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다시 찾아온 《오토포이에틱 시티》 입니다.
《오토포이에틱 시티》에서는 해양 도시이자 철공업 중심의 산업 도시인 포항에 내재한 잠재 요소들을 재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지구 공생과 세계 공존을 위한 포스트 휴먼 서사를 써보시죠!
포항 정동은 우리로 하여금 ‘포스트 휴먼 도시 포항의 보편 서사’를 쓰도록 이끕니다. 포항 정동의 기술(예술과 서술과 기술)은 대지와 바다의 생성 기술, 자연에 서식지를 튼 인간 공동체의 생존 기술, 철공업 중심의 근대 산업 기술, 그리고 공진화적 포스트 휴먼 기술의 축으로 재배치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포항의 서사는 아홉마리 용 혹은 승천하지 않고 남은 한 마리 용, 떠나버린 연오와 세오녀 혹은 돌아온 비단, 일월 신화의 해 문화 혹은 잠재한 달 문화, 철공업에서 태동한 근대 기술과 첨단 기술의 전진 기지 포스코를 중심으로 쓰여 왔습니다. 이에 《오토포이에틱 시티》는 먼저 그동안 이와 같이 포항을 구성하고 형성해 온 여러 요소로부터 자율적인 활기의 요소를 재발견하고자 합니다.
📆 2023년 11월 23일
📝 2호. 바다 서식지로서의 어촌마을 '구룡포'
포스트 휴먼 도시 포항 서사의 첫 번째 챕터, '구룡포'
바다와 더불어 인간이 둥지를 튼 공동체 형태는 어촌입니다. 공존과 생존의 기술은 ‘고기잡이 기술’에서 ‘어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몸에 체득된 ‘고기잡이 기술’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먼저 ‘어업’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조선총독부 소속 기자가 쓴 ‘포항지’가 주요하게 참조됩니다. 더불어, 김진홍 선생님이 번역하고 해제하여 내신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글 항아리, 2020)의 260-263쪽에도 포항의 어업 구역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일만 내 11리(43.2km)에 걸친 연안”에서, “경북도 수산물의 3분의 1”을 수확하고 있었고, “가공 및 제조 기술이 발달하고 자본력에 의한 공장 설비와 항만 건설에 힘입어 포항의 발전은 동해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포항을 일제 강점기에도 주목했군요.
어떤 물고기들이 있었을까요?
“영일만 앞바다의 고등어 회유 밀도는 조선을 통틀어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고, 영일만 안쪽에서는 조선에서 유통되는 청어의 70퍼센트를 점유”한다. 기록에 따르면 연안 바다에 고등어와 청어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청어는 일종의 원조 과메기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어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일제 강점기 어선은 조선형에서 일본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국주의 시절 근대화의 일환이었던 것이죠. 당시 발동기선으로 변천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물고기를 잡는 어업 기술의 변천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어업 기술로는 말뚝으로 그물을 고정하는 재래식 정치망으로서 "장시 휘라망(후릿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 포항 월포의 후릿그물 체험 프로그램이 떠오릅니다. 이 기술은 강가나 바닷가에 그물을 펼치고 그 안에 들어온 물고기들을 건져내는 연안 어업 기술입니다. 생각해 보면 ‘연안 어업’은 물고기가 많다면, 독과점이 없다면, 재해나 재난이나 기근이 아니라면, 공동체 내와 국내 생활에는 필요충분한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물코를 이용한 자망과 한 줄낚시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1904년 통어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인 통어자와 이주자가 유입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 일본인 어업자 수는 더욱 늘어나 어구 및 어로법의 종류도 늘었다고 합니다. ‘제국주의 근대화’라는 것은 일종의 세계화 시대로, 어업 기술 또한 점차 기업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그러한 기업화의 필요는 지역 내 수요보다 일종의 거래 지역의 확대, 수출업, 가공업, 제조업 등의 수산업 생태계 확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10년대에는 전망, 건착망, 대부망, 팔각망, 각망, 호망, 지예망, 유망 등 일본식 어업을 경영하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조선식 어업은 1920년대 중반에는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룡포는 영일만에서 호미곶으로 넘어가면서 만나는 어항 중 가장 큰 어촌 마을입니다. 연안에서 먼바다로 나아가면서, ‘배’의 제조와 형태도 바뀌었습니다. 구룡포에는 조선소가 있었는데, 여기서 나무로 만든 배 "목선(木船)"이 제작되었습니다.
