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 늘 그렇듯 또 한 편의 고전소설을 드라마 시리즈로 각색해 방영하기로 했습니다. 늘 그렇듯 노련한 각색 전문가 앤드루 데이비스가 대본을 맡았고요. 그런데 그는 조금 신기한 관점을 택했습니다. 원작의 테마인 “돈과 섹스”에 방점을 두어 “진짜 사람들에 관한 아주 신선하고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말했거든요. 사람들은 회의적이었지요, “흠, 돈은 몰라도 섹스라고?” 하지만 데이비스는 꿋꿋이, 남자 주인공이 땀 흘리며 말을 타고, 목욕 장면을 보여주고, 사냥개들을 거느리며 사냥을 하고, 흰 셔츠를 걸친 차림으로 영지의 호수에 뛰어드는 장면을 슬몃슬몃 넣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장면들만 제외한다면 각색은 BBC답게 원작에 지극히 충실했기에, 모두가 또 한 편의 고리타분한 고전소설 드라마가 세상에 나온다고만 여겼답니다. 이 드라마가 몰고 올 무시무시한 광풍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그러나 방영이 시작되고 난 뒤 시청자들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과거의 어떤 BBC 드라마보다도 파급력이 컸지요. 방영 시간에는 영국 전역의 도로에서 차량 통행량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젖은 셔츠”는 불세출의 ‘밈’이 되었고, 결국 영국에서만 천만 명을 훌쩍 상회하는 전설적인 시청 기록을 세웠습니다. 다들 너무나 놀랐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섹시하다니! 그래요, 콜린 퍼스가 다아시 씨 역할을 맡은 「오만과 편견」은 영국 방송사에서 여전히 깨어지지 않을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열광은 영화와 TV 스크린을 휩쓴 ‘오스틴 마니아’의 시작에 불과했어요. 같은 해에 『이성과 감성』이 영국 배우 에마 톰슨이 각색하고 대만 출신 앙 리(이안) 감독이 연출한 풍요롭고 낭만적인 영화 「센스앤센서빌리티」로 재탄생했거든요. 캐스트는 화려했습니다.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이 격정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메리앤 역할을 맡았고 휴 그랜트가 수줍고 우유부단한 에드워드로 출연했으며 앨런 릭먼이 진중하고 속 깊은 브랜던 대령 역할로 출연했지요.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일곱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었고 에마 톰슨은 각색상을 손에 넣었습니다. 다음 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로저 미첼의 데뷔작「설득」이었어요. 로저 미첼은 ‘작가의 극장’이라 일컫는 로열코트극장과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서 연출가로 수련한 감독으로 영국 무대의 전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거친 리얼리즘과 어맨다 루트의 명연으로 화제가 된 「설득」은 1995년 BBC에서 TV 영화로 방영되었고 당해 TV 단막극 부문 BAFTA(British Academy Film Awards)를 수상했고, 미국에서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귀네스 팰트로가 주연을 맡은 「에마」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요. ‘오스틴 마니아’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오만과 편견』을 개를 주인공으로 각색한 만화(「위시본Wishbone」)가 나오기도 하고, 『이성과 감성』이 LA 베벌리힐스를 배경으로 라틴풍으로 각색되기도 했고(「프롬 프라다 투 나다From Prada to Nada」), 『에마』가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재탄생하기도 했지요(「클루리스Clueless」). 『오만과 편견』은 좀비가 창궐하는 세계로 옮겨지기도 했고(「오만과 편견과 좀비Pride and Prejudice and Zombies」), 현대의 런던이나(「브리짓 존스의 일기The Bridget Jones’s Diaries」) 뉴욕(「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이나 인도(「신부와 편견Bride and Prejudice」)로 옮겨져 각기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아마 2005년 조 라이트 감독이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찍은 아름다운 영화 「오만과 편견」을 기억하시겠지요? 이 리스트는 이렇듯 하염없이 많은데, 내년에는 넷플릭스에서도 『오만과 편견』을 다시 제작한다고 하니, 앞으로도 제인 오스틴의 영화화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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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오래도록 한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었어요.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어째서 이토록 시각 매체로 옮겼을 때 성공 확률이 높을까요? 훌륭한 소설일수록 사실 영화화하기 어렵거든요.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묘사,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내면의 사유와 심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이런 강점은 영화화할 때 정말 큰 어려움을 내포합니다.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레프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모두 TV나 영화 화면으로 옮기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 작가들이거든요. 그런데 제인 오스틴의 경우에는, 표면의 플롯 차원에서도, 심층 심리의 차원에서도, 영화화되었을 때 소실되지 않고 여전히 작동하는 강력하게 극적인 속성이 분명히 있습니다.(앞의 무수한 스핀오프와 각색작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요.) 어째서 그럴까요?
