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다시 찾아 온 《오토포이에틱 시티》 입니다.
지난 호를 받아보신 분들은 <포항 i>를 통해 예술노동, 기술 노동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셨을 겁니다. 노동이라는 것이 자기 발현과 자기 생산 과정이라면, 그것은 사실상 기존에는 없던 차원을 만들어내는 촉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있는 것, 혹은 그런 차원에 덧붙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차원이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데요. 우리는 그를 흔히 창조, 창작과 같은 말로 설명을 하곤 했죠. 그런데 저희는 이제 '창발'이라는 용어를 써보려 합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 2023년 12월 22일
📝 10호. 활성화의 원동력 ‘포항 i’와 ‘i 들’
'창발'의 가능성
새로운 단어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사실상 많은 경우의 창조 행위들이 (기성) 제도를 강화하는 지루한 반복이거나, 숫자적 덧붙임, 심지어 낭비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문제는 창조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심지어 모든 행위(일이나 작업까지도)를 낭비로 만들게 하는 시스템, 가령 차별 관행과 내재화된 헤게모니 쟁투의 풍토, 근대적 도시 환경과 인간 중심주의 정치, 비생성적 생산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무능한 루틴을 정당화하는 관료주의와 같이 한계가 분명한 시스템들이 문제이죠. 이러한 시스템을 가만 보니, 사람들이 평생을 걸고 굉장히 열심히 하는 일들이란 것도 알 수 있네요.
그래서 ‘예술’이라는 것, 그러한 차원과 여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아 있는 예술과 같은 양태가 펼쳐진다면,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리도 몰두하여 벌려 온 과도함을 재정비하게 된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요. 불필요한 낭비가 없는 세계? 온몸 노동, 평생 노동, 삶이라는 것이 폐기 처분되지 않는 세상? 그러한 세계 혹은 세상이 생기는 것을 뭐라고 부를까요. 발생이라고 하는 게 낫겟죠. 그래서 창발이라는 용어가 대두되는 것 같습니다. 창발은 영어로는 emergerce입니다. 자기 발생적 조직화, 말하자면 오토포이에시스적 시스템의 출현과 같은 것이죠. 눈치채셨나요? 여기서는 긴급함, 혹은 과포화 상태 ‘이후’의 등장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창발이 논의되는 곳은, 과포화된 곳 혹은 긴급한 곳입니다.
물론 용어들이 좀 멋지다고 해서 낙관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러한 멋진 용어들을 계속 쓰면서, 뭔가를 가리거나, 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필경사 바틀비처럼,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되뇌는 것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릅니다.
지속 가능성 위기와 AI 기술에 의한 인간 노동의 착취는 사실상 그간 증가한 엔트로피의 자동화된 체인 리엑션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이들도 ‘사건적, 우발적, 발생적’ 양태로써 진행되고 있기에, 그 방향을 돌리지 않으면 파국적 창발은 지속될 테니까요.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두려운 세상입니다.
예술의 도시, 창발의 터전, 살아 있는 도시
예술을 필요로 하는 도시는, 숨 쉬고 싶고, 활기를 찾고 싶고, 살고 싶어 하는 도시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경작되는 것일까요. 동어반복 같지만, 예술 경작은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영일만 아트앤테크 문화 클러스터의 전신 혹은 핵심 사업이 될 ‘해양 그랜드 마리오네트’ 프로젝트의 총괄 디렉터인 김윤환은 사실상 ‘퍼포먼스’라는 것을 그 개념적 차원에서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고, 제작 감독인 안효찬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형이라는 생김새와 움직임, 즉 ‘문자 언어’가 아닌 조형 언어로 소통하는 작가입니다. 이들은 뭔가를 자명하게 느끼며, 심지어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개념과 감각의 차원에서의 새로운 차원을 등장시키는 자들을 ‘작가’라고 부르죠. 이들이 만일 뭔가를 안타까워한다면, 그 뭔가는 아마도, 위에서 말한 한계가 분명한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그냥 놔두는 어떤 ... 뭐랄까요. 부지런한 정체(停滯)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모두가 창발 노동자들로서의 작가가 되어 있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 작업은 그냥 해보는 차원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그 방향이란 것은 자기 몸의 노동을 충만하게 발현시키는 생명이 그려내는 드로잉과 같은 것일 거예요. 과연 우리가 생명 드로잉이라는 것, 그게 사실상 자기 삶의 길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각하고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생명 스스로가 그려내고 조형해 가는 도시는 어떤 도시일까요? 적어도, 예술의 도시이자 창발의 터전이자 살아 있는 도시라고 이야기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활성화의 원동력 ‘포항 i’와 ‘i 들’
《오토포이에틱 시티》에서는 움직이는 철제 조각품 <포항 i>를 포항의 체현체(embodiment)라고 부릅니다. 포항이 온몸으로 들려주는 소리 없는 외침, 살고 싶어 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외롭지 않으려 수줍게 내미는 <포항 i>의 손길은 사실상 온기로 그득합니다. <포항 i>의 살아있음의 내음은 마치 생명 바이러스처럼 도시에 풍겨 나갈 것입니다.
포항이, 아니 그 어떤 지역이라도 예술의 도시로 살아 활기 솟는 날들이 계속되면, 누구라도 여기에, 거기에, 살고 싶고, 그곳에 ‘있고’ 싶겠죠. 그런 게 공존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한 공존 공간은 모든 단독적 존재가 다툼과 뺏기와 배제 없이 적정한 자기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곳일 겁니다.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슬럼 지구 스카이라인을 고층 아파트로 채워만 가면, 자율이라는 양태로 자기 공간이 존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한 걸음씩 차근차근, 단단히 딛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렇게 <오토포이에틱 시티> 소식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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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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