나무배를 만든 목수 이야기가 『목선과 사람들』(포항문화재단, 2021)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구룡포의 시인으로 알려진 권선희 작가가 ‘목선’을 중심으로 1960-1980년대 중반까지 구룡포 이야기를 묶어 낸 것인데요, 책을 보면 구룡포에 조선소와 같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통조림 공장과 같은 가공업체에다가, 유통업에서 필수인 냉동공장도 다수 갖추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구룡포의 어업 규모와 그 산업 생태계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룡포 어르신들은 모두 기억하는 "대한종합식품"은 1966년 베트남 파병군에게 보낼 통조림을 제조하는 구룡포 소재의 공장이었습니다. 펭귄 공장으로 불리다가, 2010년경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1960-1970년대는 구룡포의 최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은 수협 아카이브 중 경향신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그 당시를 “어업의 현대화”, “어선의 대형화”가 이뤄진 시기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전환된 기술이 현대화되는 지점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이뤄졌다고 합니다. 당시 어촌에서도 “어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해 어시장 주변도 정리되는 등, 실로 어촌 마을의 부흥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룡포와 어촌의 위기
구룡포는 부촌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심지어 전쟁 이후 군부독재 시절과 IMF 때도 끄떡없이 물고기 풍년 속에서 그 부가 유지되었던 곳입니다. 큐레토리얼 팀은 10대 후반부터 배를 타기 시작해, 지금은 모두 일흔, 여든이 넘어 은퇴하신 구룡포의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어르신들은 입을 모아 “바다에 고기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기록을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만 해도 고등어와 청어가 많이 났고, 1990년대까지 꽁치가 주류였다가 이후로 오징어와 게가 주요 수확물이 되었고, 한창때는 하루에 수십 톤씩 잡아들이던 오징어를 지금은 몇십 마리 잡기도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꽁치와 오징어잡이가 한창일 때를 회상하면서 웃음을 띠기도 하지만 하루 배를 띄우는 것 자체가 손해인 지금을 한탄하십니다. 바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다라는 공유지에서 사람들과 바다 생명체들은 공생 공존합니다. 어촌을 사람들의 바다 서식지라고 불렀을 때, 어촌 소멸이라는 위기가 바다 생태계에 있어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해 보면 담담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의 모든 정책은 아마도 근대 인간 중심주의의 폐단을 짚으면서 공생과 공존을 위한 인간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포스트 휴먼 시대 인간은 ‘지혜’의 동물로 재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은 포스트-어촌에서 또 다른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중요 축이 될 것입니다.
“바다에 물고기가 없다”는 치명성은 어촌 소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해양수산부의 어촌 어항 재생 사업인 ‘어촌 뉴딜 300’이 한창입니다. 귀어 귀촌 지원이라든가, 어촌 관광 활성화 방안도 주목됩니다. 귀어인에게 어촌의 빈집 구입과 창업을 지원해 줍니다.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 정착하는 과정에선, 각자의 생존과 적응의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구룡포에서의 어촌 생활의 기술과 그 변천을 꼼꼼하게 살펴봐야겠죠.
구룡포 어르신들 집담회
구룡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하여 선장까지 40-50년이 넘게 바다 일을 해오신 어르신들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서 어떤 새로운 생존의 기술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구룡포 공존과 생존의 역사로부터 앞으로 우리가 바다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생존 기술을 계발할 수 있을까요?
구룡포는 “길바닥에 널린 오천 원짜리는 개도 안 물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자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만난 어르신들은 지금 한 척에 10억-20억씩 하는 배를 탔던 분들입니다. 당시 어선 한 척이 1-2억을 호가했는데, 어떤 선장은 배가 열 척씩 있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심지어는 구룡포 전체 어선량이 많아서, 울릉도 오징어가 유명하다고 해도, 잡기는 구룡포에서 더 많이 잡았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없다는 말에 수온의 영향에 대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어촌 관광은 지금 어촌에 활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존의 지역 관광에서의 쓰레기 문제, 소음 문제 등의 오버 투어리즘 이슈도 해결해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오버 투어리즘의 근본적 문제는 ‘관광’을 ‘소비’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광을 ‘지속과 생존’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 또한 다른 형태의 ‘공통 세계적 거주’가 아닐까요. 가령 국내 관광지로 가장 대표 지역인 제주 또한 오버 투어리즘 때문에 도민들과 대지와 환경이 몸살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어떤 모색이 있습니다. 관광을 즐기는 것과 관련짓기보다는, ‘생태’와 ‘평화’를 일구는 행위로 전환하는 지점입니다. 자연-환경 생태와 평화와 관련하여 정책적으로는 여러 현안이 공론화되고, 사회 정서와 지속의 차원에서 예술 창작과 문화 행사가 동시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 각자가 서로 도우면서 자생과 공생의 방법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구룡포에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큐레이토리얼 팀의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염원 속에서 어촌 소멸 위기의 시대를 겪어내고 있을까요. 앞으로 구룡포는 어떤 포스트-어촌 바다 서식지로 거듭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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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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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 《오토포이에틱 시티》 큐레토리얼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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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감독
호미반도 둘레길의 활성화는 구룡포의 옛 명성을 찾아가는 첩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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