저의 오랜 궁금증에 전구가 탁, 켜지는 듯한 통찰을 준 책은 말이죠, (제가 레터에서 여러 번 인용한 바 있는) 폴라 번이 저술한 『제인 오스틴의 천재성The Genius of Jane Austen』(2017)이었습니다. 폴라 번은 제인 오스틴과 관련된 자료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미친(positive!) 열정과 끈기로 긁어모아 완벽하게 새롭고 엄청나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학자인데요. 폴라 번이 새롭게 부여한 이 생동감 넘치는 제인 오스틴의 작가적 색채야말로, 어쩌면 제가 이 전작을 번역하고 싶다고 생각한 가장 큰 동인일지도 몰라요. 아무튼 폴라 번은 『제인 오스틴의 천재성』에서, 오스틴의 글쓰기에 셰익스피어로부터 비롯된 영국의 강력한 연극적 전통이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고 주장하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오스틴의 소설에서는 당대 엄청난 인기를 끌던 월터 스콧 경이나 앤 래드클리프에게서 볼 수 있는 장황한 공간적 묘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도 서술보다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지요. 이를테면 『이성과 감성』의 이런 장면을 보세요.
이튿날 대시우드 자매가 파크의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다른 쪽 문에서 파머 부인이 뛰어들어왔어요. 전날과 변함없이 서글서글하고 명랑한 얼굴로요. 부인은 애정을 담뿍 담아 그들의 손을 잡더니 다시 만나서 기쁘기 그지없다고 열렬히 반가움을 표했지요.
“만나 뵈니 정말 좋아요!” 엘리너와 메리앤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파머 부인이 말했지요. “날씨가 너무 나빠서 두 분이 안 오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그랬다면 충격이었을 거예요. 우리는 내일 다시 떠나야 하거든요. 꼭 가야 하는 게, 글쎄 웨스턴 가족이 다음 주에 우리 집에 오게 됐어요. 애초에 우리가 온 것부터가 갑작스러운 일이라, 마차가 문 앞에 당도할 때까지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파머 씨가 같이 바턴에 가자고 하지 뭐예요. 그이는 정말 짓궂어요! 나한테 뭘 말해주는 법이 없다니까요! 우리가 더 오래 머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시내에서 만나게 되면 정말 좋겠어요.”
자매는 그런 기대를 꺾어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도시에 안 간다고요!” 파머 부인이 탄성을 지르며 소리 내어 웃었어요. “그럼 저 정말 실망할 거예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을 두 분께 구해드릴게요. 하노버 광장에 있는 우리 집 바로 옆집이에요. 정말로, 꼭 오셔야 해요. 대시우드 부인께서 사교계에 나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가 몸조리 들어갈 때까지는 언제든 기꺼이 샤프롱 역할을 해드릴게요.”
자매는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간청은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오! 사랑하는 우리 여보.” 파머 부인이 방금 막 방에 들어온 남편을 보고 말했지요. “미스 대시우드 여러분께 올겨울에 꼭 도시로 오시라고 설득하고 있는데 당신도 날 좀 도와줘요.”
