프로디지 하우스(Prodigy House)라고 불렀는데요. “누군가의 몰락을 딛고 세워지지 않은" 너그러운 펜셔스트를 찬양할 때, 사실 벤 존슨은 프로디지 하우스의 탐욕과 허영을 비판한 것이에요.

훌륭한 영주의 관용 하에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가는 펜셔스트 플레이스와 펨벌리 장원의 묘사를 의도적으로 겹쳐서 어떤 이상적인 목가적 공동체를 꿈꾸듯 그림으로써, 제인 오스틴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당대 지배계급의 품위 없고 무자비한 축재와 과시를 구체적으로 고발하고 있답니다. 다아시의 펨벌리는 레이디 캐서린 드 버그의 로징스파크와 달리, 잔인하게 착취한 부를 고압적으로 과시하지 않고 하인과 소작농 등 영지의 식구를 너그럽고 살뜰하게 품는, 비옥하고 풍요로운 자연 공동체로 그려지거든요. 말하자면 제인 오스틴은 펨벌리의 숲과 물과 언덕을 찬양하면서, 벤 존슨이 그랬듯 명확한 사회적 논평의 영역으로 문학을 이끌고 들어가는 것이에요. 펨벌리와는 정반대의 사례지만, 『이성과 감성』에서도 장원은 영주의 품격을 거울처럼 반영합니다. 엘리너와 메리앤이 살던 놀랜드파크는 인색하고 졸렬한 존 대시우드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로 경관이 완전히 바뀌는데요. 탐욕스러운 존 대시우드는 놀랜드의 공지를 사유화해 이윤을 대폭 늘리고 인공적인 꽃정원을 꾸미려고 비탈의 오래된 산사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리지요. 착취하는 자본가의 탐욕은 인간에게 잔인할 뿐 아니라 자연과도 공생할 수 없는 법이지요.  

*

제인 오스틴이 자연에서 누리는 만족감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이 있는데, 바로 이를 남다르게 짚어낸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였어요. 물론 제인 오스틴을 콕 짚어 호명한 건 아니에요. 홀로 산책을 즐기고 소설을 읽는 영국의 숙녀들에게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파리지앵들과 달리 소박하면서도 강단있고 내면적인 속성이 있다면서, 고독을 즐기는 이런 성향이 산책로와 오솔길이 많은 영국식 정원과 관련이 있다고 했을 뿐이지요. 하지만 루소가 “존재의 감상성(sentiment of being)”이라 명명한 이 특별한 “자아의 감각(sense of self)”을 생각할 때, 제인 오스틴 말고 달리 어떤 “영국 숙녀”를 떠올릴 수가 있겠어요. 루소가 장원을 산책하고 소설을 읽는 "영국 숙녀들"에게서 흠모한 이 내면적 삶의 감각, 즉 존재의 감상성은 결국 혁명의 주체를 구성하는 한 가지 속성이기도 했답니다. 홀로 읽고 홀로 걷고 홀로 사유하는 주체야말로 억압적인 체제에 가장 위험한 존재니까요.

『오만과 편견』에서 숲속 오솔길을 홀로 걷던 엘리자베스는 길목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다아시를 만나고 그의 편지를 받아 읽습니다. 실제로 이 사태는 작은 혁명입니다. 약혼한 사이가 아닌 이성이 서로 서신을 교환한다는 건, 중대한 사회적 규약의 위반 행위였거든요. 범절과 격식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다아시는 스캔들을 불사하고 모든 선을 넘어 엘리자베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쓰라린 치부를 편지에 담아 건네줍니다. 두 사람은 숲 속에서 모든 사회적 금제를 초월해 기어코 “충돌”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편지를 숲속에서 읽고 또 읽습니다. 텍스트화된 타자의 내면을 숙독합니다. 숲속의 읽기로부터 전혀 새로운 마음, 오롯이 둘만의 은밀한 내면이 탄생합니다. 지금과 다른 세상, 지금과 다른 관계를 꿈꾸는 마음이지요.

무수한 동화 속에서 숲은 마술에 걸린 장소이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도 그렇습니다. 숲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워져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꿈을 꾸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처음으로 떠올려요. 롱본도 아니고 펨벌리도 아닌 그 어딘가, 투명한 편지가 남몰래 쓰이고 읽히는 마법의 숲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에 거주하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사이"를 만들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문이 열리는 거예요. 그들의 충돌과 연대는 소설 속의 세상을 영원히 개혁합니다. 산천에 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고 “나날이 초목이 푸르러지던” 어느 희망찬 봄날의 일이었지요.

 

2025년 4월 9일에

김선형 드림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에서 꽃다발을 든 세실리아 (키이라 나이틀리)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에서 꽃다발을 든 세실리아 (키이라 나이틀리)
제인 오스틴이 펨벌리를 묘사할 때 염두에 둔 시드니 가문의 영지 펜셔스트 플레이스
제인 오스틴이 펨벌리를 묘사할 때 염두에 둔 시드니 가문의 영지 펜셔스트 플레이스
2005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에서 로징스 파크로 등장한 프로디지 하우스의 대명사 벌리 하우스 
2005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에서 로징스 파크로 등장한 프로디지 하우스의 대명사 벌리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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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about 1 month 전

    홀로 읽고 홀로 걷고 홀로 사유하는 주체야말로 억압적 체제에 가장 위험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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