파머 부인의 사랑하는 여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숙녀들에게 살짝 고개만 숙이더니 날씨가 형편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어요.『이성과 감성』 1권 20장
흡사 연극 대본처럼 대사와 행동만으로 모든 인물의 성격이 드러날 뿐 아니라,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시점이 전환되고, 배우들의 얼굴, 표정, 동선마저 눈앞에 영화를 보듯 그려집니다. 흡사 영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작가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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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학 텍스트의 번역자는 이런 정보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작가나 시대나 텍스트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옮기는 작업 자체가 그리 많이 달라질까,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경우에는,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텍스트 해석의 뉘앙스를 미세 조정할 때 방향을 더 잘 잡게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살펴보았듯 제인 오스틴 문체가 지닌 특별한 연극적 속성을 잘 파악한다면, 무엇보다 인물 간의 “대화”를 생생하게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요. 각 인물에게 맞는 목소리로, 눈앞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듯, ‘입말’을 살려야 한다는 판단을요. 둘째, 오스틴의 서술자에게 거리감을 두는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사건건 감정과 판단을 품고 끼어드는 ‘인격’을 부여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데에도 이런 정보가 작용했어요. 젊은 ‘제인 오스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초기 소설의 서술자가 소설 밖에서 바라보는 전지적 화자가 아니라 소설의 세계에 감정적으로 연루되는 등장인물 중 하나에 가깝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인 오스틴이 연극에 푹 빠져 살았고 특히 『이성과 감성』 재교를 보던 당시 런던의 연극계를 섭렵하며 배우 ‘덕질’을 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번역자는 다음과 같은 신기한 표현에 마주쳤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다행히 마침 그 생각이 떠오른 덕분에 축 처졌던 메리앤의 기분은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그들한테는 정말 매혹적인 날씨겠어요.” 그는 계속 말하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아침 식탁에 앉았어요. “얼마나 재밌게 사냥하고 있을까요! 하지만,” (살짝 불안감이 돌아오는 듯) “오래갈 리가 없잖아요. 계절도 그렇고, 비도 연달아 그리 내렸으니, 분명히 이런 날씨를 마주하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금세 서리가 내릴 테고, 왔다 하면 혹독하게 올 테니까요. 아마 하루나 이틀쯤 더 가려나요. 이렇게 턱없이 온화한 날씨가 오래갈 리 없잖아요—맞아요, 아마도 오늘 밤에는 얼음이 얼 거예요!”
『이성과 감성』 2권 5장
볼드체와 밑줄로 제가 강조한 부분은, 누가 보아도 영화 대본의 지문 같습니다. 『이성과 감성』에는 이런 대목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다음 대목에서는 심지어 괄호 없이 등장합니다.
“그러지요.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작년 10월 바턴을 떠날 때 — 하지만 이래서야 이해를 못 하시겠군요 —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습니다. 제가 이야기꾼으로는 영 서툴러서요, 미스 대시우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저에 관한 짧은 소개가 필요하겠지요. 정말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주제라면,” 깊이 한숨을 쉬며,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고 싶을 리도 없지요.” (이탤릭, 원문)
『이성과 감성』 2권 9장
이런 문체는 『오만과 편견』에서도 보기 어렵고, 오직 『이성과 감성』에서 유독 두드러지는데요. 제인 오스틴이 『이성과 감성』의 재교를 한참 보고 있던 1808년 런던의 연극계를 한창 ‘덕질’ 중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저는 주어와 연결되지 않는 이 표현을 단순한 비문으로 착각하고 “깊이 한숨을 쉬며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이상한 텍스트의 흔적들이 제인 오스틴이 (런던 연극의 메카인) 웨스트엔드 연극에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시절의 흔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작가에 대한 애정을 실어 번역문에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번역 작업 중 맞닥뜨리고 선택해야 하는 무수한 갈림길 가운데 이번에는 용감하게 이 길로 나서서, 그런 구절들을 마치 희곡의 지문처럼 옮겨보기로 했답니다.
2025년 4월 2일에
김선형 드림
추신.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답장을 보내주세요. :) 당신의 회신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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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고구마
제인 오스틴이 연극 덕후였다니.. 갑자기 옆집 언니처럼 친근하게 느껴져요.. 오스틴이 쓰고 번역가님이 남겨주신 이상한 텍스트의 흔적들.. 저도 얼른 보고 싶네요ㅎㅎ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ㅎㅎ 실제로 최근의 평전을 보면 여러 모로 엄청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열심히 번역해서 밤고구마님께 빨리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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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제인 오스틴의 덕질이 상상이 가요! 번역가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오스틴은 뭔가 좋아하면 정말 열렬히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이 무렵의 연극 덕질 이야기는 다른 레터에서 또 자세히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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